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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교회들은 자신들이 관리하는 신학교를 가져야 하는가?

이차식목사(김천)

by 김경호 진실 2015. 6. 3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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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신 교단 30주년기념논단 3

왜 교회들은 자신들이 관리하는 신학교를 가져야 하는가?

이차식 목사, 김천덕일교회

 

이 질의에 답을 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사항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는 목사후보생들을 훈련하는데 있어서 교회의 책임에 대한 문제이다. 두 번째는 목사후보생들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이다.

 

1. 목사후보생들을 훈련하는데 있어서 교회의 책임에 대한 해석상의 논쟁들

 

말씀을 맡은 목사를 훈련하는 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교회의 책임인가? 아니면 교회와 상관없는 독립된 기관이 목사의 훈련을 하여야 하는가? 교회가 감독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기관이 목사의 훈련을 하여야 하는가? 이 주제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찾아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본다.

개혁교회 역사를 볼 때 디모데후서 22절은 이 주제에 대한 주요 구절로 인식하고 있다. 이 구절은 목사후보생을 훈련하고 돌보는 것과 관련하여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주요 구절이다. 말씀을 맡은 목사를 훈련시키는 것을 계속하도록 누가 소명을 받았는가? 이 일은 교회가 직접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1-2)고 당부한 바 있다. 그러면서 디모데를 자기의 영적 '아들'로 말씀한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나의 동역자'(16:21),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일군'(살전 3:2),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군'(딤전 4:6)이라고 불렀다. 디모데는 장로의 회에서 안수를 받았으며(딤전 4:14),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을 위임받았다(딤전 4:15,16).

디모데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사역을 하였다(딤후 4:5). 에베소 교회에서는 디모데가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예를 들면 바울 사도는 그에게 장로의 직무에 관한 교훈들을 주었으며(딤전 3:1-7; 5:17-19) 회중의 일반적인 모든 것을 돌보도록 위탁하였다(딤전 4:11-14; 딤후 2:14-19).

당시 죽음을 앞두고 있는(딤후 4:6,18) 사도의 주요 관심은 자신의 사후에 복음이 안전하게 전수되는 것(딤후 1:13-14; 3:14-17)과 진리 안에서 선포되는 것(딤후 4:1-5)이었다. 사도의 가장 친밀한 디모데에게 당부한 것은 다른 사람이 가르칠만한 자질을 갖추도록 디모데가 전수받은 복음을 믿을만한 신실한 자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딤후 2:2에서 사도가 한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모데가 바울에게서 들었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위탁해야 한다는 것을 사도가 부탁했다. 다른 이들에게 사도가 전해준 복음을 위탁하는 사역은 교회의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은 디모데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주요 원리는 교회에 재직하는 사람이 교회의 목사후보생들을 훈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장로의 회, 교회에서 임명된 사람들이 교회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을 훈련하여야 한다. 이것이 신학교의 형성 과정에 대한 성경적 원리이다. 신학교는 교리의 확실한 것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목적을 지닌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종종 교사에 대해서, 혹은 교사로서 자신을 언급하셨다(8:19; 12:38; 22:16,24,36; 23:10).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셨다. 이 가르치는 과정은 주님이 승천하심으로 멈추지 않았다. 12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며 가르쳐 지켜 행하도록 대위임 명령을 주셨다(28:20).

바울 사도는 전도여행을 할 때마다 여러 젊은 신실한 자들을 데려갔다. 회중 가운데서 일할 사람을 뒤에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디모데는 에베소에 남겨져서 회중의 삶에 보다 더한 교훈을 주도록 하였다(딤전 1:4,18). 디도(1:5)와 에바브로디도(2:25)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신학교육의 초기 형태이다. 한마디로 목사로부터 목사에게 전수되었다.

 

2)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이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4).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불리어지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이 문맥은 감독과 집사의 자격을 교훈한 후에 주어졌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은 교회의 중심 과제가 복음진리를 유지하고 제공하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딤전 2:4; 4:3; 17:17).

목사직은 복음을 위한 것이며 복음은 교회에게 위탁되어졌다(17:8,14). 칼빈은 딤전 3:15의 말씀에서 "바울은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의 신실한 수호자이며 세상에서 멸망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칼빈이 그의 주석에서 '진리의 기둥과 터'를 해석할 때, 진리의 위탁을 말씀 맡은 목사에게 적용한다. 목사와 교사를 훈련하는 것은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의 사명이며, 교회와 관계없는 기관이나 독립된 기관의 책임이 되어서는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3) 교회의 사명은 '복음 사역''신학교'를 유지하는 것이다.

돌트교회질서(1618-1619) 2조에서는 교회의 "직분에는 말씀을 맡은 목사, 신학교수, 장로, 집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38주일 103문답은 제4계명을 해석할 때 "복음 사역과 학교가 유지되어야 하며"라고 하였다. 여기에 학교는 신학교를 의미한다. 교회의 사역을 복음 사역과 신학교의 유지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사역과 신학교를 동등선상에 놓고 있다. 이것이 종교개혁시대 16세기에 믿음의 선진들이 주장하고 논증해 온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그리스도께서(28:18) 그의 교회에 직분들을 주셨으며(4:11-13) 그의 성령으로 그들을 부르시고 준비하게 하셔서 섬기도록 하셨다(20:28). 그러므로 목사 직분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개혁주의 교회의 임직에 대한 노회 예식에 의하면 목사가 임직될 때 다음 질의에 분명하게 답변하여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부르시고 이 거룩한 목사로 부르신 것을 진실로 믿습니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주님께서 교회의 직원을 부르시고 그 직무를 실행하는 방식을 결정하신다는 것과, 설교의 직분은 교회에 주어지며 복음 설교는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설교자를 훈련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며 복음 선포는 교회의 존재에 대한 핵심에 속한다(28:19-20; 10:14).

이와 같이 교회가 설교하는 직분을 통하여 복음 선포의 사역을 가졌다면(4:11) 교회가 목사후보생을 훈련하는 책임을 가짐으로써 계속 복음이 선포되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일은 교회와 상관없는 몇 사람의 그룹에게 주어질 수 없다. 복음 설교 없이 교회는 없다. 신학교육은 교회들의 책임이다.

"많은 증인 앞에서 네가 나에게 들은 바를 신뢰할 만한 자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자질을 갖추게 될 것이다"(딤후 2:2)는 사도의 말씀처럼 교회가 말씀의 사역자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세우기도 하지만 그들이 올바로 훈련되어지도록 그 모든 신학수업과 과정에 대하여 분별력 있는 관심을 가지고 보장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단이 위원회를 통하여 신학교와 공적 관계를 가지고 신학 훈련을 감독하고 지도하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교권으로 휘두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신학교와 교회의 필요한 것들 사이에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개혁주의 교회들에서는 신학교에 대한 '위탁교육'이나 '직영'이라는 언어 자체가 없다. 왜냐하면 교회들이 미션대학에 대해서는 달리한다 할지라도, 말씀을 맡은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는 교회가 직접 관여하여 당연히 모든 책임과 의무를 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교단에서 위원들을 임명하여 신학교와 교회들(교단) 간의 연락을 유지하고 직영한다. 그들의 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 말씀 사역자를 위한 훈련으로서 교육이 타당하고 적절한가를 평가한다. * 개혁주의 고백서들에서 일탈을 경계한다. * 개혁신학 교육에 있어서 약한 부분이 있는지를 평가한다. * 교수를 뽑을 때 앞으로 올 임명과 관련하여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교수단에게 제공한다. * 교수들에게 신학생과 관련한 바램과 고쳐야 할 사항을 알려주고 그들의 모든 행위를 고지한다. * 학교 설립 목적(개혁신학)에 동의하는 서식에 서명이 없이는 박사 학위를 주지 않는다.

개혁주의 교회는 말씀의 사역자들을 교회가 돌보고 교회가 훈련해야 하며 신학교를 직영해야 한다는 원리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해 왔고 고수해 왔다. 만일 교회가 설교자 훈련하는 것을 돌보지 않는다면 이 일을 행하는 권리와 의무를 누가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교회가 행해야 하는 권리를 개인 몇 사람에게 위임한 적이 없다.

우리가 개혁신학을 추구해 가려면 위에서 기술한 항목들을 기반으로 하는 것부터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자들을 모집할 때도 설립목적을 분명하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박사학위과정의 학문적 자질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교단 신학의 존립목적과 일치하게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대한 바른 이해를 검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수 임용 과정도 교단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되어져서는 안 된다. 어떤 분야에 있어서 교수가 필요할 때 그 사람에 대한 정확한 자료와 정보를 교단이 위임한 위원회에서 알아보고 평가한 후에 임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혁주의 신학에 투철하지 못한 사람이 총장이나 교수가 되었을 경우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누구를 불신하고 누구를 신뢰한다는 문제가 아니다. 단지 성경의 원리 문제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교회가 교회의 미래 사역자들을 훈련하는 일을 포기할 때 교회는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누구를 깎아 내리거나 무시하는 문제가 아니다. 누가 온전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소위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문제도 아니다. 단지 원리의 문제를 말한 것이다.

혹자는 교회들(교단)이 관여하여 부패한 교권이 틈탈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한 사람들은 신학교에 훈련을 맡겨서 그 학생들이 신학교를 졸업하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그들이 어떤 신학 사상을 배우든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재정적 지원만 잘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신학교 자체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인간적인 틈새가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으며 오히려 훨씬 더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며, 종된 우리는 주님의 통치 원리에 대한 투명성과 일관성을 지켜나가고 순종하면 그만이다.

 

2. 목사를 훈련하는데 있어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

 

신학 교육이 교회의 책임 있는 일이 되려면 현재의 관점에서 간단한 역사적 조망을 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 중세와 개혁시기

목사가 되기 위하여 훈련하는 신학 교육 방식이 종종 역사적 환경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면 529년 오렌지 공회(The Council of Orange)는 목사후보자들을 훈련하기 위해서 지역의 감독들과 장로들이 그들의 집들을 개방하였다. 성경을 집에서 가르치고 그들의 직분을 감당하도록 교육을 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신학 훈련이 지방정부와 함께 목사들에게 주어졌다. 그러한 신학교들이 이태리, 영국, 스페인의 여러 곳에 세워졌다.

후기 중세기간에는 대학들이 생겨남으로써 교육의 방식이 변화되었다. 점차적으로 대학들이 공적인 학교로 조직을 갖추고 시에 의해 통치되고 기금을 받았다. 학생들이 교수의 사례를 제공하는 것보다 시가 월급을 줌으로써 시의 고용인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교수들은 교회의 관할권 아래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관습 때문에 정부가 공적 종교를 결정하였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16세기에 일어났을 때 목사후보생에 대한 훈련이 재 설립되어야 했다.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에 세미너리를 설립해 줄 것을 주장했다. 당시에는 당회가 갖추어 지지 않은 상태였고 제네바 시의회 의원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래서 교회가 신학 훈련을 위한 학교를 갖는 것은 합당했다. 신학 교육은 개혁주의 신학에 투철한 신학교수들이 해야 한다.

돌트대회(1618-19)는 신학교수들이 대회(혹은 총회)에 출석하여 그들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관련된 평가(심사)원에게 그것들을 제출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16세기에 설립된 교회들은 주정부와 밀접하게 연결되었고, 그들의 후원아래 생활하였다. 당시 신학 교육이 역사적 정황상 정부기관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질 수 있으나 교회가 장차 목사들을 가르치는 자들을 관할하는 책임을 실행하였다.

 

2) 19세기 화란

1876년 화란의회는 신학부를 종교학부로 변경시키는 법을 채택했는데 계시로부터 경건을 강조하는 변화였다. 신학교수들은 교회가 하지 않고 대학에 의해 임명되었다. 주정부 교회가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는 교수를 임명하는 권리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신학의 많은 부분이 점차 자유적이고 학자적인 관점으로 가르쳐졌으며 교회의 삶을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1834년에 분리파는 목사를 훈련하는 신학교에 대하여 근본적인 재고를 하게 되었다. 교회들이 목사후보생을 훈련하는 세미너리를 설립해야 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 또 교회들이 가르칠 사람을 결정했고 이들을 통하여 신학적 훈련을 하도록 하였다.

대회(총회)에 의해 임명된 목사들이 목사들의 신학 훈련을 책임졌다. 그래서 분리파교회들은 장래 목사들에 대한 훈련을 위해서 교회 자체가 신학교를 유지해야 하며, 신학 교육에 있어서 신학적 훈련을 감독할 권위가 교회에 있다는 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확신은 결국 캄펜의 Hogeschool이라는 세미너리를 설립하게 하였다. Hogeschool뿐 아니라 자유대학의 신학교수들도 개혁교회들의 감독아래 서로 교회를 봉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산이 북미에도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19세기에 Grand Rapids에 있는 Calvin 신학 세미너리를 설립하게 한 것이다. 20세기에는 캐나다 개혁신학교를 설립하게 하였다.

 

3. 우리 교단의 신학교가 있어야 한다.

 

북미연합개혁교회의 교회질서 제3조의 일부를 인용해 보고자 한다. "당회들은 신학생들의 훈련에 대한 모든 점들을 감독하는 것을 맡아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 교육을 철저히 받도록 권하고 확약하는 것을 포함해서……."

우리 교단이 4년 전에 총회에서 결의한 것이 있다. 신학교에 교단이 일정한 수의 이사를 파송할 수 있도록 하자고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 명칭은 '합신이사조절위원회'이다. 그러나 그 후로 '합신이사조절위원회'가 이와 관련된 보고를 하지 않고 있다. 또한 많은 교회들은 '합신이사조절위원회'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회와 신학교와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에 분명하지 못하면 그 일을 맡아도 선뜻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신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어떻게 교수가 신학교에 임용되어 오게 되었는지, 또 신학교 교수들의 당면한 고민이 무엇인지, 목사로서 수업 과정에 있는 자들이 어떠한 훈련을 받으며 어떤 사상을 가진 누구에게서 사경회의 말씀을 듣는지 전혀 모른다.

필자가 알기로는 개혁주의 신학을 못마땅해 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사경회도 인도하고 직접 신학강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에 보면 개혁주의 교회의 참된 지표를 부인하거나 알파운동, 관상기도, 신사도운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신학교에 직접 관여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유신적 진화론을 교회에서 강의하고 가르치는 교수가 있다고 한다. 있을 수도 없고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충격적인 일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런 중요한 문제를 신학상의 문제가 아닌 목회방법론의 문제나 단지 학문상의 문제로 치부해 버린다.

왜 우리 교단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가? 교단이 마땅히 감당하여야 할 영역을 저버렸을 때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신학교 이사는 돈을 많이 내는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다. 교단에서 철저히 검증해서 장래 교회의 목사들을 위한 사람을 이사회에 파송해야 한다. 이 문제는 신학교 측과 절충할 일이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검증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서 신학교와 교단이 긴밀히 연대관계를 가져야 하고, 이사회에 필요한 자금은 교단에서 직접 운영하여 공급하면 된다.

우리는 신학교 교수들을 주 안에서 존경한다. 그러나 현 상태 이대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교단이 책임을 가지고 그들의 가르치는 것을 사랑으로 견제해야 한다. 이것을 교권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또 그들의 사례에 있어서도 어떤 교수는 풍요롭고, 어떤 교수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것을 개혁교회들은 온 교단 앞에 투명하게 밝힌다. 교회에서 목사의 사례비를 항목별로 상세하게 밝히는 것처럼 신학교 역시 투명성을 보여야 한다.

교수를 잘 예우해 주어야 하지만 교수 이전에 목사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요, 교회에 속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학교는 후원을 많이 받아 시설을 잘 갖추고 도서관, 종합관, 기념관을 크게 짓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아는 바이다.

교회는 주님이 주신 교회의 사명이 있다. 교회가 직접 해야 할 일이 있다. 절대 주권자 되시는 주 하나님은 교회에 고유한 주권을 주셨다. 교회에 주어진 것은 설교, 권징, 그리고 목사후보생 양성기관인 신학교 운영이다.

교회는 신학교에 협력만 해야 하는 영역이 아니고 직영, 감독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절대주권자가 부여하신 신령한 의무이다. 이것들은 국가의 영역도 아니고 일부 학자들의 영역도 아니다. 결코 어느 누구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교회의 영역이다.

 

나가는 말

 

일반 기독교 학교나 병원은 그 목적과 의도가 아무리 고상해도 주님께서 교회에게 맡기신 적이 없다. 그러나 학교 교육은 부모의 권리와 사명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직접 해야 할 일은 교회 안에서 성경 교리 교육과 이를 위한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 교육이다. 신학 교육은 교회의 존립과 확장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목사가 성경과 신앙고백들을 가르쳐야 하기에 교회는 신학교를 직영해야 한다. 신학교의 존립 목적은 충성된 복음의 증인들을 양성해서 교회에 공급하고 개혁주의 유산들을 후대에 전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교회의 법조문에 신학교 운영과 사명에 대한 조문을 가지고 있다. "교회들은 목사후보생의 훈련을 위해 기관(신학교)을 유지해야 한다."

교회가 직접 책임지는 것은 성경교리 교육과 신학 교육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교회가 직접 직영하는 기관은 신학교뿐이다. 이를 구별하지 못할 때 교회는 교회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기는커녕 오히려 결국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수욕을 받는 자리로 점차 나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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