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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변혁: 신자의 책임인가?] - 이성호교수

이성호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5. 9. 1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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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변혁: 신자의 책임인가?]

- 다소 긴 글입니다. 지난 주 기독교보 한세공 시리즈에 기고한 글입니다. 처음으로 결혼 주례를 하면서 생각했던 것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
신자는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신자는 이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신자들을 “나그네”라고 부른다. (벧전 1: 17)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 문화와 묘한 긴장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문화의 기본적인 정의는 삶의 방식(way of life)이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과 살아가야만 하는 신자들은 그들과 최소한의 삶의 방식을 공유해야만 한다. 그러나 문화 역시 인간의 죄로 인해 오염되었기 때문에 불신자들의 모든 문화를 그대로 따라갈 수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고전적인 책에서 리차드 니버는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를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어떤 유형은 문화와 그리스도를 대립적으로 본다. 이런 유형을 따르는 사람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세상을 떠나서 자신들끼리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아간다. 주로 박해의 시절에 신자들은 이런 태도를 견지하였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조화로운 관계로 이해한다. 이들은 교회가 세상 문화를 받아들여 그것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로 기독교가 주도권을 행사했던 중세 시대에 신자들은 이런 생각을 많이 하였다.
니버에 따르면 개혁주의는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라는 입장을 취하였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자들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기를 원하였다. 세상의 문화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다.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 정치나 사회 혹은 문화 개혁에 헌신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잘못된 고지론
문화 변혁주의는 그 의도와 무관하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대표적인 것들 중에 하나가 소위 고지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기독교 신자들이 사회의 높은 자리(고지)를 많이 차지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고지를 많이 차지하게 되면 이 사회가 훨씬 더 나은 사회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장로 대통령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벌써 3명의 장로를 대통령으로 배출하였다. 과연 그들이 통치했던 시대가 소위 불신자들보다 더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재 국회의원 중 30%가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데 과연 그들을 통하여 정치 문화가 얼마나 달라졌는가?
문화변혁주의나 고지론의 잘못은 그것이 근거없는 낙관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많아지면 이 사회가 보다 기독교적으로 바뀐다는 것은 적어도 역사적으로 볼 때 증명되기 어렵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 한국교회의 선거문화가 국회의원 선거보다 더 기독교적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한 상황이다. 기독교 정신에 따라 설립된 사립학교들이 기독교적 학교 문화를 세워가는 것은 고사하고 정직하게라도 운영되는 곳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렇게 되면 문화 변혁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과연 문화를 변혁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인가? 사명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얼마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문화를 변혁시키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은 없는가? 물론 세상 문화를 변혁시켜서 보다 기독교적인 문화로 만드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성도들은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문화변혁 이론이 이제까지 얼마나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었는지를 냉철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반은총: 순진한 발상
문화변혁과 고지론을 뒷받침하는 이론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소위 일반은총(common grace)론이다. 이것을 주장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뛰어난 신학자이자 총리까지 역임한 아브라함 카이퍼이다. 그는 택한 백성을 향한 특정한 구원의 은혜 외에 구원과 무관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일반은혜 혹은 공통은혜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반은혜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제시된 가르침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네덜란드 개혁교회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스킬더나 훅스마 같은 인물들이 이 교리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은혜는 개혁교회 안에서 마치 성경적 진리인 것처럼 인식되었다.
이 짧은 글에서 일반은총에 대하여 자세하게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필자의 관심은 일반은총을 받아들인 결과 교회가 그 목적을 성취하였는가이다. 일반은총 옹호론자들의 기대와 달리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답을 할 수밖에 없다. 일반은총의 교리에 기반을 두어 교회는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처음에는 카이퍼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에 의하여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흐른 오늘날 교회가 세상 문화를 변혁시킨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 반대로 세상의 문화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세상이 교회를 변혁시키고 말았다.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자 교회는 세상과 너무나 비슷하게 되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을 너무 닮아가려고 한다. 교회 안에 카페도 생기도 문화 교실도 개설된다. 그런 문화 교실이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제공하는 문화교실에 비해서 내용적으로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내용은 차지하고서라도 “기독교적으로” 운영이 되고 있을까? 도대체 기독교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사실 대부분의 교회는 이런 질문에 대한 고민이나 해답 없이 그냥 전도에 도움이 되리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 안에 세상이 들어 온 결과 교회는 교회가 지녀야 할 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교회당 안에 사람들이 쉽게 들어 올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그것과 동시에 사람들이 쉽게 나가는 교회가 되어 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사람들은 교회당 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더 좋은 문화시설들이 교회 밖에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선교원이라고 할 수 있다. 재정적으로 국가가 어려웠을 때 선교원은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수많은 유치원생들이 교회가 개설한 선교원으로 몰려 들었다. 그러나 국가가 유치원을 지원하고 보다 좋은 유치원이나 어린이 집들이 등장하게 되자 교회가 운영하는 선교원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몰락은 선교원의 몰락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을 정도이다.
선교원의 예는 교회가 문화를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2-30 년 전만 해도 교회당은 청소년들에게 가장 재미있는 곳이었다. 남녀 학생들이 같이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가 교회당이었다. 심지어 교회당은 연애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교회는 학생들에게 세상 보다 더 많은 재미를 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영화, 컴퓨터, 모바일 등등의 첨단 기계와 문화들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현혹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대안이 없다면 교회의 장래는 매우 암울 할 수밖에 없다.
반립(antithesis): 세상의 빛과 소금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가 세상 보다 더 나은 혹은 더 수준 높은 문화를 제공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한 대형 교회는 수천 만원을 투자하여 개그콘서트에 등장하는 스타들을 초청하여 정기적으로 축제를 개최한다. 아침 일찍부터 수많은 청소년들이 입장권을 사기 위해서 교회 당 앞에서 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이와 정반대로 교회가 문화와 완전히 단절하고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대표적으로 대중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텔레비전 시청을 거부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교회에 전혀 무관심한 청소년들로 하여금 어쨌든 교회당으로 오게 한다는 점에서 장점이라고 할 수 있으나 여기에 지출되는 비용이 너무 많다는 것은 큰 단점이다. 초대형 교회 외에 이런 시도를 할 수 있는 교회는 거의 없다. 두 번째 방법은 자녀들을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자녀들에 대한 대중문화의 위력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과연 세상 문화를 변혁시키는 것이 신자들의 유일한 문화적 사명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것이 본질적 사명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가도 동시에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지금 현 상황을 진단해 보았을 때 교회는 거의 혹은 전혀 세상 문화를 변혁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전혀 실천하지 못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명령으로 보기 어렵다.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위대한 능력의 신자들은 수상까지 지낼 정도로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저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신자일 뿐이다. 이들에게 문화 변혁이라는 거대한 과제를 요구하는 것은 부담만 안겨 줄 뿐이다. 문화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요구가 비전이 되겠지만,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요구는 절망이 된다. 이 말은 문화변혁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감당해야 할 소명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다. 이것은 세상 문화에 대해서 신자가 어떤 자태를 가져야 할지를 잘 가르쳐 준다. 빛은 땅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소금도 물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땅을 환하게 비출 뿐이고, 물을 짜게 할 뿐이다. 즉 신자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존재들이 아니라 (물론 변화도 시킬 수 있겠지만) 세상이 가지고 있지 않는 빛과 맛을 가진 자들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나그네들이다. 따라서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 거룩이다.
이것을 문화에 적용시킨다면 그것은 반립(antithesis)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적대와는 다른 개념이다. 재세례파나 수도원 운동가들은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떠나서 살아가지만 반립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즉 하나의 구별된 모범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 방식은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의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화 변혁주의와는 크게 다르다. 물론 이 방식이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아주 강하게 준다면 문화 변혁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목적은 아니다.
반립의 구체적인 예: 결혼식
이제 구체적인 예를 통해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들을 생각해 보자. 결혼식은 삶의 방식으로서 문화의 한 형태이다. 결혼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신자와 불신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유교의 경우 부부의 관계를 인륜이라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천륜, 즉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으로 가르친다. 이렇게 결혼 자체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면 결혼의 형식, 즉 결혼식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과연 신자의 결혼식이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심”을 잘 드러내고 있는가? 신자의 결혼식과 불신자의 결혼식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결혼에 대한 이해가 사실상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결혼식이라는 문화가 바뀌기 위해서는 결혼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당연히 설교와 교육을 통해서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가르쳐질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특히 당회가 결의를 해서 올바른 결혼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 중심적인 결혼예식이 하나님 중심적인 혼인 언약식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통해서 신자들의 삶의 방식이 바뀌게 되면 자연스럽게 세상 문화와 분명한 차이를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문화가 바뀔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런 결혼식을 좋아하겠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조롱할 수도 있다. “결혼식이 왜 이렇게 재미가 없어?”라고 불평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결혼식은 세상 문화에 대한 반립으로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상 문화를 바꾸는 것은 신자의 본질적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는 자신의 능력이나 힘으로 세상의 문화를 바꾸는 자가 아니라 (물론 악한 문화에 대해서는 싸워야 하겠지만) 말씀에 근거한 반립의 생활을 실천함으로 세상 속에서 교회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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