제2강.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 - 의미분석
Significances of the Early Family (House) Churches
조병수 박사
합신대학원대학교
도입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를 재구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자료는 유일하게 신약성경이 제공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그리고 신약성경의 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 가장 생생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재구성 작업에 어려운 점은 이런 자료들조차도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목적 그 자체가 일차적으로 초기형태의 교회 모습을 사료적 (史料的)으로 묘사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에 관한 대부분의 자료들은 어떤 주요목적 (예를 들면 교리와 선교 등등)에 종속하는 이차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이런 자료들에 들어있는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에 관한 진술들이 기록자의 필요와 수신자의 상황에 따라 기록되었다는 것도 재구성에 난점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진술들은 대부분 조직적으로 어느 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마다 산발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를 재구성하는 일을 힘겹게 만드는 것은 심지어 이런 진술들까지도 문맥에 필요한 것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지 교회 형태에 관한 모든 것을 싣고 있지는 않다는 데 있다. 사실상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에 관한 자료들은 대부분 부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점들에 불구하고 우리는 앞에서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를 재구성해보는 일을 시도하였다1).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그리고 신약성경의 후반부에 속한 책들은 내용상 간접적으로라도 교회문제와 상당히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를 재구성하는 일에 적지 않은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초기 기독교의 교회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닌 까닭은 신약성경의 모든 진술의 배경에 교회론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진술들을 면밀히 조사한 후에 내리는 결론은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는 가족교회로부터 출발하여 가정교회로 발전하고 결국은 지역교회로 확립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가정교회는 가족교회와 지역교회 (오늘날의 노회적 개념으로서)의 중간단계이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그리고 신약성경의 후반부 책들이 제공하는 자료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에 가족교회와 지역교회를 연결하는 가교로서의 가정교회가 존재했을 뿐 아니라 이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제 이 글에서는 가정교회가 초기 기독교를 위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초기 기독교를 위한 가정교회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두 가지 사항에 주의하고자 한다. 첫째로 주의해야 할 것은 초기 기독교의 태동 당시에 가정이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둘째로 주의해야 할 것은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가 가지고 있던 구조는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1. 가정교회의 배경
초기 기독교가 태동하던 시대에는 로마제국의 모든 사회가 가정 공동체 (household community, oikonomia)의 분위기가운데 존재하고 있었다2). 실제로 가정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기본단위였다3).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 당시에 가정은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신약성경이 구원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자주 가정의 표상을 사용한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4).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당시의 가정이 혈연적인 성격을 넘어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5). 당시의 가옥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생활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신들에게 헌정된 가정제단으로 기능을 하였다6). 이런 까닭에 당시의 이교도들은 대단히 쉽게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를 종교적인 단체로 파악하였을 것이다7). 여기에서 어느 정도 이교도의 가정제단과 기독교의 가정교회 사이에 순전히 어떤 외면적인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8).
하지만 결코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가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적인 가정제단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9). 오히려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 (신 6:4-9)과 중간기의 유대교 (눅 1:58)가 보여주는 가정신앙에 연속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초창기에 형성했던 가정회당 (Haussynagogen)과 연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10). 초기 기독교가 선교의 중심을 회당 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 두었다는 사실은 유대인 가정회당이 새롭게 형성되는 기독교 가정교회의 본래적인 모범이었다는 이론을 제시하게 만든다11). 그러나 이 뿐 아니라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초기 기독교에 가정교회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가정교회에 대한 신학적인 의의와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의의와 이상이야말로 초기 기독교가 이방종교의 가정제단 뿐 아니라 유대교의 가정회당과도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가정교회를 형성시키고 견지시킨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가정교회의 구조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단순하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를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표현은 “...의 집에 있는 교회” (h` kat v oi=kon NN evkklhsi,a|, 롬 16:5; 고전 16:19; 골 4:15; 몬 2)이다. 이것은 어떤 지역에 있는 전체 그리스도인이 한 가정에서 집회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관련된 가족들이 한 가정에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12). 틀림없이 사도 바울은 가정에 기초한 개별적인 그룹들을 말함으로써, 경우에 따라 모이는 전체교회 (o[lh h` evkklhsi,a, 롬 16:23; 고전 14:23; 참조. 고전 11:18,20,33,34)와 차별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더 큰 규모의 기독교 운동인 교회 (evkklhsi,a)와 구별하기 위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13). 따라서 이 표현은 기독교 운동의 기본 세포 (basic cell)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의 핵은 실존하는 가족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14).
초기 기독교 당시에 가정에는 직계 가족에 더하여 노예, 자유인, 하인, 노동자, 동업자와 고용자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15), 가정교회가 다음과 같은 구성원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 가정교회는 빌레몬의 경우에서처럼 직계가족으로 이루어졌다 (부모와 자녀, 몬 1-2). 추측컨대 그리스도인 이전의 바울이 초기 기독교를 핍박하면서 신자들을 체포하였을 때 “남자들과 여자들” (te. a;ndraj kai. gunai/kaj, 행 8:3)이 언급되는 것은 가정교회 구성의 핵심인 부부들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길에 두로의 신자들과 작별할 때 그들이 “그 처자와 함께” (su.n gunaixi. kai. te,knoij, 행 21:5) 바울을 전송했다는 것은 직계가족이 가정교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가정교회는 조금 확대되면 직계가족을 넘어 친척과 친구들이 참여하였다. 이 사실을 위하여 고넬료의 회심 사건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사실상 이 사건에서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 (tou.j suggenei/j auvtou/ kai. tou.j avnagkai,ouj fi,louj, 행 10:24)은 고넬료의 회심 전에 모인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이야기의 결말 (행 10:44-48)에 그들이 결국 기독교 신앙에 입문했다고 말하는 것은 가정교회의 확대구성을 의심할 바 없이 확신시킨다. 더 나아가서 확대된 가정교회에는 부하와 하인이 포함되기도 한다. 이것을 위하여 역시 고넬료의 회심 사건에 등장하는 고넬료의 하인 둘과 군졸 (du,o tw/n oivketw/n kai. stratiw,thn, 행 10:7)과 예루살렘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모인 가정교회에서 활약한 마리아의 하녀 (paidi,skh, 행 12:13)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16).
그런데 초기 기독교에서 가족교회와 가정교회는 어느 정도 구분되어 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시작 부분에서 언급했던 스데바나의 집을 종결 부분에서 다시 한번 언급하는데 (oi=koj, 고전 1:16; oivki,a, 고전 16:15)17), 해당단락 (고전 16:15-18)을 분해해보면18) 직계가족으로 이루어진 가족교회와 친구 (또는 하인)까지 포함하는 가정교회를 구분해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도 바울은 우선 스데바나의 집이 아가야의 첫 열매로서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자신들을 (e`autou,j) 드렸으므로 이런 자들에게 (toi/j toiou,toij) 복종하라고 말하고 (고전 16:15-16), 또한 스데바나와 보드나도와 아가이고의 방문을 기뻐하면서 이들이 (ou-toi) 고린도 교회의 부족함을 보충하였기에 이런 자들을 (tou.j toitou,touj) 알아주라고 말한다 (고전 16:17-18).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은 전반에 나오는 사람들과 후반에 나오는 사람들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도 바울이 스데바나와 관련된 사람들을 두 부류로 구분하는 것은 전자로는 직계가족으로 구성된 가족교회를 염두에 두고, 후자로는 친구/하인으로 확대된 가정교회를 생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보여주듯이 고린도에는 스데바나의 가정교회 외에도 여러 중요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여 모이는 가정교회들이 있었다19). 이렇게 가정에 기초한 개별적인 그룹들이 경우에 따라20) 지역교회로 모이고 (고전 11:18,20,33,34),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 (h` evkklhsi,a tou/ qeou/, 고전 11:22) 또는 “온 교회” (o[lh h` evkklhsi,a, 고전 14:23; 참조. 롬 16:23)라고 불리었다. 가족교회가 가정교회와 구분되는 것보다 가족/가정교회가 지역교회와 구분되는 것은 더욱 선명했던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21).
정리해보면,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는 구성원에 따라서 세분하여 설명될 수 있다. 직계가족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가족교회 (Family Church)라고 부를 수 있으며, 친척이나 친구가 동참하는 경우에는 가정교회 (House Church)라고 말할 수 있으며, 부하와 노예가 포함된 것은 가문교회 (Household Church)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도시 안에는 여러 개의 가족교회, 가정교회, 그리고 가족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다. 지역교회 (Local Church)는 위에 언급한 여러 형태의 가정교회들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오늘날의 노회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3. 가정교회의 의미
그러면 초기 기독교에서 가정교회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크게 보면 내적인 의미와 외적인 의미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22). 하지만 조금 더 세분하면 가정교회의 의미는 물질적인 측면에서, 타종교 또는 타사회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체적인 성격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1) 물질적인 측면
초기 기독교는 예루살렘에서 잠시동안 성전을 집회장소로 사용하였다. 이때 기독교에게는 성전을 대신할 건물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전을 집회장소로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사도행전). 그 이유는 신학적으로 볼 때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기독교에 더 이상 신학적인 의미를 제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23), 실제적으로 볼 때는 기독교가 성전으로부터 추방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초기 기독교는 자신이 성전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을 예상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는 시작점부터 집회를 위하여 성전과 집을 동시적으로 겸용하였기 때문이다24). 그러므로 결국 초기 기독교는 성전을 박탈당했을 때 가정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은 예루살렘 밖에서도 비슷하게 발생하였다. 예루살렘 밖에서는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가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회당이 기독교인들의 집회장소로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가 유대인들에게 그 정체를 노출하게 되었을 때 회당에서도 추방당하고 말았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회당을 사용하는 것을 거절당했을 때 가정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25). 다시 말해서 성전과 회당으로부터의 거절은 가정교회의 부상을 위한 중대한 원인이 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특별히 종교적인 활동을 위하여 건축된 건물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26). 초기 기독교가 소수의 성도로 집회장소를 구매하거나 건축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는 집회를 위하여 사용 가능한 건물로 신자들의 집을 자연스럽게 활용하게 되었다27). “집을 공동체의 목적으로 사용한 것은 ‘공개적인’ 집회건물을 사용하거나 구입하거나 건축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필연적인 일이었다”28). 따로 공식적인 예배처소를 마련할 수 없었던 초기 기독교는 지체들이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사적인 공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에나 가정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29).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2세기에 들어서도 집회를 위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기보다는 가정집을 개조해서 사용했던 것이다30).
2) 타사회 또는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타사회 또는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조금 복잡한 의미를 보여준다.
첫째로 타사회와 타종교에 대한 가정교회의 관계는 특히 가정교회의 발생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소극적인 차원에서 이해가 된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인과 이교도들에게 핍박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안전한 은신처를 찾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에게 핍박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은신처는 가정이었다. 가정은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가 핍박을 면할 수 있는 비밀장소였다. 대표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마리아의 집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행 12:1-17, 특히 12!)31). 회심 이전의 바울이 기독교인의 집을 수색한 이유도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행 8:1-3, 특히 3!). 이것은 무엇보다도 가정교회의 발생의 소극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가정교회 발생의 소극적인 의미에도 중요한 교훈이 들어있다. 그것은 초기 기독교가 심각한 핍박 가운데서도 쓰러지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 중에 하나는 그 근간이 가정교회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의 모든 가정이 무너지지 않는 한, 가정교회는 무너질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가정교회가 무너지지 않는 한, 가정교회로 구성된 기독교는 무너질 수가 없었다32).
그러나 성장과정에서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타사회와 타종교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자리를 확보하게 되었을 때 상당히 긍정적인 성격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것은 가정교회가 이웃에 대하여 자신을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이웃은 가정교회에 호의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자연스럽게 이교적인 이웃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33). 이러한 사실은 고린도전서에서 분명하게 입증된다 (아래 성구의 밑줄에 주의하라).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고전 14:23-25)34).
이렇게 하여 초기 기독교는 가정교회를 통하여 이웃사회에 자신을 공개하고 복음을 전달하는 활동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가정교회는 이웃사회라는 덩어리에 대하여 긍정적인 의미의 누룩이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은 초기 기독교가 가정교회로 출발함으로써 타사회 또는 타종교와 질 다른 체계를 보여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가정교회의 시작은 핍박의 상황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가정교회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사회에 대하여 가지는 특별한 사항이 되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유대인에게는 가정회당이 있었고 이방인에게는 가정제단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은 결국 특정한 신전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다. 신전은 그들에게 모든 존재의 중심점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건물에서 자유로웠다. 이것은 유대교와 이방종교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차별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유대인 성전이나 이방인 신전에 대한 차별화 현상이었다. 더 나아가서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공간의 자유를 보여준다. 가정교회는 기독교의 자유정신을 가장 선명하게 표현하는 방식가운데 하나였다. 이렇게 가정교회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단순한 설교를 넘어서 교제와 자유를 가진 생활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선교적인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35). 이 뿐 아니라 초기 기독교는 가정교회의 방식으로 물질과 공간에서 자유를 얻음으로써 비가시적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였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의 실현은 가시적인 것에 구속받지 않는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조. 고후 4:16-5:7).
3) 자체적인 의미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그 자체로도 다양한 측면에서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 결속성
무엇보다도 초기 기독교는 가정교회의 형식을 가짐으로써 핍박과 이단이라는 두 가지 불안한 상황을 극복하는 길을 마련하였다. 본래 가정은 어떤 개인감과 상당한 친밀감과 공간의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이다36). 가정의 친밀성은 대규모적인 정치와 사회의 구조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안정감과 소속감을 제공하였다37).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아주 이질적인 초기의 교회들이 자체적으로 통합되는 것이 가능하였던 것이다38). 신약시대에는 가정이 정치적인 기본단위로 여겨졌는데, 가정의 이익을 위한 가족의 충성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경쟁을 할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39). 따라서 초기 기독교의 집회가 가정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은 가정교회가 그 자체로서 긴밀한 구조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기독교가 핍박과 이단으로 말미암은 불안한 상황을 무난히 헤쳐나가면서 안정되고 견고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가정교회 형식으로 내부적인 긴밀한 결속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40).
특히 가정교회의 내부적인 결속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가장이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볼 때 한 가정의 가장이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하는 경우에 그 가정의 종교적인 통일성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41). 이 사실은 한 가정의 가족들이 가장과 함께 집단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로부터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고넬료 행 10:48; 루디아 행 16:15; 빌립보 간수장 행 16:33; 스데바나 고전 1:16 etc.). 이렇게 가정은 공통된 종교를 가짐으로써 가족들의 결속을 표현하였다42). 가정 공동체의 이러한 종교적 성격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룹들의 행동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물론 이런 일반적인 현상에도 불구하고 가장의 종교와 가솔의 종교가 항상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장이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가솔이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었다43). 먼저 주종관계와 관련하여 이것은 사례적으로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에서 쉽게 발견된다44). 이 경우에 모든 노예가 한결같이 주인의 신앙에 동의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드러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에 한 토막은 심지어 부부관계에서도 이런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라” (고전 7:12; 참조. 고전 7:14). 이와 비슷한 경우는 베드로전서에서도 나타난다: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벧전 3:1-2)45).
(2) 개방성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가 가지는 또 다른 특징은 개방성이다. 비록 가정교회의 사회적 구성은 대단히 상이하였지만 가정교회는 남녀를 불문할 뿐 아니라 모든 신분과 교육수준과 출신의 기독교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46). 가정교회는 “고대에 특히 중압감을 주었던 유대인과 이방인,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높은 자와 낮은 자, 학식자와 무학자 사이의 사회적, 민족적, 종교적 장벽들이 깨어지고 모든 기독교인이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새롭게 결속된 것을 바탕으로 하여 평등하게 되는 곳”47)이었다. 사실상 가정교회의 이와 같은 개방성과 평등성의 실현은 당시의 가부장적이며 계급주의적인 사회에 대항하는 중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48).
(3) 선교성
이렇게 결속성과 개방성을 지닌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가정교회는 초기 기독교에서 전도와 선교를 위한 근거지로서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49). 가정교회가 선교거점으로 사용된 사실에 관한 대표적인 예는 루디아의 집이다50). 사도 바울도 가정들을 사용하여 다음 활동을 위한 근거지로 삼았다51).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가정교회가 선교활동에서 중요한 까닭은 단순히 언어의 설교를 넘어서 각 계층 사람들에게 교제와 자유가운데 생활공간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선교하는 기독교는 수많은 종교단체들과 대중적 철학강의들과 회당의 유인력에 대하여 종교적인 연합운동으로서 경쟁할 수가 있었다52).
(4) 중개성
이와 더불어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두 가지 방면에서 중개적인 역할을 하였다. 첫째로 가정교회의 중개적인 역할은 가정교회들 사이의 연합적 성격에서 증명된다. 초기 기독교에서 가정교회들은 서로 간에 정보들을 교환하는 체계 (network)를 어느 정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53). 예를 들어 비록 상호간에 갈등과 마찰을 빚고 있는 가정교회들이라도 성찬을 위한 집회의 정보를 나눔으로써 지역교회의 성찬예식 수행에 무리가 없게 하였다 (고전 11:17이하). 또한 가정교회들이 사도 바울과 같은 신앙지도자의 지역교회 방문에 관하여 서로 간에 정보를 교환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고전 16:1이하). 특히 가정교회들의 상호중개성은 사도들의 편지를 회람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골 4:15-16)54). 아마도 예루살렘의 사도회의 (행 15장)는 안디옥 교회와 같은 지역교회의 참여를 중요시하면서도 예루살렘에 여러 가정교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할 때55) 가정교회들의 참여를 배제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가정교회의 중개적인 연합집회였다고 추측하게 만든다.
둘째로 가정교회의 중개적인 성격은 상부적인 관계에서도 엿보인다.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사도들의 그룹과 같은 상부조직에 협조하는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다음과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우선 상부적인 관계에서 가정교회는 상부조직에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보고하였다. 때때로 이런 보고방식은 가정교회와 지역교회에 근접하여 사역하는 순회전도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도 했지만56), 가정교회로부터 직접 시행되기도 하였다 (스데바나, 고전 16:15-1857)). 또한 가정교회의 상부적인 관계는 접대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했다58). 가정교회는 사도들 뿐 만 아니라 (롬 15:23; 고전 16:6; 몬 22), 사도들이 파송한 순회전도자들을 접대하였다 (딛 3:13; 요삼 659)). 이런 순회전도자들은 상부구조에 가정교회의 형편을 보고할 뿐 아니라 가정교회들에 관한 정보를 소통시킴으로써 일종의 네트웍을 형성하고 가정교회들의 연합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60).
(5) 계승성
마지막으로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하긴 하지만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사도들의 활동이 끝난 후에 교회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산실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정교회는 ‘사도적’ 지도가 상실된 후에 교회를 세워야 할 기독교 지도자들을 위한 양성 근거지였다”61). 자신의 집을 가정교회로 제공한 부유한 집주인들은 초기 기독교에서 자연스럽게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을 것이다62). 결국 이 사람들은 사도들을 이어서 초기 기독교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되었다.
4. 남은 문제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를 연구하면서 남는 문제는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가정교회들 사이에 발생했을 갈등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한 지역에 병존하는 다양하고 상이한 가정교회들이 아무런 긴장 없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다63). 가정교회를 연구하는 일에 시발점을 놓았던 Filson은 한 도시에 여러 가정교회가 존재했다는 것은 사도 시대의 분쟁에 대한 경향을 설명해준다고 말했다64). 한 도시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정교회는 분파를 등장시킬 잠재성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65). 가정교회 간의 마찰에 대한 증거로는 거의 언제나 고린도전서의 분쟁이 제시된다66).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과연 가정교회들 사이에 일어난 것인지는 앞으로 더 자세히 따져봐야 할 문제이며, 만일에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가정교회들 간의 분쟁이었다면 그것은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도 더 폭넓게 고찰해야 할 문제이다.
결론
가정교회는 신약성경이 여러 곳에서 풍성한 자료를 제공하고 다양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1세기동안 그리고 심지어 그 이후 세대에서도 교회 발전에 있어서 중대한 요소였다는 것이 분명하다67). 초기 기독교에서 가정교회가 태동하는 데는 당시의 상황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정교회는 가정이 사회의 모든 영역을 기초하는 기본단위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상황적인 이유에서 뿐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에서도 초기 기독교를 위하여 필연적인 것이었다. 앞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초기 기독교는 처음부터 가정교회를 위한 신학적인 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에 가정교회가 단지 당시의 현실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면 지금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의 형성원인이 역사적 상황에 머물지 않고 계시적 신학에 기초하고 있다면 초기 기독교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엄청난 격차를 가지고 있는 현대 기독교에도 가정교회의 신학과 이상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원시 또는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기독교의 태동시기에서 선교와 신학과 조직에 중요한 요소를 보여준다. 그래서 현대의 교회는 선교에서 그리고 생활 가운데 종종 대단히 빈약하게 된 선포에서 저 kat v oi;kouj evkklhsi,ai의 형태와 영향을 기억해야 한다”68). 신약성경으로부터 가정교회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고 의미를 발견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는 오늘날 과연 어떻게 가정교회의 이상을 회복할 것이며, 과연 어떻게 가정교회의 모습을 재현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체적으로 목회자들은 대형목회를 하려는 꿈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가정교회는 소형목회이므로 가정교회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목회자가 대형목회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목회자 뿐 아니라 성도들도 가정교회를 실현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헌신과 희생을 멀리하는 안일한 신앙생활을 정리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듯이 철저한 헌신이 없이는 가정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가정교회를 회복하려면 분명한 신학의 확증이 필요하기 때문에 신학교는 이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철저한 신학작업을 해야 한다. 만일에 신학교가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형태를 복원하는 일을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면 부지중에라도 교회의 세속화를 찬성하고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여러 가지 방향의 노력과 함께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에 관한 신약성경의 제시를 바탕으로 하면서 문화와 사회가 고도로 발달한 우리의 현실을 고려하여 가정교회의 이상을 현실화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가정교회와 지역교회의 관계를 비롯하여 가정교회와 지역교회가 전기독교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를 가장 타당하게 방법론적으로 설정하기 위하여 지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신약교회의 회복이 현대교회의 살길이다.
69) Stuhlmacher, Philemon,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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