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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6. 19. 21:01

본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제1계명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언약을 체결한 독특한 관계임을 전제하고(서문) 언약의 대상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기지 말 것을 지시하고 있다.

제1계명은 신명기 5장 7절에서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번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NASB는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 성경(ינפ־לע םירחא םיהלא ךל־היהי אל)을 직역하면 “안 된다. 너에게 있게 하는 것은, 다른 신들을, 내 얼굴 앞에서”라는 말로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이 너에게 있게 하지 말라”고 번역된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의 존재를 용납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을 선언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관과 그 언약에 참여한 자신의 역사적인 위치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미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있는 자기들이 왜 새롭게 언약을 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시대적인 요청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구태여 시내산에서 언약 체결식을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미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십계명의 서문에서 왜 이스라엘이 시내산 언약의 당사자가 되어야 했으며 그 언약의 당사자인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명확하게 표시한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1. 신 앞에서 확인해야 할 자신의 위치

 

제1계명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바른 신관을 정립하되 그 사상에서 추호라도 빈틈이 없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알고 오직 여호와를 위해 살되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죄악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먼저 자기들이 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바른 세계관을 정립해야 한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고 약속한 말씀을 근거하여 자신의 존재 의미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절대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1)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언약 백성

 

이미 본문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여호와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두지 말라는 말로써(개역 성경은 신 5:7에서 출 20:3의 제1계명을 의역하고 있음) 언약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은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표시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지고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존재는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맺어진 언약 관계가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 언약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을 역사 위에 명확하게 증명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특권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족속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명예를 높이고 그 권위를 세우기 위해 부름 받는 족속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 하나 뿐이다. 이스라엘의 존재는 이처럼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점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여호와에 대한 순결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지나쳐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위한다는 것은 순수해야 할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부정(不貞)을 가져오게 한다. 그렇게 된다면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가치를 상실한 것과 다를 바 없다.

 

2) 언약 백성에게 요구되는 정확한 신개념(神槪念)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따라 민족적 존폐의 여부가 달려 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에 대하여 언제나 순결한 신앙을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자주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대목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정조 관념을 들어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성경은 이스라엘에게 우상 숭배의 경향이 나타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정조를 버리고 이스라엘이 간음했다고 타매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순결과 정조를 생명으로 여겨야 할 신부가 이를 헌신짝 같이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쏟기 시작하는 것은 이미 순결을 상실한 상태와 다를 바 없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 아래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풍부하고 정확한 개념과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공백이 발생하고 빈틈이 생긴다면 그것으로 인해 그릇된 사상이 침범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신개념이 혼탁하게 된다. 그 결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하고 섬기게 된다.

 

2. 날마다 발전해야 할 신관(神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처음에 자기들을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여호와에 대한 개념을 생동감 있게 가지고 있었다. 그 신관이 가면 갈수록 더 섬세해지고 풍부해져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날로 발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갈수록 더 선명해져야 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목적으로 친히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시며 앞장서서 가나안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아 가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생활해 가면서 그리고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새로운 경험을 쌓아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고 확실해지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새롭게 이끄시는 만큼 하나님에 대한 개념 역시 날마다 발전되어야 한다.

 

1) 사람만이 가지는 발전성

 

인간의 생각이 미래 지향적으로 발전되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여타의 동물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이다. 이러한 특성을 잘 발휘하여 날마다 새롭고 풍부한 신지식(神知識)을 쌓아가야 한다.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신개념(神槪念)이 더 면밀해지고 나중에는 바늘 끝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탄탄해져야 함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1-12)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장성해 가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격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퇴보한다면 그것은 큰 일이다. 더욱이 주의해야 할 것은 매일 장성해야 할 만큼 장성하지 못하고 조금씩 미흡한 부분이 남아 있다든지 혹은 답보(踏步) 상태로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추어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신관에 여백이 많아지게 되고 틈이 벌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오늘이라는 시간동안 열심히 살면서 새롭게 경험하고 쌓아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면 그 빈틈을 사탄이 비집고 들어와 그곳에 왜곡된 신관을 심어두게 된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불투명하게 되고 나중에는 잘못된 신관을 만들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만들어 놓은 신을 여호와 하나님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2)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의미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기로 결정한다면 몰라도 이미 애굽에서 구원받은 경험과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로 양식을 삼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러한 내용을 발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요절이 날 것이다. 때문에 여호와를 다른 신으로 대치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날마다 여호와에 대한 신관이 장성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이신(異神)적인 생각이 조금씩 똬리를 틀기 시작하게 되면 언젠가는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여호와인 것처럼 섬기게 된다. 문제는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기면서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면 더 심각한 일이다. 이것이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제1계명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해야 할 이스라엘이 여호와가 아닌 잘못된 신관의 요소를 가미하여 여호와를 조작하여 섬긴다면 그들은 결코 이질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사상이 정확하고 신관이 바르게 정립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하나님의 성호(聖號)에 대한 그릇된 태도

 

1) 하나님을 대신하는 인간의 경험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태도를 가지지 못하고 언제나 결핍된 차원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할 때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이질적인 신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자기가 경험한 사건들을 바탕으로 현실의 문제를 타개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게 된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어 있다면 이질적인 요소가 최소화하여 나타나게 된다.

여호와에 대한 인식이 많은 부분에서 결여되어 있다면 일상의 경험이 자신의 장래를 판단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더욱이 한두 번 발생한 사소한 일에서 자신의 경험이 유력하게 작용하여 사태를 유리하게 수습되면 매사에 자신의 이지(理智)에 근거하여 인생을 계획하고 운영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과 적극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바른 신관을 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얼마든지 이질적인 요소가 그 사람의 신관에 파고 들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이 발전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일종의 관념적인 차원에서 진행되며 자신의 인생을 경영함에 있어 신앙은 하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여호와에 대해서는 적당히 대우하고 특별하게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며 노엽게 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매사에 자신의 경험과 이치를 판단의 기준으로 자신의 인생을 경영하게 된다.

이 정도의 차원이 되면 매사에 일상의 순리를 따라 합리적인 방법으로 인생을 경영해 나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자신의 미래를 위한 하나의 수호신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만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그럴듯하게 섬기고 사는 것 같지만 자신의 출세를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고 자신의 명예를 얻는 일에 하나님의 권능을 등에 업은 것처럼 위세 당당하게 살아가는 파렴치한 행위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그저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활개치고 살아가는 행위가 바로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그 개념이 상당히 다양해서 여러 종류의 신을 자작(自作)하기도 한다. 꼭 여호와 하나님만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신을 섬길 수 있다. 심지어 신이 아닌 것들도 신으로 섬기고 살면서 양심의 가책이나 무지의 소치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이 사람이다.

 

2) 그릇된 신관의 산물 ‘혼합주의’

 

구약의 역사가 증거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배반하게 될 때 가나안 땅의 풍요의 신으로 알려진 바알(לאאב)을 여호와와 하나님과 동격으로 여기고 섬겼다. 즉 그들은 여호와를 신앙하되 거기에 바알의 신앙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혼합주의(syncretism)적 종교를 만들어 내었다. 즉 여호와의 신관을 바탕으로 그들은 바알을 섬겼던 것이다. 바알을 섬기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오해하여 하나님인 것처럼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와 바알을 겸하여 섬겨왔었다. 그러나 아합 왕의 시대에는 이세벨이 가져온 아세라 여신을 섬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세라 신상은 사람의 손으로 조각한 것으로 이것을 섬기는 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을 섬긴 것과는 그 성질이 전혀 달랐다(왕상 16:29-34).

이세벨은 아예 여호와를 섬기지 못하게 하고 전적으로 바알과 아세라만을 섬기게 하는 종교정책을 썼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마음 속에는 여호와에 대한 개념 대신에 우상을 섬기게 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어두움이 이스라엘 백성을 감싸고 여호와와 단절시키는 와중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이세벨의 정책에 호응하였다. 이것은 이미 그 마음 속에 여호와에 대한 분명한 신관이 왜곡되고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3) 신의 자리에 서게 된 인간의 이성(理性)

 

이세벨이 이스라엘에 가져온 신관은 저급한 우상 숭배 단계이기 때문에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기독교에 속한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신관은 상당히 높은 개념을 도입하여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다른 신을 섬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상당히 고상한 신개념을 도입하여 인간의 궁극적인 생애의 목표점인 지고선(至高善)을 신이라고 섬기고 그 신의 세계를 지고(Idea)의 세계라고 하는 초연신론(超然神論)에 빠지게 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연신관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되 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법칙을 내시고 한치의 착오도 없이 완벽하게 운행되도록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 이치에 따라야 한다고 믿게 된다. 이것을 이신론(理神論, Deism)이라고 한다.

 

여기에 빠지게 되면 매사 자신의 인생을 세상의 이치에 따라 인간의 사고 방식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근본에까지 침투하여 성경을 하나의 낡은 전통이나 신화(神話)로 여기고 인간의 이성에 따라 합리적인 사고 방식으로 새롭게 정립된 신학을 세워 그것으로 조작된 신을 하나님으로 숭배하게 된다.

그 결과 언약 가운데에서 언제나 우리와 교제하시고 즐거움을 나누기를 원하시어 계시를 주시고 오늘도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제쳐두고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조작한 이신(理神, desim)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배도의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교회가 이신론에 빠지게 되면 매사에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이치(理致)에 따라 판단하게 되고 논리적인 설득력에 감화를 받는 것으로 신앙을 대신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서구 기독교에서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늘날 독일 교회를 비롯해 대다수의 교회들에서는 현저하게 이신(desim)이 신앙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하나님이지만 그것은 이름뿐이며 그 정체는 이신(desim)이다.

이러한 악한 경향이 한국 교회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어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신론에 빠져 있고 기독교인들조차도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고 바른 판단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인생을 경영해 나갈 때 하나님과의 언약 아래 일상의 생활을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설정한 멀고 웅대한 인생의 목표점을 정해 놓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신앙이라고 신봉하고 있다.

 

그 방법에 있어서 오순절 계통의 순복음 교회와 같이 신비적인 경향을 띠든 아니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외치는 것과 같이 합리적인 바탕을 가지고 목표점을 공략하든 문제는 그들의 사고 방식의 뿌리에는 사람들의 이성적 판단을 절대시하고 이를 신앙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논리적 귀결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경향일 뿐이지 그것으로 인간 세계가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비록 하나님이 아닐지라도 아직까지는 하나님으로 여기고 그 안에서 신앙을 고수하려고 한다. 이 단계에서는 이미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고 바른 신앙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일종의 두려움이 남아 있어서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신앙 양심이라는 것을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더 무서운 것은 이러한 경향이 점차적으로 그 농도가 짙어지게 된다면 아예 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거부하게 되고 그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4) 신의 자리에 오른 인간, ‘적그리스도(Anti Christ)’

 

이 정도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신은 더 이상 인간을 지배하지 않게 되고 신이 만든 법칙은 사람에게 아무런 효력도 발생하지 않게 된다. 대신 인간이 신의 위치에 서게 되고 절대자로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것도 일종의 종교와 같은 사상적인 현상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가 전 인류의 신앙의 대상으로서 신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이미 역사는 얼마든지 한 개인이 수많은 사람들의 신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 단순히 로마의 황제들과 같은 신적 존재로 사람의 눈에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신 그 자체로 군림한다. 마치 일본의 황제가 일부의 일본인들 사이에서 절대자로 군림하고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 세계의 기독교가 하나님을 배척하고 그 자리에 한 개인을 세운 후 그를 신으로 신앙하고 경배하는 날이 오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 인물이 적그리스도이다. 이때는 오직 적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법칙이며 신앙의 대상이 된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이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신 들)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 2:4)고 경고한 바 있다. 이 사람은 ‘불법의 사람’(살후 2:3)이라고 하는데 어느 날 그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정면 대적하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교회를 통치하게 된다. 이때 배교한 교회들은 ‘적그리스도’(Anti Christ, 요이 7절)를 하나님이라고 섬기며 그에게 경배하는 날이 오게 된다. 이처럼 현대 교회들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인간들이 자작한 이신론에 빠지게 되면 결국 엄청난 배도의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것이다.

 

4. 제1계명의 가르침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다. 이미 여호와께서 자신을 계시하심에 있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היהא רשׁא היהא, 출 3:14)고 선언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그 자신이 존재의 원인자이다. 사람의 필요에 따라 존재하거나 그밖에 다른 어떤 원인에 의해 타력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 자신의 존재 요구에 의해 존재하시는 인격신이시다.

사람들의 요구와 편리에 따라 적절하게 변질시킨 하나님을 하나님인 것처럼 오해하고 신앙하는 행위가 바로 제1계명을 위반하는 범죄이다. 이처럼 조그만 오해가 마침내 하나님을 다른 신으로 변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나아가 인간의 사상을 절대자르르 대신해서 신앙하게 되며 마침내 인간에 의해 신의 자리가 박탈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때문에 제1계명은 나머지 전체의 계명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제1계명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은 나머지 아홉 개의 계명을 파기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제1계명에서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관을 정립하지 않고서는 그 다음에 등장하는 계명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소망이나 효력을 기대할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교제하시는 인격자이시다. 즉 언약의 당사자로 우리의 하나님이며 구원자이시다. 또한 그분은 하나님이신 관계로 우리 인생을 가장 완벽하게 경영하는 분이시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인간으로서 최상의 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날로 새로워지는 경험과 신지식을 쌓아감으로써 우리의 인생을 통해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항상 확인하고 증거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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