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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에서 온 신자들에게 과연 재세례를 베풀어야 하는가?-고재수 교수

고재수선교사

by 김경호 진실 2016. 1. 24.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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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총회에서는 다수의 견해로 천주교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하고 만약 천주교에서 장로교회(합동)로 입교를 하는 자는 반드시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 과연 개혁교회의 성경적, 교회사적, 교의학적 바른 견해는 무엇인지를 화란개혁의 선교지에서의 실예를 들어 우리의 빛을 삼아 보고자 한다.


(개혁주의 교회ꊵ- 선교지에서의 재세례 문제)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로 화란 개혁교회도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임무가 있다. 때문에 화란 개혁교회는 이 선교활동을 여러 방식으로 실행한다. 다음의 간단한 예는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란 개혁교회의 선교사들은 여러 나라에서 사역한다. 대부분은 세계 각지에서 선교하고 있는데 남미 브라질과 구라사오섬에서 남아에서, 아시아의 보르네오와 뉴기니에까지 파송되어 있다.
그런데 화란과 가까운 벨지움에서 활동하는 한 선교사는 천주교 교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본국 화란에도 우리는 한 사람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데 그는 화란 로텔담이란 도시에 있는 이슬람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 있는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파송된 사람도 있다. 그들 선교사는 모두 약 30명 정도이다. 화란 개혁교회의 목사의 숫자가 약 240명이니 전체 목사 숫자의 10% 이사이 선교사임을 알 수 있다.
화란 개혁교회는 또한 선교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보내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그들은 그곳 미개발지에서 첫째 교육을 시키는 교육자이며, 병원이 없는 마을에서는 병자들을 치료하는 간호원이다. 또한 그들은 영농기술 보급과 그 지역의 언어를 개발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모두 12명 이상쯤 된다. 우리 화란의 개혁교회는 그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하여 재정을 지원하고 기도하는 일에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재세례 문제
선교지에 있는 선교사들은 화란에 있는 목회자들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목회 해야 한다. 그들은 네델란드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문제들에 대처해야 되며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때문에 3년마다 열리는 선교사 대회는 그 같은 문제들을 토론하고 해결해주는 장이 되고 있다. 만일, 거기서 해결을 찾지 못하면 본국 신학교에 선교사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
한 예롤 브라질에서의 선교사들은 브라질의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은 사람에게 부딪혔다. 화란에서는 다른 교회에서 개혁교회로 옮기는 사람은 재세례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문제를 놓고 브라질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 논의를 거듭했고 결국 선교사 대회에서 이 문제는 토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교사중 하나는, 브라질의 상황에서도 화란 개혁교회의 규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어떤 이는 브라질의 상황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재세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한때 캄펜(Kampen)신학교에서 교의학을 가르쳤던 캄프하이(Kamphouis)교수는 이 문제에 관한 글을 썼다. 그는 선교사들의 견해를 논평하면서 교회사와 교의학에 대한 그의 지식에 근거해서 그 문제에 대답했다. 그러므로, 이 주제는 동시에 지난 호에 제시된 폴레믹스에 관한 좋은 보기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물론 화란교회의 토론이지만 한국교회에도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다른 교회에서 고신 교회로 옮기는 자는 재세례를 받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사실 이 같은 세례에서도 불확실함은 남아 있는 것 같다. 참고. 월간고신 1987. 4월호 p.50). 그러나 필자가 들은 바에 의하면 필리핀에서 선교사역에 수고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선교사들이 재세례를 인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브라질에 있는 화란교회의 선교사들과 같이 천주교 교인 시민들에게 복음을 전달해야 하는 형편에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도 이 화란교회에서 일어난 논쟁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역사
이러한 논쟁점이 생길 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오늘날의 우리가 이 문제를 처음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재세례문제는 교회사에서 해묵은 논쟁이었다.
예를 들어 4C말의 어거스틴(Augustin)은 이미 이 문제를 경험하였다. 그 당시 도나티스트(Donatist)라 불리는 사람들은 ‘세례의 정당성이 세례를 베푸는 자의 거룩성에 달려있다’고 했다. 예를 들면, 세례를 베푸는 자가 핍박 가운데에서 받음을 거부하거나 참된 신자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 그 사람이 세례는 모두 헛것이라면서 그 사람이 세례를 베푼 사람들은 모두 다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들을 반대하여 세례의 정당성이 인간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자라고 어거스틴은 말했다.
후에, 종교개혁시대에도 이 문제는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개혁자들과 함께 천주교를 반대하는 재세례파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천주교 그 자체뿐만 아니라 천주교에서 베푼 세례도 거부하였다. 그들이 내놓은 이유는 두 가지 인데 하나는, 그 세례가 거룩한 사람이 베푼 것이 아니라는 것과 또 하나는 그 세례가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은 재세례파 사람들의 이런 입장을 반대했다. 그때 칼빈은 편지를 예로 사용했다.
편지는 그 편지를 전달한 사람 때문에 아니라 그 편지를 쓰고 사인한 사람 때문에 인정을 받는다. 이처럼 세례는 비록 천주교에서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자들이 그것을 베풀지라도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참고: 기독교강요IV.15,16-18)
나중에 화란의 개혁교회도 자주 이 문제에 대해 대답해야 했다. ‘천주교에서나 재세례파에서 세례를 받은 자가 개혁교회에 들어가게 될 때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 말이다.
개혁교회는 재세례파 문제에 주의 깊게 접근하여 결정을 내렸다. 즉, 다음의 3가지 규칙에 의해 세례가 베풀어졌다면 재세례를 할 수 없다고 결정할 것이다.
첫째, 말씀에 대한 규칙인데, 세례는 3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어져야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물에 대한 규칙인데, 세례는 물로 주어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권위에 대한 문제인데, 베푼 자는 자기의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 권위가 인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할 때에 재세례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브라질에서의 문제
브라질에 있는 몇몇 선교사들은 이 오래된 대답이 브라질의 상황에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는데 여기서 3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반대는, 역사적인 것이다. 아마 16C의 사람들이 천주교에서 좋은 점을 발견했을지도 모르겠지만 20C의 브라질에 있는 천주교는 너무나 타락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이 타락된 교회의 세례를 더 이상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의 반대도 교회적인 것이다. 우리는 천주교의 교리를 인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천주교회를 참된 교회로 인정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천주교회에서 베푼 세례를 인정할 수 있는가?’는 것이다.
셋째의 반대는 실제적인 것이다. 세례를 다시 받지 않는다면 천주교에서 개혁교회로 옮긴 사람은 자신이 계속 천주교와 관련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완전히 천주교와 분리시키기 위해 재세례를 베풀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논증에 대한 평가에서 캠프하이스 교수는 먼저, 앞에서의 역사적인 반대가 맞지 않다고 말한다. 15C와 16C의 천주교회는 오늘날만큼이나 이단과 죄가 가득한 것이었다.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은 그것을 알고 천주교회는 불 신앙과 우상숭배가 있다고 했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주교에서 주어진 세례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앞의 교의적인 반대에 대해서는 캠프하이스 교수도 천주교회가 참 교회로 인정되지는 못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세례를 인정하는 이유는 천주교를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캄프하이스 교수는 이 토론에서 칼빈과 같은 성경적 요소를 지적한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이 불결하고 신앙을 버린 제자들로 인해 할례를 받은 것이 그들에게는 불필요한 것이 되지는 않았고 그들은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도 없다고 했다.
이것은 10지파에게서 일어난 것이다. 그때 단과 베델에선 하나님을 송아지 형상으로 경배했다. 이 잘못된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은 할례를 행했지만 하나님께선 한번도 10지파들이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또한, 2지파 가운데에도 타락한 제사장이 많았지만 요시아와 히스기야 왕이 개혁운동을 시작할 때, 그들은 새할례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처럼 재세례도 필요치 않다.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가 다른 교회의 세례 베푸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캄프하이스에 의하면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데에 있다. 성례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또한, 천주교와 같은 교회들이 성례의 의미를 바꾸어 잘못 사용해도 하나님의 임재를 없애 버리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 성례를 제정하신 하나님께선 성례에서 공존하신 자신의 말씀을 지키신다.
캄프하이스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했다. 이 세상에는 정부와 행정장관들이 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정부사람들이 잘못한다면 우리가 더 이상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재세례파의 견해이다. 하지만 종교 개혁자들은 정부의 직분을 항상 옹호했고 정부사람들이 자기의 권리를 잘못 사용할 때도 그들을 인정했다.
또, 그것이 성경적인 생각이라는 사실은 벧전 2:13-18에 잘 나타난다. 즉, 정부 사람들이 잘못 행해도 하나님은 그들의 직분에 임재하신다고 캄프하이스 교수는 주장한다.
아마 이보다 더 분명한 예를 하나 제시해 볼 수 있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임무는 사도들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에 맡겨졌다. 교리를 바꾸는 천주교와 같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는 권리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 교회도 여러 잘못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고, 그 교회 안에는 그 말씀을 믿는 자들도 있다. 그때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에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례에 있어서는, 세례를 베푸는 말씀에 없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선 세례 말씀에 담고 있는 약속을 지키신다. 따라서 재세례는 베풀어지지 못한다.
앞에서 어떤 선교사가, 재세례를 받지 않으면 그 사람이 천주교와 관련된 것을 느낀다고 할 때 캄프하이스 교수는 그 같은 느낌은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세례의 정당성이 베푸는 자의 거룩함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세례의 내용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그래서 그 선교사는 재세례를 베풀어선 안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그 말씀이 약속이나 위협이 될 수도 있다)의 신실하심을 가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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