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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이란 무엇인가/박동근목사

천국

by 김경호 진실 2016. 3. 25.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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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58 문답
~ 우르시누스 해설집 참조~

[ 영생이란 무엇인가?]

by 박동근

1. 영생은 유추적으로만 인식할 만큼 이 땅의 생명과 기쁨을 초월하는 복락이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우리가 얻게 될 영생의 복락은 이 땅에서의 감각을 가지고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유비로서 영생이 무엇인지 희미한 생각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즉, 영생은 유추적으로 희미하게 알 정도로는 성경을 통해 계시되어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희미하게 인식하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이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이라 할 때, 우리는 생명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생명은 살아있는 존재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있어 살아있다는 것은 인간의 육체에 영혼이 부여되거나 영혼을 지닌 존재가 될 때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루이스 벌코프는 영혼을 생명의 원리라고 가르칩니다. 육체는 영혼과 결합될 때 생명을 지니고 영혼이 분리되면 죽습니다. 인간을 산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은 영혼입니다. 영혼은 생명의 필수적인 형태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지닌 존재는 활동합니다. 그러므로 존재나 활동 자체를 생명이라고도 합니다.

자연의 생명은 살아 있는 육체 속에 있는 영혼의 존재 혹은 내주요 또한 살아 있는 존재의 활동입니다. 생명은 특히 정신적 활동을 합니다.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무엇인가를 바라고 의지하는 것은 영혼에 속한 일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적 활동과 함께 육체는 가시적인 활동을 하는데 이것이 생명이고 생명활동인 것입니다. 산 존재는 생명을 지닌 것에 혹은 그 존재 자체에 합당한 일들을 수행합니다. 이러한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존재와 활동들은 영혼과 육체의 연합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은 이처럼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생명에 합당한 활동을 하는 생명과 그 활동이 영원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구원받은 성도의 생명은 영원성을 부여받게 되는데, 그 영원성은 하나님의 그것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다는 의미는 시작도 끝도 없다는 의미이며 그 영원성이 하나님 자신 안에 근거하지만, 성도의 생명에 주어진 영원성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으로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영원히 산다는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먼저, 영혼과 육체가 영원한 축복과 천국에 것들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연합될 것입니다. 즉, 성도는 마지막 때 완전한 생명을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 영화된 영혼과 영화된 육체가 완전한 사람으로 성도는 부활할 것입니다.
둘째, 단지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것이 아니라, 또는 사망과 심판을 위해 영혼과 육체가 결합될 것이 아니라, 복된 존재와 생명에 합당한 일들을 수행하도록 선하고 복된 자질로 변화되는 육체와 영혼의 결합을 가질 것입니다. 이 일은 이 지상에서 중생할 때, 발생하고, 이 중생은 자라 영화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타락 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영혼의 올바름과 선한 자질을 회복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서 심판 속에서 하나니의 진노 속에서 저주 속에서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존재와 생명에 합당한 일을 수행하는 상태가 될 때 이를 복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사는 성도의 천국 생활 속에는 거룩이 넘치고, 의가 넘치고, 참된 지식이 넘치고,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생명이 활동합니다. 성도들이 죽기 전에 종말을 맞지 않는 한 한 번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지만, 이 죽음은 영생의 세계로 통하는 문일 뿐입니다. 머지않아 잠시 육과 분리된 영혼은 영화된 몸과 결합하여 지극히 선하고 지극히 거룩하고 의로운 상태를 영원히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한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와 다른 차원으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다른 완전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중생할 때, 우리는 이 사랑과 거룩한 생활을 제한적이고 미약하고 희미하게 알고 경험하지만,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씨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생을 이미 조금 경험하고 그 나라로 옮겨집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단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자들의 절망스러운 신음 소리 통곡 소리들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어떤 이들은 그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저주스러워 자신의 난 날을 저주하고 한탄합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울부짖습니다. 존재와 생명에 합당한 일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태는 살아 있으나 죽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영혼의 올바름을 잃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어 있는 순간도 사망을 경험하는 순간들일 뿐입니다. 사망은 존재는 있으나 그 존재 안에 전혀 존재와 생명에 합당한 것들이 수행될 수 없는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거룩도, 의도 참된 지식도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이런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영혼이 타락하여 오염된 인간은 결코 하나님과 연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 자체요 근원이십니다. 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영혼도 육체도 사망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서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 아래서, 전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목적과 상태에 적합하지 않은 일들을 수행하는 뒤틀리고 파괴된 영혼은 하나님과 원수를 맺고, 거룩과 의와 참된 지식이 전적으로 상실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께 속한 사랑과 기쁨을 전혀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때, 이들은 지옥의 문을 통과하여 다시 육체가 결합되어 영육 간에 영원한 형벌의 고통을 누리기 전까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은 정신으로서 무서운 고통으로 신음하게 될 것입니다.

살아있으나 불신자는 죽어 있는 것입니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고통 속에 그 영혼이 사로잡히게 됩니다.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는 순간 그들은 비로소 영생이 아닌 영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이 생명이라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심판의 부활로 부활하는 순간, 그들은 영원한 형벌과 하나님과의 단절을 영육으로 경험해야 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생은 단지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를 더 함축해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께 연합된 자만이 영생을 누립니다. 믿음으로 중생하고, 믿음에 의해 하나님께 용서받고 자녀로 받아들여진 자들에게만 영생이 주어집니다. 그들의 영혼과 육체는 이 땅에서 거룩과 의와 참된 지식으로 회복되고, 죽음의 관문을 통해 영혼이 먼저 영화된 후, 곧 그의 육체가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만 영생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 영생이 주어집니다.

둘째는, 우리의 영생은 단지 존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그분의 행하신 일에 대한 참된 지식 안에 있으며, 하나님 안에 완전한 의와 기쁨, 즐거움, 우리의 영화롭게 된 육체에서 비추어질 영광들, 영화된 육체와 영혼에 주어질 완전한 복락 안에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일들에 토대하고 있으며, 그의 속죄의 완전한 것들을 우리 속에 실재로 이루시는 성령을 영원히 우리 안에 보내주신 일 안에 가능해 집니다. 바로 성령은 우리에게 영생을 실재로 경험케 하시는 주체이십니다. 우리의 영생을 위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일깨우셔서 믿음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죄인을 연합시키십니다. 성령의 이러한 역사가 우리 안에 거룩과 의와 참된 지식을 부여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이 일이 시작되고 완성되게 하시고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생과 반대로 사망 속에 있는 사람들은 지상에서의 삶에 있어서도 내세의 삶에 있어서도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상 삶에 있어, 심판의 부활에 있어 그들이 살아있으나 혹은 존재하나 생명은 누리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하나님 밖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연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도 없습니다.
그들은 기쁨과 희락이 아니라 영원한 말할 수 없는 고통 안에만 있습니다(마 24:51).
그들 안에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시는 거룩과 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으나 그 존재로 사망을 경험할 뿐입니다. 생명이 없는 존재, 합당한 것을 경험하고 수행하는 존재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영원한 생명 안에서 그 존재와 합당한 복된 일들을 수행하며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영생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의 영광을 드러내시려 인간에게 주십니다.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자신 안에 생명의 근원을 두려 합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비극이며 어리석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돈으로 산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로 산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으로 산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떡으로만 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나라의 황제 진시 왕은 자신이 가진 권력과 재력과 인력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불노초를 찾아 헤매었지만,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실로 오직 영생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부여받은 생명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 안에 생명의 근거를 가지신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오직 생명의 근원에게 연합해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만 살 수 있듯이, 사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롬 6:23).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일종의 세 위격의 사역에 있어 질서 있게 역사하십니다. 이것을 경륜적 삼위일체, 경세적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즉,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영생을 베푸시고, 성자는 성령을 통하여 영생을 베푸시며, 성령은 자기 자신을 통하여 영생을 베푸십니다. 엄밀히 이야기 하면,

생명의 근원으로서 성부께서 생명을 베풀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성부께서는 성자의 구속 성취를 토대로, 그분의 공로 때문에 생명을 베푸십니다. 즉, 성부께서는 성자의 공로를 때문에 생명을 베푸십니다. 성자는 승귀하여 성령을 한량없이 받아 성령을 통해 그 백성들과 연합하시고, 성령을 통해 영생을 베푸십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성부께서는 성자의 구속을 택자들의 마음속에 적용하시는 성령을 통해 생명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통해 영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영생을 주심으로 자신이 생명의 근원임을 알게 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처럼 영원한 생명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므로, 오직 인생이 생명을 바라면 하나님 안에 거하여 하며, 하나님을 마음과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상실한 채 인생은 생명을 생각할 수 없고, 오직 비참과 사망의 그늘만 드리워질 뿐입니다. 하나님께 무관심하고, 하나님을 증오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인생에게 생명의 근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영생을 바란다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 안에 돌아가 그 안에 거해야 합니다.

3. 영생은 완전하지 않지만, 열매를 맺는 믿음을 가진 택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영생은 인간의 노력과 생명에 대한 열의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십니다. 영생에 대한 지식과 열의는 인간에게서 발산된다기보다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전에 소나무를 뽑는 열심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소나무가 아니라 느티나무를 뽑아내도 나무를 뽑는 열심히 영생을 이루지 못합니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요 10:28).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요 17:9).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존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요 17:12; 마 25:34; 요 6:44; 롬 11:7).

그러나 선택하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회개를 주시니 영생은 믿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작정하실 때, 그 목적이 성취되는 수단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택자들을 구원하실 목적을 두셨는데, 이 목적을 성취함에 믿음과 회개라는 수단도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주 어려서 죽은 성도의 자녀를 제외하고는, 택한 자들로서 믿음과 회개를 나타내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택함 받았기에 하나님 앞에 믿음과 회개를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믿음과 회개로 죄인이 하나님께 방향을 돌리는 은혜를 회심이라고 합니다. 회심은 죄와 사망에서 하나님과 거룩함 가운데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회심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넘어오는 첫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신에서 믿음으로 돌아서는 첫 돌이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심은 택자들에게만 고유한 것입니다.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롬 11:7).

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의지를 따라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영생을 주시고 영광을 받으시고자 영생을 베푸십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택한 자에게 주십니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긍휼과 사랑으로 인해 주어집니다. 그러나 단지 긍휼과 사랑 때문에 죄인에게 영생을 베푸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성품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 값을 치러야 죄인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이유로 중보자가 되셔서 인간을 대신해 형벌과 순종의 의를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예수님의 속죄의 공로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랑과 공의를 중보자 예수님 안에서 성취하시어 인생에게 영생을 주시고, 이 영생을 받고 경험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과 공의를 인해 찬양받으시길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주시는 목적은 인간의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복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영생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회심 이전에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아 죽어 마땅한 자일뿐이었습니다. 회심 이후에 우리의 행위들은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행위들이 영생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받을 때 인간에게 나타나는 믿음과 회개는 영생의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을 성취하시는 수단으로서 의미를 갖기에 공로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로지 영생에 대해 자랑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만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표현으로서 거룩과 선행에 힘써야 합니다.

5. 영생은 이미 주어졌고 미래에 완성될 것입니다.

영생은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러나 미래에 이 영생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생에서 영생을 시작한 자들에게만 내세에 영생의 완성이 경험됩니다. 이생에서 시작된 영생은 먼저 육체와 분리되는 죽음을 통해 영혼이 먼저 하늘로 올려져 영화되고, 부활의 때 육체와 결합해 완전한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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