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1-3. 아브라함처럼 | |
오성환 목사(이야기가 있는 교회, 세움성경신학연구원 원장) | |
1.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예정하신‘나’는 그리스도께서 값을 지불하심으로‘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값으로 산 (고린도전서6:19-20)’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인‘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즉‘의’를 위해 박해를 당할지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과 쎄상 사람들과 다른 삶의 바탕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의식, 즉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말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행동하기 위한 삶의 바탕이 ‘의’ 이기 때문이다. 삶의 바탕이 ‘의’이기 때문에 그 의를 목말라고고 굶주려하며 ‘의’를 위해서는 박해를 받아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당연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삶이 그 무엇보다도 값지고 소중한 삶인 것을 알기 때문이고,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소중한 가치를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안다.
즉,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참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지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다. 도구를 잘 사용함으로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의 영화로움을 포기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들과 고난받는 것을 즐거워 할 수 있었고, 믿음이라는 도구를 잘 이용한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를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독자를 바치려고 모리아산으로 갈 수 있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철저한 절망 속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며 절규할지라도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숨을 거두실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즉 의에 굶주리고 목마르며, 그 의를 위해 박해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고, 그 의를 위해 믿음을 갖고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2.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언제나 읽어도 신기하기만 한 이 본문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이야기한다.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은 ‘사라’인데, 그녀는 당시 우르 지역에서 유행했던 우상과 관련된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답게 여러 우상에 접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르 지역을 떠날 때 400여명의 추종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꽤나 큰 집단의 우두머리였고, 그를 따라 나선 400여명은 정말로 아브라함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런 기약이 없는 길에 동행해줄 사람들이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하여튼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임재하시고, 그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날 것을 요구하신다. 아주 구체적으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1절)’나라고 말하신 것이다. 반면에 아브라함이 가야할 곳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1절)’이고, 그 땅은 믿음으로 볼 수 있는 땅이다. 역사를 아는 우리들이 볼 때 약 800여년 뒤에 이루어질 약속을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이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 백여 년 후에 이루어질 약속을 믿고 삶의 터전을 떠나게 된다. 이 약속을 바탕으로 아브라함은 긴 여행길에 오른다. 때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아내의 말을 듣고 여종 하갈을 취해 아들을 낳아 기뻐하지만, 그 아들은 약속을 따라 난 아들이 아니었다. 나증에는 당시의 풍습을 따라 자기에게 있는 종이 하나님의 약속의 씨인가를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이 의지 한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었고, 그런 믿음을 우리는 ‘절대적인 믿음’이라고 하자.‘절대적인 믿음’은 아브라함처럼‘의’위해서라면 언제나 변함없고, ‘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믿음을 의미한다.
3.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본 사람이다. 물론 우리가 청세기를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삶이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음을 본다.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서 75세 까지 거류했고, 거기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죽는다(창세기11:31-32). 하란은 우르에서 멀리 떨어진 곳ㅇ기는 해도 우르의 문화권 안에 있었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데라가 죽을 때 까지 우르의 문화권에서 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때문에 데라가 죽으면서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아브라함을 움직이게 한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2-3절)’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고난을 스스로 감내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즉‘의’로 인해 굶주리고 목말라하며, ‘의’를 지키기 위해 박해까지도 즐거워하는 삶을 살 수 있다.
4.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삶에서 고백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 드러나는 삶의 바탕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임을 알게된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과 좀 다른 믿음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 좋고 유리한 것은 믿을 만 한데, 그렇지 않은 것들은 인간적인 면으로 접근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해하려는 ‘선택적인 믿음’의 행태가 그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시록3:15)’말씀하시는가 보다. | |
기사제공 : 크리스찬타임스
http://ctimes.or.kr/news/view.asp?idx=988&msection=2&ssection=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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