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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 이야기

교회사

by 김경호 진실 2016. 3. 2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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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31년 그리스의 서부해안 도시인 악티움에서는 큰 전쟁이 벌어진다. 바로 이 전쟁의 승리자가 카이사르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한 그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였다. 카이사르가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에 의해 암살되자 로마는 추모와 애도의 물결이 일어난다. 암살자들은 로마의 동방으로 도주했지만 카이사르의 막료였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처형된다. 바로 “빌립보”에서였다. 암살자들을 처형한 카이사르의 막료들은 화합을 갖고 제2차 삼두정치에 합의한다. 이 세 사람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였다.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동방인 발칸반도,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를 통치했고 10대부터 전장을 누비며 자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서방인 이탈리아, 스페인 갈리아를 다스린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집정관 레피두스는 복아프리카를 다스렸다. 그 후 레피두스는 일찍 실각했고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양자대결로 새 국면을 맞는다. 이들의 양자대결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랑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종결되는데 그것이 악티움 해전이었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한다. 그리고 소아시아의 타르소스(다소)성에 머문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을 추궁할 생각으로 소환했는데 안토니우스의 최후가 될 줄을 그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저들은 아예 알렉산드리아로 옮겨 동거에 들어갔고 사랑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키프로스와 북아프리카, 동부지역까지 선물로 준다. 참으로 사랑의 선물치고는 대단한 것이었다. 독단적인 안토니우스의 이런 행각은 로마 원로원의 공분을 샀고 당시 로마의 최고 실권자인 옥타비아누스의 미움을 산다. 그리고 원로원과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제재를 결정한다.

BC 31년 악티움 해전은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이어졌고 안토니우스는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미인계로 또 한 번 다가서는 클레오파트라를 거절한다. 이에 세기의 미인으로 회자되는 클레오파트라는 수치의 죽음을 예견하여 무화과 바구니의 살모사에게 자신의 팔을 내밀어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포틀레마이오스의 왕조도 그 막을 내린다. 그리고 BC 27년 로마 역사상 첫 황제가 된 사람이 성경 누가복음 2장 1절에 나오는 가이사 아구스도 옥타비아누스였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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