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때문에 무죄한 자가 죄인으로 판단 받는다.(행25:1-27) | |
임진남 목사(예본교회, 한국개혁신학연구원) | |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단 한 번도 바울에 대하여 잊어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도 바울을 죽일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이렇게까지 여기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 대한 태도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당연하고 합당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모독을 일삼는 사람인지를 온 유대인들이 다 그렇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 것은 곧 죽음을 불러 오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왜 성령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임재 하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들에게 임하시지 않았다면 아무리 뛰어난 제자라고 할지라도 유대인들의 칼날 앞에서 담대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성령께서 오셨다고 하는 것은 복음을 담지하는 사람들에게 담대한 용기와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께서 오신 것은 능력을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고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성령을 왜곡하고 기독교를 세상종교와 같게 만드는 영향을 끼치고 말았습니다.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스라엘과 이방 모든 세계까지 담대하게 전하기 위해 각 사람에게 임재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열정 때문에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해 성령께서 믿는 자들 위에 임재 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까지 담대하게 증거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이 일 하나만 보더라도 유대인들이 예수를 얼마나 저주하고 증오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아래에서 2년 동안 감금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이제 벨릭스가 자신의 기한이 끝나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였습니다. 베스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사도 바울의 사건을 담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먼저 성령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쉽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새로 부임한 베스도는 유대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9절에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였다고 하는데 왜 베스도가 부임하고서 유대인들이 요구한 사항을 들어주지 않았는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절에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베스도에게 예루살렘으로 바울을 옮겨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옮기는 도중에 매복하였다가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한 베스도가 이런 요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사람의 결정을 번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의 의지를 꺾으시고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일반적으로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리고 시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쉽게 바꾸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일을 한다면 그 죄를 짓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목사들이나 일반 성도들이 죄를 짓는 일을 하면 성령께서 막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책임은 인간들의 몫입니다. 죄를 지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베스도의 결정을 유대인들의 뜻에 따르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주 예수의 복음이 로마에까지 가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여러 번 나타나셔서 “바울 네가 로마에 가서 나의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이나 유대 땅에서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의 의지를 꺾으시고 자신들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시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타인의 행동이나 의사결정을 번복시키려고 기도한다고 해서 쉽게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 가운데 통치하시는 능력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세상 무속종교에서처럼 아무리 정성을 기울려 기도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쳐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인간의 탐욕과 정욕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도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을 바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혹시 말씀을 읽고 있는 자들이 아! 하나님은 사람을 이렇게 조정하시는 분이시구나 라고 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면 사람의 뜻을 바뀌게 하시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보호하시고 복음을 위해 세상 권세자의 결정을 바꾸시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관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한다고 할 때, 지도자들이나 악인들의 행사가 변화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놓으신 바른 세상질서를 위해 그들이 함부로 자신들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복음을 대적하는 사탄과 악인들의 궤계를 허사가 되게 하신 다는 것을 우리는 이 짧은 말씀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의 죄가 참혹한 반란죄라고 하는 것을 베스도에게 전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8절에서 자신은 “가이사에게”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황제인 가이사에게 반역의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바울이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하는 의미로 바울을 더욱 압박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로는 도저히 바울을 죽일 수가 없으니 당연히 로마황제에게 반역을 행한 불법으로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가장 엄한 죄악이 국가반란죄입니다. 국가를 전복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죄는 극형에 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나라도 왕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죄를 지으면 3족을 멸했습니다. 또한 당파싸움에 있어 가장 좋은 무기는 역모로 엮는 것입니다. 여기에 엮기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지역에 있는 정여립이라고 하는 사람도 그렇게 역모로 죽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역모가 아니라 정치적인 희생으로 죽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역모를 일으키면 9족을 멸합니다. 그 사람과 관련되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처형시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어느 민족이든 가장 큰 죄악은 반란을 일으키는 죄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바울의 죄는 가이사에게 대항한 죄가 분명하다고 덧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총독 베드스도 바울의 말이 맞다고 여겼습니다. 베스도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거짓으로 꾸몄다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또 한 번 하나님께서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려고 하시는 뜻을 이루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총독 베스도는 바울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풀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주님께서 바울 뒤에서 계속 세밀하게 역사하시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베스도가 바울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풀어주지 않은 것은 총독 베스도의 입장에서는 그가 여전히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행위였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생명을 지켜 보호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바울이 풀려나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재판을 받기 위해 장소만 변경하기를 바라면서 숨어 있다가 암살을 하려고 하고 있는데 바울이 재판을 받기 위해 강금 당하고 있지만 로마의 군인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죄가 없다고 하여 풀려난다면 바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바울이 있는 곳을 찾아 죽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바울의 입장에서는 총독 베스도의 보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일들 밖에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바울이 풀려나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바울의 동료들과 성도들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사탄의 밥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보존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기 위해 가이사를 끌어들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일을 통해 바울을 가이사 앞에까지 가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본문 10절부터 12절까지는 사도 바울이 베스도에게 가이사에게 상소하므로 베스도가 바울을 가이사에게 보내기로 하였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여 줍니다. 이 상소하는 일이 결정되고 나자 바울에게 새로운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13절부터 우리는 아그립바 왕과 그의 아내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왔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그립바에 대하여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사회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만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고관대작들, 즉 당시 유대의 왕과 총독 그의 아내들과 모든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증거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베스도는 자신이 합리적이고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아그립바왕에게 알리기 위해 자신이 한 행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법에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과 장로들이 바울을 정죄하여 달라고 하는 것을 베스도가 거부하였습니다. 재판도 없이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스도는 바울과 유대인들의 고소문제는 자신들의 종교문제라고 여기고 그 일에 대하여 아그립바왕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헤롯 아그립바입니다. 여기에서 헤롯은 이미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유대의 왕으로 어린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한 사람입니다. 아그립바는 헤롯의 증손자입니다. 아그립바의 증조할아버지 헤롯은 예수님을 죽일 때 빌라도와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유대땅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시고 어떤 일들을 하였는지 다 알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헤롯입니다. 그런데 그의 자손들이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알고자 바울을 부르고 있습니다. 22절에서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자신도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한다고 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바울을 심문하기 위해 바울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가르치는지를 궁금해 하여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총독 베스도가 아그립바와 그의 아내에게 바울에 대하여 자신이 판단한 것을 먼저 말하여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을 직접 만나려고 하는 아그립바에게 베스도가 미리 바울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인간은 어떤 사람에 대하여 미리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편견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말입니다. 두 가지 입장에서 분명 하나의 입장을 가지고 사람을 대합니다. 그런데 베스도가 바울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미리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그립바는 바울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바울을 만날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베스도가 바울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말해준 것은 아그립바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쉬지 않고 담대하고 계속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행9:15절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님께서는 결코 사사로이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임금들 앞에서도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로 삼겠다고 하신 그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그립바가 자신의 아내와 함께 그저 할 일이 없어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왔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들이 베스도에게 온 것은 바울을 만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끄신 것입니다. 바울이 임금들 앞에 간 것이 아니라 임금들이 바울 앞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베스도가 바울에 대하여 말해주는 것을 보면 24절 이하입니다. 바울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여 예루살렘에 와서 자신이 있는 곳에서도 고소하였지만 베스도 자신이 살펴보니깐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이 상소하여 황제에게 보내기로 하였다고 대변하여 줍니다. 그런데 베스도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도 어떻게 상소장을 써서 바울을 황제에게 보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을 아그립바에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상소라고 하는 것은 재판에서 불법이 드러나고 정죄를 받은 자가 자신이 무죄하므로 마지막까지 재판을 다시 한 번 받아야 하겠다고 하는 것인데 베스도는 바울에게는 이미 죄가 없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상소장을 어떻게 써서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총독 베스도는 상소장을 작성하기 위해 그 합당한 이유를 찾고자 아그립바에게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스도가 이런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방식으로는 바울이 황제 앞에 가는 것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임금들과 고위 관직에 있는 자들에게도 주의 복음이 증거되고 있는 그 일을 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저히 황제에게 가서 재판을 받을 수 없는 바울이 어떻게 황제에게 가는지를 그 과정을 보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까? 죄가 없다면 풀려나는 것이 인간들이 바라는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죄가 없는 자가 자신이 마치 죄가 있다고 하는 상소를 하고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우리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위해 인간의 방식을 뛰어넘고 계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세상의 방식에 너무 쉽게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여기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 정의가 되어 버린 세상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살아갑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세상의 방식대로 살았다면 바울은 자신이 죄가 없기 때문에 상소하는 것을 포기하였을 것이고, 당장이라도 풀려났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형태의 삶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끝가지 순종하고 무죄한 자가 마치 죄 있는 자처럼 그렇게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원리는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가운데 살지만 세상의 원리로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무죄하신 분이신데 죄인으로 죽으셨습니다. 우리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세상으로부터 재판을 받는 그 모습처럼 우리들도 세상에 대하여는 무죄합니다. 그러나 복음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세상이 볼 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바울을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는 것을 죄로 여긴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세상은 그렇게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처럼 무죄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해 우리가 갇힌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고난과 환난이 있습니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에서 상이 클 것입니다. 아멘.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073&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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