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4:35-41. 샬롬(שָׁלוֹם:shalom)의 원리 : 믿음 | |
오성환 목사(이야기가 있는 교회, 세움성경신학연구원 원장) | |
1. 히브리인들은 인사말로‘샬롬(שָׁלוֹם:shalom)’을 말한다. 히브리인들이 인사말로 말하는 샬롬은 구약시대에는 well-being의 상태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 말은 영어의 well-being이 기자고 있는 단순히 복지적인 의미에서의 행복 혹은 안녕의 상태를 넘어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안정과 풍성함까지 포함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고 죽을 줄 알았는데도 죽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장소에‘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사사기6:24)’고 불렀다. 욥기에서는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욥기25:2)’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샬롬은 여호와께서 만드시는 것이고, 그의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시는 선물이고, ‘샬롬’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망하는 종말에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하나님께서는 샬롬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셨다. 따라서‘하나님의 부르심’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에 근거한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수밖에 없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샬롬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예수님은‘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15:16)’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신다. 이런 하나님의 부름을 이해할 때 우리에게 샬롬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론 부름을 아는 자들은 서로의 샬롬을 위해 기도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사말로 샬롬을 이야기하는 것은 샬롬이 그들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샬롬을 삶에서 누리기를 원한다. 샬롬을 위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샬롬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샬롬의 근원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부르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샬롬을 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샬롬이 기대되는‘그 곳에’ 샬롬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과거와 같이 적절한 때에 비가 온다든지 아니면, 그냥 기술을 배워 기술을 통해 삶이 유지되는 시대에 느꼈던 샬롬과 현대화되고, 복잡해지고 그리고 다원화된 시대에서 느끼는 샬롬과는 다르기 때문일까? 어떤 면에서는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긴박성과 직접적인 고통으로 느껴지는 샬롬의 부재는 과거가 오늘날 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아니었을까?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철저하게 샬롬의 부재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샬롬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함께하신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들을 가르치시고 난 이후이기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온 샬롬의 부재 앞에서 두러워하고 떨고 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마가복음4:37)’라고 묻고 있다. 이미 함께하고 있는 샬롬을 의심하고, 그 샬롬을 회복시켜 달라는 제자들의 말에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마가복음4:40)’라고 말씀하신다.
3. 설교를 마치신 예수님을 모신 항해는 샬롬 그 자체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저편’이라는 목적지까지도 확실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런 샬롬은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영접했을 때 느껴지는 샬롬이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과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리고 그런 기쁨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광풍이 불면서 그리고 파도가 치면서 항해는 어려워진다. 샬롬이 깨진 것이다. 아니, 깨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을 약속하신 예수님은 광풍이 불건 평온하건 우리와 함께하신다. 예수님의 같이하심은 그래서 상황에 상관없이 샬롬의 상태이다. 그런데, 우리는 광풍으로 혼란스러워한다. 광풍과 파도의 위험성을 잘 아는 어부들이 다수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몰아치는 광풍과 파도를 보면서 ‘한방에 훅 간다’는 말이 생각났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같이 하시는 한 샬롬은 그들 가운데 있었고, 있고, 또 있을 것이다. 이런 폭풍과 파도를 만나을 때 살아나는 방법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즉, 이미 함께하는 샬롬을 깨닫고 그 샬롬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삶의 풍랑을 이기는 방법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4.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마가복음4:40)’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샬롬을 누리는 원리가 믿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만들어진 샬롬을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은 샬롬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에녹 성을 쌓고, 각종 문명을 발달시킬 수밖에 없었지만, 셋의 후예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샬롬을 누리며 살았다고 창세기는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여호와께 예배하는 것이고,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셋의 후손들의 삶을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으로 규정하셨고, 스스로를 위해 성을 쌓고 문명을 발달시키려 했던 가인의 후예들의 삶을 ‘이 모든 것’을 구하는 삶이었다. 풍랑이 이는 삶을 산다. 그럼에도 우리는 샬롬을 소유하고 있다. 믿음의 패러다임으로 본다면 우리와 같이하시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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