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를 대접하는 정신!]
by 박동근
베드로전서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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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대접의 대상들은 나그네들과 여행자들에 대한 것으로 그들에 대한 너그럽고 친절한 환대를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대접받는 대상들은 그리스도인들 자신들이다(매튜 헨리). 그리스도인들 중에 특별히 어려움에 처한 형제와 자매들 그리고 낮은 곳에 처한 형제와 자매들에 대해 우리는 더욱 대접하려 애써야 한다.
초대교회에 대접이 강조되는 이유가 있다. 여기서 대접은 단지 오늘날 서로 교제하며 식사나 선물을 주고받는 평상정인 대접이 아니라, 박해와 고난이 끊이지 않는 교회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일어난 대접들을 의미한다.
필록세노스(filovxeno")란 낯선 사람을 사랑하는 이란 뜻을 가진다. 필록세노스는 두 단어의 합성인데, 필로스(fivlo", 가장 사랑하는, 친절한)와 크세노스(xevno", 외국의, 외국인, 손님)에서 유래했으며, '낯선 사람(손님)을 사랑하는, 환대하는'을 의미한다.
초대교회 당시 박해자들은 여러 모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리고 고문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불구로 만들기도 하였고,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안전을 위해 먼 나라로 떠났고 이 땅에서 실제로 나그네 생활을 해야만 했다.
히브리서 11:35-38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리하며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는지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실제로 흩어져 거지가 되고 나그네가 되었던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이들을 맞이해주고,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굶어 죽거나 이방 나라에서 유린당했을 확률이 높다. 당시 시대는 인권도 없는 시대요 그리스도인들은 늘 어디를 가나 오해를 받고, 생계를 위해 일할 기회도 주어지기 힘든 시대였음을 생각할 때,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이 얼마나 절실했던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도 난민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처량한 일인가? 몇 달 전 우리는 시리아 난민이 바다에서 배가 전복되어 바다에 수장된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고, 지금도 난민들이 여러 현실적 이유로 타국에 받아들여지지 않아 배회하고 보트 피플이 되어 유랑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초대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 피난민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했을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마찬가지 였다. 로마 카톨릭을 피해 고국을 떠나 객이 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스위스로 피신한 일례가 많다. 그곳엔 종교개혁 때문에 피난 온 많은 난민들로 넘쳤다. 스스로 난민이었던 칼빈은 그들을 극진이 대접했다. 그래서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때, 성경의 진리와 개혁신앙을 배워 고국에 돌아가 개혁주의 교회들을 세웠고, 종교개혁은 스위스에서 독일, 네델란드, 영국으로 퍼져가게 되었고, 후에 신대륙에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손 대접이란 것은 이렇게 처절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한 신앙고백을 가졌다는 이유로 베풀어진 환대였다. 특히 제네바는 그들을 먹이고 잠자리를 제공해 주고 교육을 제공했다.
그러므로 사도는 서로 잘 알고 못 알고를 떠나, 어떤 세상적인 관계의 끈이 아닌, 한 신앙고백과 믿음 안에 보편교회에 속한 한 몸이라는 의식만으로 위기에 처한 형제와 자매들에게 도움을 제공할 것을 명령하고 계신다. 우리는 지난 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54문에서 교회는 한 하나님, 한 주, 한 성령 안에 참된 신앙고백 안에서 온 지상에 하나의 교회가 존재한다고 말씀드린바 있다.
교회 안에서 혹은 흩어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교제는 그리스도와 참된 교리 안에 신앙고백으로 족하다. 그것만으로 우리는 성령의 교통하심 안에 교제가 가능하다. 그리고 평상시 친하고 친하지 않고를 떠나 교회라는 이유로 음지에서 신음하는 형제 자매들을 향한 관심이 필요한 것 같다.
한국교회도 양극화가 심하다. 음지에서 신음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도 많이 있다. 심지어 한 교회 안에서도 사선을 넘는 고통 속에 신음하는 자들이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절박한 도움의 상황을 가까이서 무관심하게 놓칠 때도 많다.
대접이란 순수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편 교회 안에 한 몸 의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대접은 나에게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존재하던 어떤 나그네와 객들을 신앙적 이유로 대가없이 돕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으로 개 교회는 물론 보편교회는 보이지 않는 손길의 대접 속에 살아남았던 것이다. 초대교회 때 그러했고, 종교개혁 때 그러했다.
대접이란 추상적인 관념적 사랑이 아니라 실제적인 경비나 수고에 대한 불평이나 원망 없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친절하고 너그럽게 위기에 처한, 혹은 고독한 나그네와 같은 형제, 자매들을 환대(매튜 헨리)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던 아브라함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아브라함 시대에 나그네들에게는 돈이 있을지라도 먹고, 자고, 안전을 보장받을 장소와 기회가 빈약했다. 나그네를 돕는 것은 나그네들에게는 몹시 대단히 필요하고 절실한 필요들이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1-2).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3-14).
우리의 그리스도 안에 사랑이 신앙의 동기 아래서 낯설고 나그네된 자들에게까지 미치길 기도해 본다. 그러므로 보편교회에 대한 신학적 고백만이 아니라 이 고백이 실제적 사역 속에 인정되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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