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 되어 오심 (요1:14) | |
임진남 목사(예본교회, 한국개혁신학연구원) | |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들을 보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이 날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그저 하루를 즐겁게 보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 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본뜻을 제대로 알고 보내는 성도들이 있어야하는데 막연하게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정도의 신앙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타 종교에서도 가지고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이 땅에 온 것도 인생들을 열반 가운데 인도하는 선구자로 왔습니다. 힌두교의 크리슈나신도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왔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오늘 기독교가 기념하고 있는 이 성탄절이 단지 예수님께서 오셔서 인간들을 구원하신다고 하는 이 정도의 신앙지식이라면 다른 종교와는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종교들도 자신들의 신이 오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축하행사를 하고 축제를 벌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성탄전야의 축제를 하는 것과 그들이 하는 것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단지 다르다면 우리는 예수님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성탄절에 대한 지식들이 과연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성탄절이라고 교회에 가면 늘 하는 행사가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구유에 누이신 아기예수를 찾아 경배하고 목자들도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자랐습니다. 이러한 광경은 우리가 보는 텔레비전이나 크리스마스와 연관된 드라마 또는 예수님의 영화를 다룬 것들을 통해서 보면 항상 나오는 그런 장면들입니다. 한편 장성한 지금에는 성탄절이라고 하면 늘 우리는 교회에서 성탄절 칸타타를 준비하고 주일학교에서는 발표회를 준비합니다. 이러한 행사들이 교회에서 나타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에 대한 기념과 축제를 통한 즐거움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지 축전 기분으로 들떠서 성탄절에 대한 바른 의미를 모른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을 왜곡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일을 자세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에 하나님이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분이 어떻게 탄생하셨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어린아이 탄생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참된 하나님의 뜻은 마태와 누가가 아닌 바로 오늘 우리들이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요한복음에서 가장 바르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드라마나 그림, 또는 연극과 영화를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라는 이 영광스러움을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부분에서 우리들은 많은 편견과 이미 주입된 지식들 때문에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합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모든 묘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놀라운 이적을 바르게 다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탄생의 놀라운 영광을 제거해 버리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에 나타나는 아기 탄생의 묘사들은 마호멧이나 부처 크리슈나와 같은 이방신들의 수순과 같은 것에 불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술수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바르게 알 수가 있습니다. 요1:14절만 보더라도 우리는 구유에서 태어나신 어린 예수님의 모습에서 과연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모습을 그런 것에서 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요한 복음서를 대하면 그곳에는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이나 천사의 경배소리, 또는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도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의 강조점을 다른 것에 두고 있습니다. 요한의 목적은 예수님의 탄생의 과정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의미를 바로 우리들에게 전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14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라고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는 또한 알아야 합니다. 1장 1절 이하에서 이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들에게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다시 말해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말씀이 하나님이신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으로 이 말씀은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 곁에 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가르쳐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이 말씀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요한은 3절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모든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두 가지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라는 것과 그러나 하나님과 구분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 곧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고 하는 이것이 오늘 성탄절에 우리들이 들어야할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육신이란 단어를 들을 때 먼저 우리들이 떠올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육신, 이 말은 제한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에서 제한 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육신은 죽음이라는 것을 피하지 못합니다. 육신은 공간과 시간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있어 제한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영이다 라고 한다면 우리는 전체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제한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먼저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면 영이신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든지 존재하시고 계십니다. 시간이 지배할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죽음도 없습니다. 영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신도 영적인 존재입니다. 심판은 받으나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은 영원하지 않고 존귀하지도 않으며 고귀하지도 않습니다.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결국 영광이 아닙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가운데 먼저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 죽을 것이고 심판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였고, 생명을 불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타락한 인류이고 죄로 인해 죽음의 심판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배반하여 반역의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을 죽음의 형벌아래 둔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죄로 인해 죽은 인간 이 두 대조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을 지배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또는 말씀이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육신을 멸시한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말씀이 동등한 위치에서 육신이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와 누가가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어린 아기 예수님을 묘사한 것입니다. “되다”라는 이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탄절의 참 의미입니다. 비록 요한은 베들레헴 아기 탄생을 말하지 않고 있지만 세상 다른 아기들의 탄생처럼 그런 탄생이 아닌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육신 곧 세상의 아이들은 죄로 인해 죽음에 지배를 당하고 슬픔과 고통 가운데 빠지는 그런 어린 아이의 육신이 아닌 완전히 다른 존재인 아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이 어린 아기를 바라본다면 다른 아기들처럼 그저 육신에 거하는 모습만 볼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런 일반적인 육신에 거하는 아이가 아닌 완전히 존재가 다른 아기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기를 보니 영광이 가득한 것입니다. 육신은 영광이 없지만 이 육신의 아기는 영광이 충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의 기원이 어디에서 입니까? 바로 하나님 품속에 원래 계신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유에 누우셔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이 아이가 태초에 계신 말씀이었고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시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 어린 아이가 우리들 가장에서 태어나는 그런 아이가 아니고 뿐만 아니라 세상종교에서 말하는 자신들의 신으로 세워지는 그런 아이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이시고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시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이 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신비가 우리의 지성과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까? 강보에 싸인 이 아이가 어떻게 영원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란 말입니까?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자와 여러분이 우리의 지성과 이성으로 이것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이것은 배워서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지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이 이것을 믿고 있다는 것이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 아닌지요?
그러나 사탄은 이러한 하나님의 육신 되신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성육신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을 인간지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론은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가르칩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아기로 오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12살 때부터 어느 정도 배우고 아는 나이가 되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 보다 뛰어나고 탁월한 선지자적인 능력과 신기가 있었기 때문에 늦게나마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렇게 일컬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주장들은 사탄이 꾸며낸 거짓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거짓 복음 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거짓 복음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복음서기자들이 어린 아이로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바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이 뜻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더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에서 성탄절이 무엇을 기념하는 날인지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고 하는 이 말씀 속에 임마누엘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거한다고하고 하는 이 단어는 장막이라는 단어를 동사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장막이 무엇인지 구약에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함께 거하시기 위해 장막 즉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장막은 나중에 성전으로 대치되었고 그곳에서 하나님은 늘 임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은 언제나 거룩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구분되었고 성결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피의 제사가 드려졌고 피가 뿌려지면 사죄의 은혜가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그런데 육신으로 온 아이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고 하는 임재하신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는 이 선언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실 수가 있다는 것인지? 이것은 단지 정치적인 메시야, 자신들을 식민치하에서 구원하여주는 그런 정도의 지도하는 인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오셨다는 선포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의 아이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 임재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이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기념할 때 예수님의 중보자의 위치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신 것은 우리들의 입에서 예수 탄생의 축하 노래 몇 가지를 부르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온전한 생활을 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우편부좌에서 자신의 교회와 백성들을 위해 여전히 중보자로 일을 하시고 계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보면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최종적으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마시기 위해 바로 이 예수님께로 가야 한다고 하는 말이며 그 분은 완전한 진리이시라고 하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은혜의 원천과 진리의 근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천 년 전에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계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는 이 말씀은 그 당시 예수님의 탄생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지금도 우리가운데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비록 오래 전에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지만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오늘날에도 사실로 우리 가운데 오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령 안에서 자기 백성돠 함께 하기 위해 오시고 계십니다.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입술로 늘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비록 육신의 아기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이시며 피조물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육신의 아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생명을 바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081&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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