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클레시아 3.0> 그 스물여덟번째 이야기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말하지만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하는데 그와 같은 인격을 가지고 그러한 사랑을 발현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랑이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전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성신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새 사람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동안은 죄에 얽매여 있어서 자신의 인격이 한 번도 순수하게 발출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제약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내 자유 의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는 일에 쓰는 것이 기쁘고 힘이 나게 되는데 이러한 것이 모두 중생한 사람의 품성이다. 성신께서 임하실 때부터 가장 순수한 인격으로 변개되어서 비로소 죄로부터 철저하게 구별되고 보호받는 상태 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소원하게 되는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성신님을 우리 안에 함께 하게 하심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고 순전한 복음에 접촉케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인격을 소유하게 하고 그러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하신다. 이것이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본분이다. 곧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소원하고 그를 위해 전력 투구하는 것을 가장 큰 기쁨과 보람으로 여기는 모습이 원래 사람이 창조되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사람의 본분이라고 할 때 ‘본분’이란 존재(BEING) 그 자체를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으로서 할 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과 존귀하심을 가장 완벽하게 반사(reflection) 또는 투영시키는 것이 사람의 첫째 되는 본분이다. 이것이 바로 온 우주에서 유일하고 가치 있는 사람의 인격 안에 담긴 특성이다. 따라서 사람의 인격이 하나님과 관계없는 일에 쓰인다면 이미 그 인격은 인격 본연의 가치를 상실한 것과 다름없다.
이 지상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인격을 가지고 자신의 품성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그 고매하신 인격을 드러내는 일이 곧 사람의 본분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동질의 사랑을 발휘하고 하나님의 온유하심을 본받아서 고상한 온유함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본받아서 절대적인 의를 행사하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원래의 모습이자 본분이다. 그것이 인생의 최후 가치이기도 하다.
사람의 인격은 하나님의 인격과 같이 고상하게 발전이 되어서 그 인격의 발현이 하나님의 인격과 버금가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에 최고의 가치가 있다. 거기에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란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 곧 하나님화(化) 되는 데 있다. 인간의 완성이란 하나님과 버금가는 위치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데 있다. 그것을 가리켜 구원(救援)이라고 한다.
구원의 완성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보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동등하고 하나님과 비견할 만한 인격을 보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과 품격을 가지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서 계시고 동등한 인격으로서 교통을 나누고 계신다.
이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바로 그분이시다. 인간이신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시어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서 계시게 되었다. 이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비견할 만한 위치에 서게 되는 모습이 바로 영광된 모습이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영화(glorification)라고 한다.
영화란 구원의 완성이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구원이기 때문에 결국 영화 된 모습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최후의 모습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된 몸과 같이 우리가 변화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순일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최선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이 구원이야말로 인간 본분의 극치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의 삶의 결과가 곧 구원이어야 한다.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 같으면 아무도 그 사람이 자기의 본분을 다했다 할 수 없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는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의 본분을 다 행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靈)을 우리 안에 보내시어 어떤 에너지를 주신다. 곧 하나님의 기쁘신 일을 소원하게 하는 그 힘을 주신다. 우리가 성신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났다 혹은 중생했다고 할 때에는 그 힘을 통해 가장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좇기 시작하게 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인가?’에 우리의 총체적인 인격을 다 투자하게 된다.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함도 아니고 또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가장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데에 우리의 전인격을 발휘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본분을 찾아가는 제 일보이다. 그러므로 그 기쁘신 뜻을 찾아서 사는 것이야말로 의당히 우리가 지금부터 살아가야 할 당위가 된다(웨민 대요리문답 제1문).
<송영찬, CNB 706 교회와 신앙, 서울: 도서출판 깔뱅, 2007, pp.130-132>
<에클레시아 3.0>그 스물아홉번째 이야기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본의를 알고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본의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좇아 살아가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순일하고 순결한 사랑이 발휘된다. 이럴 때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바로 그 일을 위해 내 모든 삶을 투자하고자 하는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1) 구원에 이르기 위해 첫 번째 단계인 지적(知的) 변화
이러한 변화에는 의당히 어떤 전환점(turning point)이 있기 마련이다. 그 첫째가 지적인 전환점이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아는 것에서부터 내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매우 중대한 변환점이 된다.
이런 ① 지적인 변개가 생기면 그 다음에는 ② 정적인 변개가 시작되어 그 일을 향해 온 마음을 쏟아 붙는 결단이 발생하게 된다. 그 일에 모든 뜻과 힘을 모으게 된다. 그 다음에는 ③ 의지적인 변개가 발생하게 된다. 이제는 뜻과 힘을 모아 자신의 모든 삶을 그 일을 위해 경영해 나가고자 하는 출발을 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변화에서도 이처럼 구분해 놓고 본다면 먼저는 지적인 변화가 발생하고 다음에는 힘을 축적하는 정적인 변화가 생기고 마침내 그 일을 향하여 모든 능력을 표출해 내는 의지적인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본분을 행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신 것 외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시게 사용하실 길이 무엇인가를 알 수도 없다.
하나님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셔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완벽하게 계시해 주신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 외에는 어디서든 하나님을 알 방법이 없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은 결국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부터 하나님을 알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항상 그리스도에게로 모아진다.
2)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지적 변개 가져와
내가 중생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삶이란 항상 얼마만큼 그리스도를 아는가와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삶의 목적이다. 이것이 곧 우리가 말하는 대의적(大義的)인 존재 의미이다. 이 목적이 분명할 때 그 단계별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목표가 분명해진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주신 유일한 제도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도 없고 사랑할 방법도 알 수 없다. 에베소서에서 말한 것처럼 천하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게 하셨고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삼으셨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이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universal church)로서 유일한 공교회이며 이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만이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락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힘과 지혜로 살아가며 그리스도와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그것은 우주적인 교회가 하나님의 유일한 통치 기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방불한 실체로서 지상에 세워진 것이 바로 유형교회이다.
유형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인간의 가장 고상한 삶의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지상에 세우신 유일한 방편이다. 그래서 교회에 소속이 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증표가 된다.
<송영찬, CNB 706 교회와 신앙, 서울: 도서출판 깔뱅, 2007, pp.132-135>
에클레시아 3.0> 그 서른번째 이야기
교회에 소속이 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증표가 된다면 이제부터는 그러한 구원의 보증이 되는 교회를 추구해야만 한다.
지금까지는 자기 하나의 구원에만 매달려 자기 하나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추구해 나왔다면 그런 모든 과정이 완성되고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상에 세우신 유일한 구원의 기관으로서 교회에 우리의 모든 삶이 귀착되어 있어야 한다. 교회만큼 우리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없다. 교회가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방편도 없다. 그렇다면 구원을 이루어 갈 길도 없다. 따라서 우리의 본분을 행사할 방도조차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삶이 당연히 교회 중심적인 삶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 결국 교회를 선택한다는 것은 본인에게 큰 책임이 돌아가게 된다. 우리가 교회를 선택할 때에는 과연 내 인생의 본분을 가장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교회인가 아닌가를 깊이 생각하고 분별해서 결정해야 한다. 내가 이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본의를 가장 잘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터전인가 아닌가를 따져서 그 교회의 회원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교회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분별력은 복음 안에서 장성한 성도들만이 가지게 된다.
처음 전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그러한 분별력을 바로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성신님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성도라면 성신께서는 제일 먼저 오염되지 않은 복음을 접촉케 하심으로써 복음 안에서 장성하도록 돌보아 주신다. 아무리 부패한 세상 속에서 오염이 심한 교회라 할지라도 성신께서는 그 사람을 보호하고 인도하셔서 그러한 부패와 오염을 제거하고 순수한 복음을 듣게 함으로써 그의 영혼이 정상적으로 자라게 하신다. 이것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의도이다.
장성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분을 찾아 살기 위해 의당히 자신의 본분을 행사할 수 있는 터전을 찾게 된다. 그는 자기에게 가장 합당하고 자신의 본분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기 위한 인생의 가장 온전한 삶의 극치로써 교회를 추구하게 된다.
① 교회 선택은 본인에게 책임 있어
그럴 경우 과연 내가 지금까지 소속되었던 이 교회가 그러한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교회인지 아닌지 따질 수 있는 분별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런 후에야 그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가장 온전하게 발현하기 위해 세워주신 교회인가를 확인하고 그 교회의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고 교회의 회원으로서 인정을 받아 세례를 받게 된다. 교회의 회원이 될 때에는 자기 인생의 본분을 가장 확실하게 제시해 줄 수 있고 발현해 줄 수 있는 교회의 회원으로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자기의 책임이다.
점차 자기의 본분이 확실해지고 그 능력을 행사함에 있어서 교회가 보장을 해주지 않는다면 심각하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내가 한번 이 교회의 회원이 되었으므로 죽을 때까지 온갖 충성과 봉사를 다하며 살겠다고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먼저 자기가 복음을 충분히 접하고 세례를 받으려고 할 때에 이 문제를 생각했어야 한다. 그래서 이 교회야말로 내 인생의 가치를 가장 아름답게 그리고 가장 완전하게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터전이 확고해질 때 그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회원으로서 가입해야 한다.
② 교회는 그 회원을 분별해야
반면에 교회도 똑같은 책임이 있다. 한 신자가 교회의 회원으로서 들어오고자 할 때 과연 이 사람이 교회의 한 지체로서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함께 수행할 수 있는가를 면밀하게 살펴본 후에 세례를 주고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와 긴밀한 관계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나라의 전체적인 진행 아래에서 그 교회만이 가지는 독특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일을 함께 이루어 갈 지체들을 확인해야 한다. 그 교회의 회원에게는 자기가 그 교회 안에서 맡고 있는 고유한 역할을 파악하고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 자기의 본분을 다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고 그 뜻을 이루어 갈 위치에 비로소 서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당한 교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고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해나가는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향하신 기쁘신 뜻이다.
③ 교회와 회원과의 관계
한 개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고 교회는 먼저 교회적 사명을 파악하고 난 뒤 그에 적합한 교우들을 지체로서 맞이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일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목사이다. 그래서 한 교회를 세우고 운영함에 있어서 목사의 위치와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목사는 교회의 정체성을 항상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 교회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방향성과 역사성 나아가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적합한 성도들로 구성이 되어 있는가 아닌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각각의 성도들이 과연 그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안목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목사 한 사람은 교회 전체 생명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성도들도 똑같은 책임을 가지고 있다. 과연 목사가 그럴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확고하게 복음에 입각한 개혁교회의 신학에 따라 그러한 자질이 있는 목사라고 인정이 된다면 함께 생명을 걸고 그 일을 수행해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가야 할 정당한 길을 찾을 수 없다. 그럴 경우에는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정당한 위치를 빨리 찾아 나서야 한다.
마찬가지로 목사와 한 신자간에만 그러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모든 성도들 사이에도 그러한 관계가 확인이 되어야 한다. 그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공동체 사람들이 이제는 서로에 대한 동질성도 확인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례를 받을 때 이미 그러한 관계 확인이 되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뒤에라도 계속해서 서로 한 몸이라는 증거를 서로 드러내 주어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은 이런 것이다’ 하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교회 앞에 분명히 드러내어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다 거기에 합의하고 함께 교회가 나아가야 될 방향을 향해서 협력해야 한다. 그렇게 해 나갈 때 모두가 궁극적 목표인 구원에 이르게 된다.
<송영찬, CNB 706 교회와 신앙, 서울: 도서출판 깔뱅, 2007, pp.135-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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