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규 교수(총신대 신대원 역사신학)는 개화파의 거두 서광범의 성경번역(요3:16) 원고 발굴과 그 의의를 현존하는 한국인 최초의 성경 번역원고에서 찾는다.
▲ 박용규 교수가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
6월 16일(목) 오후 1시 연동교회 다사랑카페 세미나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용규 교수는 현존하는 한국인 최초의 성경 번역원고라고 확신하는 개화파의 거두 서광범의 요한복음 3:16절을 소개하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서광범과 개화파의 활동을 통해 한국기독교 초기의 복음전파에 대한 밑그림을 그렸다.
과연 서광범은 누구이며 그는 왜 성경(비록 한 구절이지만)을 번역했을까? 그리고 그의 말년은 어떻게 보내고 세상을 떠나갔는가? 박교수가 2015년에 수집한 자료를 분석하여 이렇게 정리했다.
▲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제공 |
서광범은 누구인가?: 서광범은 언더우드가 출생하던 1859(철종 10년)년 11월 8일에 태어나 1897년(광무 1년) 8월 14일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서광범은 비록 짧은 생애를 살다갔지만 조선의 개화기에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의 근대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조선 왕조의 고위 관료를 지냈다. 영의정 용보(龍輔)가 증조부였고, 이조참판을 지낸 상익(相翊)이 부친이었다. 1880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서광범은 개화사상가 유대치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광범은 서재필이 미국 여인과 결혼하고 시민권을 취득하고 미국에서 그래도 개업의로 어느 정도기반을 갖추고 살다가 1894년 12월 일본 외무성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12월초 귀국해서 그달의 내각개편 때 법무대신에 등용되었다.
그는 내무대신에 임명된 박영효와 함께 사법개혁을 단행해 여러 가지 가시적인 족적을 남겼다. 그가 이룩한 사법개혁 가운데는 의금부를 법무아문권설재판소(法務衙門權設裁判所)로 바꾸고 모든 재판업무를 관할하게 만들었으며, 고등재판소제도를 새로 만들어 그 자신이 고등재판소장을 역임하였고 선교사에 대한 제한도 철폐시켰다.
그러나 서광범은 법무대신으로 민비의 폐서인 문서에 서명한 후 이 문제로 인해 민비학살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게되자 복권 불과 1년 만인 1895년 12월 주미특명전권공사로 자원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갑오내각이 무너져 서광범 역시 부임 7개월 만에 공사직에서 해임당했다. 이후 중추원일등의관에 임명되었지만 조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포기하고 미국에 남아 있다 그 이듬해 1897년 8월 14일 지병인 폐병으로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쉽게도 서광범은 신지학회 회원으로 세상을 마감했고, 신지학회장이 그의 장례를 집례했으며 그의 유해는 자신의 유언대로 화장되었다. 이로 보건데 서광범은 미국에서 한 때 기독교인이 되었다가(세례, 교회출석 등)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후로는 기독교를 떠나 생을 마쳤다고 보는 것이 유력하다.
서광범의 활동: 서광범은 1879년부터 김옥균 박영효와 함께 개화정치세력을 형성하고 국내에서 개화사상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과 더불어 개화파의 거두로 활동했으며 개화파 중에서도 상당히 급진적일만큼 개화사상에 깊숙이 물들었다. 그와 박영효는 기독교를 도입하려한다는 의혹을 받고 한 때 대원군으로부터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서광범의 개화사상은 임오군란 이후 일본을 방문해 일본의 개화사상과 일본에 소개된 서구문물을 접하고 더 한층 강화되었다.
1882년 9월 임오군란이 발생한 후 배상금 청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신사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간 서광범은 김옥균과 함께 일본에서 개화사상을 접하고 1883년 3월에 귀국했다. 같은 해 6월 전권대사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보빙사(報聘使) 일행이 사절로 미국에 파송될 때 민영익의 종사관으로 보빙사 일행에 합류했다. 이들 보빙사 일행은 일본에 들려 요코하마에서 주 일본주재 미국공사의 신임장을 받아가지고 22일 동안 태평양을 항해 한후 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서광범은 보빙사 일행으로 1883년 6월부터 이듬해 6월 귀국할 때까지 거의 1년 동안 미국과 유럽을 순회하며 당시의 국제 동향과 흐름을 배울 수 있었다. 1884년 12월 4일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구데타 갑신정변이 실패 한 후 서광범은 박영효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는 개화파 중에서 기독교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했던 인물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 성경번역의 역사적 의미: (1) 개신교 첫 선교사 언더우드와 서광범은 일본에서 만났고(1885년 2월-1885년 4월) 짧은 2개월이었지만 언더우드는 서광범에게서 한글을 배우고 서광범은 그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그 기간동안 언더우드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2) 1885년 서광범은 박영효, 서재필과 함께 “The City of Peking” 호를 타고 미국 망명 길에 올라 그해 6월 1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너무도 힘든 경제난으로 인해 박영효는 망명 2개월 만에 일본으로 돌아갔고, 서광범은 언더우드가 써준 편지를 가지고 언더우드의 형 존 언더우드를 만났다.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이사로 섬기고 있던 존 언더우드로부터 미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1885년 7월 19일 알렌이 미국 북장로교해외선교부 엔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서광범은 미국에 도착한지 불과 한 달 만에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 옥중에 있는 자신의 집안 여인들에게 기독교를 가르쳐 줄 것을 부탁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서광범은 기독교 신앙으로 귀의하고 세례까지 받았다. 그리고 그는 뉴저지 뉴브룬스위크에 위치한 러커스대학에 입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광범은 <한국: 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 <한국의 안팎>(Corea, Without and Within)을 저술한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와 두 번 째 역사적인 만남을 가지며 깊은 교제를 나누는 동안 그에게 자기가 번역한 요한복음 3장 16절을 건네 준 것으로 보인다. (3) 서광범의 성경번역(요 3: 16)은 현존하는 한국인 최초 번역 원고이다.
서광범이 번역한 요한복음 3장 16절
John 3: 16
in the Corean Language by Pom Kwang Soh of Corea
(1885년 7-8월 경으로 추정)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시는 고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려 보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옳은 말로 인도하여 지옥의 괴로움을 면하고 반대로 극락세계로 인도함을 미리 알려주시니라.”
▲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제공 |
서광범의 성구번역이 갖는 중요한 의미: (1) 비록 성경 한 구절이의 번역이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인에 의한 성경번역 원고라는 사실이다. (2) 이것은 개화파와 기독교의 신앙접촉 관련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사실이다. (3) 이것은 서광범의 요한복음 3장 16절에 담긴 당시 기독교 용어들을 통해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과 일반인들이 성경의 기독교 용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번역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4) 이것은 서광범의 신앙세계를 이해하는데도 상당히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단순히 위 번역으로만 서광범이 어떤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가졌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는 불교용어를 차용하였다. (5)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서광범의 요한복음 3장 16절 번역은 당시 만주 우장에서 진행되고 있던 로스 역본과 완전히 독립된 독자적인 번역인 것을 알 수 있다. (6)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서광범의 요한복음 3장 16절의 성구번역은 현존하는 한국인 최초의 성경번역본 원고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서광범과 그리피스: 성경번역이 자발적인 것인지 그리피스가 요구한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서광범은 그를 만나 교류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한글로 번역한 요한복음 3장 16절을 건네주었고, 그리피스는 늘 하던 습관대로 그것을 일생동안 자신의 스크랩북에 붙여 잘 보관해왔다. 사실 서광범의 요한복음 3장 16절의 역본원고가 발굴된 것도 그가 그 성구를 잘 보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단 한 구절이지만 그 성구가 기독교 핵심 사상을 담은 복음의 요체인 요한복음 3장 16절이고 그것을 번역한 인물이 개화파의 거두이자 한국 입국을 앞두고 일본에서 한국선교를 준비하고 있던 언더우드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서광범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또한 그 한글 번역 성경원고를 일생동안 보관해온 인물이 <한국 은둔의 나라>를 저술한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라는 사실과 그 원고가 당시 기독교 용어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의 동양학자로 불리우는 윌리엄 그리피스(1843∼1928) 목사는 이를 자신의 모교인 러커스대에 기증하였고 박용규 교수가 지난해 여름 미국 뉴저지 주 러커스대 고문서실에서 발견하여 세상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9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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