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하게 빛나는 신비
저자: 타드 빌링스 (J. Todd Billings, 웨스턴 신학대학원 교수)
번역: 박재은 목사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시편 102편의 기도는 곧 나의 기도였다.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시 102:23). 나는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시 102:24). 아내와 함께 결혼 10주년을 기념하던 날이었다. 이제 막 한 살과 세 살 먹은 아이들의 부모로 산다는 것이 마냥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러나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치명적인 암 진단이었다.
시편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슬픔의 어조는 곧 나의 것이 되었다. 모든 슬픔의 감정과 진한 분노가 하나님 앞에서 펼쳐졌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 13:1). 암 덩어리가 내 몸 속 깊숙이 퍼지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시편 기자의 슬픈 외침에 주목하게 되었다.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시 102:3).
내가 암에 걸렸을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과연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 중의 일부인가? 개혁교회 목사와 교수로서 나는 본능적으로 이 안 좋은 상황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성경과 개혁주의 신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교회와 학교에 암 진단 사실을 알렸을 때 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첫 장을 인용했다. “사나 죽으나 당신의 단 하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이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죽음의 문턱에 있는 나에게 참된 관점을 제공해주었다. 우리 자신은 실로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도 결국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 앞에서 우리는 한 가지 소중한 약속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와 연합하시는 그 하나님께 우리가 속해 있다는 사실이고 바로 그 분 안에서만 우리의 삶이 발견된다는 장엄한 진리, 바로 그 사실이다.
질문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첫 장의 말씀은 암 진단을 받은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선사해주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나를 항상 지켜주십니다.” 나는 줄기 세포 이식을 준비하기 위해 항암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항암 치료는 정말 고역이었다. 아마도 항암 치료를 계속하다가는 내 모든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묵상했다. 하나 둘씩 빠져가는 내 머리카락들은 과연 무엇인가? 내 머리에서 하나 둘씩 떨어지는 이 머리카락들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과연 내가 암에 걸린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이 암으로 인해 내 아이들을 아버지 없는 아이들로 만들고 내 사랑스러운 아내가 과부가 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아내와 나는 수년간 임신을 위해 기도했고 드디어 귀한 선물이 우리 가정에 도착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은 이러한 귀한 선물을 나에게서 빼앗으시려고 하는가?
시편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고통으로 가득 찬 질문을 던지는 자가 나 혼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시편의 대부분은 탄식의 어조로 작성 되어 있다. 탄식을 내뱉는 시편 기자 속에서 우리는 분노, 절망, 혼란스러움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읽을 수 있다. 시편 기자는 감히 하나님께 도전적으로 질문한다.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시 88:13-15).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인식한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이름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시편기자에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은 왕이시고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문제가 닥쳐 올 때 과연 이것이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불분명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호소한다. “어찌하여 내 영혼을 버리셨나이까?”
도대체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아마도 내가 지었던 죄 때문에 나는 암에 걸렸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중의 일부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것”에만 능숙한 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시편을 계속 묵상하면서 탄식시의 대부분은 닥쳐오는 재앙의 직접적인 원인을 죄로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탄식시 저자는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묵상하게 되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닥쳐오는 재앙을 처리할 능력이 없는 분이라면 굳이 그 분에게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셨나이까?”라면서 한탄할 필요가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 삶을 주관하실 능력이 없으시다면 하나님을 “나의 생을 짧게 만드신 분” 혹은 “나의 강함을 약하게 하신 분”이라고 비난할 필요도 없다. 혹 어떤 사람들은 닥쳐오는 모든 재앙이 다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나님 주권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개혁주의 요리문답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결국 모든 재앙들이 “신에 의해서 주관되고 있다”라는 명제를 강조하는 스토아 학파적 운명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시편기자는 비록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왕이라고 선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스토아적 운명주의로 발전시키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왕 되심에 대한 신뢰와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이 내 삶에서 드러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탄식하며 한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왕이시다. 시편기자는 탄식 가운데서 하나님의 왕 되심이 증명되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 되심이 드러나고 모든 재앙이 물러날 때 드디어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의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시 96:13). 왕의 왕 되신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자들로서 우리는 여전히 기다려야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에 위치해있다. 그러므로 “이 어두운 세상” (엡 6:12)에서 여전히 하나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옵고”라며 기도하셨다. 즉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는 것이며,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이다 (롬 8:22, 26).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늘을 향해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계 22:20) 라고 외칠 수 있는 이유다.
나아갈 길
과연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하이델베르크의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이 대답을 성경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또한 벨직 신앙고백서를 깊이 묵상하면서 찾아보았다. 암 진단을 받고 나는 마태복음 10:29-31절을 깊게 묵상하기 시작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나는 마태복음 10:29-31절에 대한 묵상을 기록해두었다. 아래가 바로 그 묵상이다.
“마태복음 10:29-31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기독교인들이 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말씀은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서 어떤 재앙이나 고통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통해 가르치시고자 한 메시지는 바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마지막에 이기실 것이기 때문이다. 참새 한 마리도 혹은 머리카락 하나도 아버지의 뜻 없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적 돌보심이 얼마나 우리를 안심시키시고 신비적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은 나를 어려운 항암 치료 가운데 두시길 ‘뜻하셨는가?’ 과연 아버지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암이란 병에 고통 받기를 ‘동의’하셨는가? 아니면 단순히 하나님은 세상이 이렇게 병들어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만 계시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벨직 신앙고백서에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벨직 신앙고백서 13장은 하나님의 적극적 의지와 하나님의 허용적 의지를 구분한다. 예를 들어 전자는 세상 창조에 대한 의지이며, 후자는 세상 속에 들어온 죄에 대한 의지다. 이러한 구분이 모든 신비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암에 대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시각은 제공해줄 수 있다. 암이나 병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지는 아니다. 그러나 죄로 가득 찬 이 세상 속에서 여전히 암이나 병은 하나님의 손 안에 달려 있고, 여전히 하나님의 ”허용적 의지“에 위치한다. 하나님은 최종적 선을 위해 암과 같은 악을 사용하실 수도 있으신 분이다.”
벨직 신앙고백서는 재앙이란 존재는 하나님의 손에서 살짝 어긋나 실수로 생겨버린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 우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동시에 벨직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은 악이나 죄의 저자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이 교의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데 그 까닭은 어떠한 일도 우리에게 우연히 닥치지 않고 오직 가장 은혜로운 하늘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생기는 것임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배려로서 우리를 염려하여 주시고 자기에게 속하는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시며 우리의 머리털 한 가닥도 (왜냐하면 그 털들을 모두 다 셀 수 있기 때문에), 또 참새 한 마리도 우리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질 수 없다” (13장).
벨직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결국 신비에 남겨둔다. 그러나 이 섭리는 선명하게 빛나는 신비이다. 이 신비는 비록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말씀에 근거한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확신을 우리에게 굳건히 심어준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과 선은 너무도 위대하고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이며 악마와 악인들이 비록 불의하게 행할 때일지라도 그는 가장 탁월하고 정의로운 모양으로 자기 일을 정리하시고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벨직 신앙고백서 13장). 벨직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말씀과 약속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가르친다. 이 드러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취되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되었고 드디어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에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왜 하나님은 이 재앙들과 고난들을 나에게 주셨는가 혹은 왜 암이나 병을 주셨는가에 대해서 깊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믿음은 탄식 가운데서도 감사가 피어나는 감사이고 간구 가운데서 기쁨이 타오르는 믿음이다.
재앙이 우리에게 닥칠 때 여전히 주권자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일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각종 고뇌와 상상에 빠져서 허우적댈 것이 아니라 시편기자가 했던 것처럼 기도로서 그 고난에 동참하여 그 어려움이 소망적 탄식이 되길 위해 성령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간구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라는 본연의 의미를 잃어버린 세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완전한 통치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드러나는 그 날을 위해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함이 구체화되기 전까지 우리는 소망과 탄식을 동시에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고통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욥의 친구들처럼 하나님을 마음대로 재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로 이 고통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야” 혹은 “하나님은 너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셔. 그러므로 너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라는 식의 욥 친구들이 가르침은 옳지 않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과 고통은 우리에게 찾아온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가 무엇을 믿고 신뢰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약속이다. 이 약속은 우리에 의해 세워진 약속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신의 약속과 일하심에 근거한 약속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근거한 약속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실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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