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안에서 사랑은 행복의 씨앗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불이 붙은 교회에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7~8)
일전에 친구 목사님의 설교에서 어떤 권사님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는데 자기 딸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유배달 아줌마와 우연히 만나 얘기하는데 “아줌마네 집은 아저씨도 잘생기시고 아줌마도 예쁜데 딸은 누구를 닮았는지 예쁘지않게 생겼네요.” 이 말을 들은 권사님은 “그렇냐?”고 말은 했지만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딸이 예쁘지 않다는 말이 너무 서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유를 당장 끊어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날 당장 우유를 끊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사실 권사님 딸은 그 아줌마가 말한 것이 사실입니다. 친구 목사님 보기에도 별로 예쁘지 않은데 권사님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교훈을 줍니다.(7~8절)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랑이 제일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요? 당연히 사랑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증거합니다(고전13:1~3, 13절).
고등학교 다니는 자녀가 있습니다. 운동도 잘하고, 인간성 좋고, 말 잘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도 잘하는데 공부는 항상 꼴찌에서 맴돕니다. 그 자녀가 부모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에게 있어서 공부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신앙생활 뜨겁게 합니다. 선교도 잘합니다. 전도도 열심히 합니다.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제자훈련도 잘 받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인데, 사랑은 빼놓고 다른 것을 다 잘합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다른 종교의 사랑보다 차원 높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할 때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다른 것은 다 풍성한데 사랑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사랑의 은사를 구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 우리 교회에서 시무하시던 전도사님이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그때는 우리 교회도 2층에서 개척하고 있을 때라서 많이는 도와드리지 못했지만 성의를 다해서 협력했습니다. 당시 300만원 드리고 매달 20만원씩 보조하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 꽤 큰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사님이 설립예배를 드릴 때 연락도 하지 않고, 이후 아예 연락을 끊었습니다. 나중에 소문이 들려오기를 교회에서 너무 서운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소문이 재정부 집사님들에게까지 전해졌고, 급기야 매달 나가는 보조를 끊어야 한다고 대부분 말씀하셨습니다. 성의를 다했는데 그것을 모르고 불평하는 사람을 도와줘봐야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집사님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집사님들 말씀이 맞습니다. 세상 사람들 같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그러나 믿는 우리들은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도사님을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해야 할 일을 하면 됩니다. 만약 그 전도사님이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지원을 끊어 버린다면 우리가 그 전도사님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도 그 전도사님과 똑같은 수준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전도사님이 어떻게 하든지 우리는 그를 용서하고 계속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를 미워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그리고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스데반도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고 이런 일을 행하고 있나이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까지 용서하는 것이 숭고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만 있다면 교회가 얼마나 은혜스러울까요? 문제될게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실력을 추구하지 말고 사랑의 은사를 추구해야 합니다. 사랑의 은사만 받으면 모든 것이 용서됩니다. 모든 것이 이해됩니다.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용서했는데 용서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탄은 기적도 행하고 능력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뜨겁게 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8절)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라는 것은, 말세에는 사랑하되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뜨겁게’라는 말은 본래 운동선수가 목표점을 향해서 전력을 다해 질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최선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애에 뜨거운 사랑을 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뜨겁게 사랑하니까 그렇게 추운 날 데이트 하는데도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뜨겁게 사랑하니까 상대방의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웃어도 예쁘고 울어도 예쁩니다. 실수해도 순수하게 보이고, 잘하면 의젓하게 보입니다. 아무리 일을 오래 해도 지루하지 않고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힘들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사회사역팀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샬롬의집에 가서 장애아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청소봉사, 빨래봉사, 목욕봉사 등 힘든 일을 합니다. 얼마 전 팀원 중 한 분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샬롬의집에 가서 섬기는 것이 힘도 들고 시간 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서 섬기시는 것이 그렇게 기쁩니다.” 왜 힘든 일인데도 힘들지 않다는 것일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 사랑 때문에 힘든 줄 모르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수고하는 것은 수고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사랑의 불이 붙은 교회, 서로가 정말 열심히 사랑한다는 소문이 난다면 정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미움이라는 단어가 없어져야 합니다. 시기라는 단어도 없어져야 합니다. 보복이라는 단어도 없어져야 합니다. 비판이라는 단어도 없어져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단어들이 없앨 수 있을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면 이런 단어들은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 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8절)
뜨겁게 사랑하되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혼자 사랑하는 것을 짝사랑이라고 합니다. 짝사랑보다는 서로 사랑이 더 좋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온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서로를 그리스도를 대하듯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상대방을 예수님으로 생각한다면 얼마나 잘 섬길까요? 목사님은 장로님을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섬깁니다. 장로님은 목사님을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섬깁니다. 집사님은 권사님을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섬깁니다. 권사님은 집사님을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섬깁니다. 심지어 주일학교 학생들까지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면 상대방을 얼마나 공손히 대할까요? 얼마나 인사를 반갑게 할까요? 말은 얼마나 조심해서 할까요? 아까운 것이 어디 있을까요? 상대방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대접하면 실제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사랑하면 실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유행가에서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불신자들의 조건적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아닙니다. 행복의 씨앗입니다. 눈물의 희생이 있지만 그것이 바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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