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될 당시인 19세기 후반기는 역사의 변혁기였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민족의 위기와 그 궤를 같이 하였다. 1870년대를 지나면서 흥선대원군의 실각과(1873) 운양호 사건(1875)으로 이른바 병자수호조약이 일본에 의해 체결되면서 조선은 비무장 상태에서 냉엄한 국제 질서 현장을 만나야 했다. 이와 같은 민족적 위기 앞에서 기독교는 고난 받는 공동체로 민족과 함께 있어야 했다. 이렇게 국제정세가 역사의 파고를 겪으며 격량의 세월일 때 이 땅에 닥친 비극이 청일전쟁이었다. 우리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청국과 일본의 전장터였던 조선은 고스란히 그 피해의 현장으로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 청일 전쟁 때 우리 조야는 청나라가 승리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한 지 두 달도 못되어 일본이 승기를 잡았고 1894년 8월 16일 평양전투와 8월 17일 압록강 전투에서 청나라의 육해군은 무참하게 패하였다. 여기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조선의 지식인들이었다. 조선의 조야는 새로운 세계질서에 눈을 뜨면서 서양 문물 없이는 민족적 자강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그리고 서구와 손잡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 기독교였다. 기독교를 통한 민족자강의식은 호주의 역사가 케네디 윌즈의 말대로 자강민족주의(Self-Reconstruction nationalism)로 발전하였다. 1895년 10월 8일에 일어난 을묘사변은 또 하나의 국가적 위기였다. 국모였던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무참히 살해된 후 지금의 비원에서 불태워진 이 사건은 말 그대로 국가의 사변이었다. 이 국가적 위기 속에서 30여 개의 교회 1000여 명의 성도들은 민족의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선교사 내한 이후 10여 년 밖에 되지 않은 한국교회는 신앙의 용광로 속에서 국민의 정서와 반일 감정을 추스르고 있었다. 일제의 거듭된 침략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이어지면서 이때부터 5000년 역사의 조선은 식민지로 변하였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한국교회는 민족의 위기를 신앙으로 수용하고 민족의 고난을 짊어진 채로 앞장서서 걸어온 공동체였다. 오늘 우리는 저성장과 교회의 도덕성 윤리성 추락으로 위기에 처한 이 상황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가지고 새출발해야한다. 우리의 아픔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앞장서 가겠다는 각오로 나아가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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