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적 주님은 사랑받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존중하는 자를 존중하시고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셔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삼하 7:15)
본문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은 미워하신 것 같고 다윗은 사랑하신 것 같아 보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왠지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시는 것 같아” 혹은 “사랑하시는 것 같아”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이 계십니까? 솔직히 “하나님은 편애를 하시는 분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본 적 없으십니까?
오늘 본문인 사무엘하 7장, 특별히 8절부터 16절까지에는 사무엘서 전체의 핵심적인 내용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특히 왜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셨는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8~9절을 보면, 얼마나 하나님이 다윗을 존귀하게 여기셨는지가 나오는데, 이런 축복을 여러분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나는 정말 다윗처럼 되고 싶다”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삼하 7:8~9)
당시 양을 몰던 직업은 미래에 비전을 가진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8절은 이런 목동 다윗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 안티 히어로 신드롬이 가득한 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오늘 구절들을 보면서 택하심을 받은 여러분들은 마음 속에 “나도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의 사람이 되겠다” “나도 왕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평범 이하의 인생을 살았던 다윗을 한 나라의 왕으로 삼으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9절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함의 축복은 누려본 사람만이 그 감동을 압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잘못되기를 바라는 대적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대적들을 남김없이 다 제거해 주신다는 겁니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보다 너를 더 뛰어나게 해 주겠다” “가장 존귀한 자가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왜 주님께 이런 사랑과 관심과 축복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까요? 사무엘서 전체를 보면 다윗과 사울은 계속해서 비교 대상으로 나옵니다. 그 두 사람의 행동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다윗은 그 일대기의 모든 것이 자세히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밧세바 사건으로 다윗을 평가 절하하는 면이 있지만, 세계적인 리더십들과 비교 분석해 봤을 때, 예수님을 제외하고 다윗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리더십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이런 다윗과 같은 리더십을 가지신 분이 나온다면 아니, 우리 모두가 다윗에 버금가는 리더십들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이 다윗처럼 살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부재 때문입니다. 의외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몰라서 사울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런 분들은 엘리 제사장에게 말씀하신 이 구절을 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이 말씀에서 ‘나 여호와’라는 반복적인 표현은 상당히 강조한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마치 돌로 깎아 놓은 신상과 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장 과정과 상당한 연관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계속 거머리처럼 하나님께 “주세요, 주세요”라고만 합니다. 그 분을 마치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가 그렇듯이 하나님도 사랑하는 것을 알고, 사랑받는 것을 아십니다. 존중받는지 멸시받는지 알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주님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을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사랑해 달라고만 하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사랑을 받는 만큼 주님도 우리에게 사랑 받고 싶어하시는 마음을 너무나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주고 싶으셔도 어느 선까지밖에 못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영영히 세우고 싶어 하셨는데, 사울이 왕이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언제 계셨느냐 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권력을, 백성을 더 사랑했습니다. 우리도 “뭐, 하나님이시니까 내가 하찮게 대해도 그분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셔야 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존중하는 자를 존중하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7~9)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배고프다, 목마르다 하시고 피곤해 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랑을 행동으로 보이셨고, 마지막으로는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기 전에 나타나셔서 “너희는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이렇게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우리와 대화하고 싶어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시편의 상당 부분은 다윗이 쓴 시들인데, 그의 시들은 사람이 사람과 한 것 같은 대화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과 사랑스런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다윗은 드디어 이스라엘 왕이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법궤를 다윗이 거주하는 궁궐 옆에 있는 성막에 모셨는데, 다윗은 성막을 볼 때마다 가슴 아팠습니다. 자신은 백향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호화롭고 아름다운 궁궐을 지어 살고 있는데, 그 옆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은 초라한, 염소 가죽을 엮어서 만든 성막이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다윗은 가슴이 미어졌지만 사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던 다윗을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주님은 인격적인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자신이 존귀함을 받는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에게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 삶 속에서, 하나님은 대충 대해도 항상 미소 짓는 분으로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삶 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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