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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위

김명도박사 설교

by 김경호 진실 2009. 8. 8. 13:08

본문


일시: 2008년 5월 18일
장소: 튤립 선교회
본문: 약 2:14-26
제목: 믿음과 행위
설교: 김명도 목사
길이: 40분
녹음: C-60

서론
야고보서는 처음서부터 문제가 있어서 늦게서야 정경으로 인정받았다  정경결정의 원칙은 사도성, 교리의 일관성, 보편성 등 세  가지로 결정되는데 367년 Athanasius 가 부활절 멧세지를 보낼 때 그 편지에 신약성경의 목록이 오늘과 같은 순서로 27권이 기록되었지만 그 전에 이미 정경이 결정된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일찍 인정하지 못한 이유는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행위를 강조한 것이 아니고 믿음에는 반드시 그 열매로 행위가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 것인데 믿음으로 사람이 의로워진다는 의신득의 교리를 정립한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초개서 (an straw epistle) 라고 하여 오래 동안 인정하지 않다가 나중에야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야고보서의 목적은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설명해주려는 것인데 믿음이 있다고 하고 행 함이 없으면 그것은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항상 믿음과 행위가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과 행위는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지 오늘은 본문 약 2: 14-26 까지 말씀을 통해서 “믿음과 행위”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저 합니다. 세 가지로 대지를 나누어서 말씀 드리지요.

I.  믿음의 정의
II. 그릇된 믿음
III. 바른 믿음

I 믿음이 정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믿음을 많이 논합니다. 모두 저마다 남에게 뒤지지 않는 좋은 믿음이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신비주의를 가르치는 Richard Foster 나 Calvin Miller 같은 사람들도 신앙가로 자처하면서 부흥회도 인도하고 책도 써냅니다.  믿음이란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인데 이것을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지식, 동의, 순종, 그리고 의지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믿음의 요소는 이렇게 네 가지로 구성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음악의 삼대요소가 멜로디, 하모니. 리듬이듯, 비료의 삼대요소가 질소(N), 인산(P) 그리고 가리 (K) 이듯, 믿음의 사대요소는 바로 이 네 즉 Knowledge, assent, obey, commit 등 네 가지입니다.  

세상에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종교이건 종교는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대상, 믿는 내용, 믿은 방법, 믿는 목적 등 네 가지입니다. 이것은 어느 종교를 믿건 반드시 이런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종교마다 믿는 대상이 다르고, 믿는 내용이 다르고 믿는 방법이 다르고, 믿는 목적이 다릅니다. 다른 종교와 달리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해 주신 기독교에서도 이 네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다” (credo) 라고 할 때 우리는 믿는 대상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믿는 것인가?  우리는 성삼위 영원한 인격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천지만물을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신 천상천하의 대 주재가 되십니다. 우리가 믿는 내용 즉 교리는 창조, 타락, 구원의 도리입니다. 성경이 교훈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입니다. 창조, 타락, 구속입니다. 이것을 설명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성경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과 해위계약을 맺으셨고, 그 계약을 파기한 아담은 죽게 되었는데 혼자만 아니라 그가 인류의 대표자인 까닭에  모든 인류가 죄 가운데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계약을 세워 그리스도를 희생의 제물로 그리스도가 대표하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 하나님의 백성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흠이 없는 하나님 그리스도가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성육신하여 때가 되매 능동적인 순종으로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모두 완전하게 지키셨고, 수동적인 순종으로 우리가 받을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고  우리는 우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켜 이중전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덧입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일방적이며 법적인 선언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죄가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로되 죄가 있지만 없다고 보아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워진다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헬라말에서 “의로원진다” 라는 말은  “dikaiow" 라고 하는데 헬라어에서 ”도덕이나 윤리를 나타내는 말이 ow 로 끝나면 “.... 라고 여김을 받다” “...로 간주하다” 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워짐을 받았다는 말은 의롭다고 인정받았다 는 말입니다.

믿는 방법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에게 성경에 명시된 대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가들의 예배는 성경을 철저하게 따릅니다, 성경말씀에 위배되는 예배 즉 인간이 제멋대로 만든 예배는 절대로 배척합니다.  요한복음 4:24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란 말은 신령이란 하나님은 거룩하니 거룩하게 예배한다는 말이고 진정이라는 말은 성경이  명령한대로 예배드린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하라는 말도 없고 하지 말라는 말도 없으면 안하는 것이 개혁주의 적 예배의 개념입니다. 반면 자유주의는 그런 경우 행하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 하라는 말도 없고 하지 말라는 말도 없으면 자유주의는 행합니다.

오늘 예배가 타락한 모습은 여기저기서 너무 많이 봅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예배의 설교가 자유주의로 흘러간 것은 옛 일이고 요즘은 설교가 신비주의 일색입니다. 소위 <Contemplative Prayer> 니 <Contemplative Formation> 이니, <Alpha Course > 니 <Emergent Church> 니  하는 것들이 모두 잘못된, 비성경적 예배형태들입니다. 특히 근자에 나온  Max Lucado 가 출연하는Hoper 의  <Be Still> 이라는 DVD 나 책자는 이런 비기독교적 신비종교를 도입하는 관문입니다. 그러나  Max Lucado 나 Philip Yancy 같은 유명한 이름이 등장 한다고하여 사람들은 방심하고 거기에 나오는 내용들을 아무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 드립니다.  이것이 속임수의 계략입니다.

크게 잘 못되어 갑니다.  Richard Foster 는 Renovare 라는 영성운동을 주도하는 사람이고 한국에서도 한국의 교계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철없는 목사들이 Foster 나 Warren 목사를 초청하여 대대적 야단법석을 떠들었는데 이는 모두 이들이 주장하는 신학이 무엇인지 몰라서 빚어진 비극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고의적으로 이런 사람들을 초청했을 리 없다고 보아집니다.

예배의 설교내용만 가지고 비판하던 시절은 지냈고, 요즘은 말씀은 비교적 건전하다고 해도  예배 형태가 비성경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들은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human autonomy (자행자지) 하니 속수 무책이며 그런 상태로 주님의 재림을 맞을 것이며 눅 18:8 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럴사한 변명을 합니다.  그들의 변명의 내용은 “본질적인 것은 유지하고 지엽적인 것은 문화에 맞게 동화하자”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교회를 극장으로 변개 시킵니다. 예배 분위기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 안에 코피샵 문을 열어놓고 주일에 상업이 성행입니다.  시카고의 Willow Creek 교회 같은 곳은 대표적이지요.  “본질적인 것은 그대로 두고 지엽적인 것은 사람들 마음대로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자” 는 생각인데 이런 주장이 성경적일까요? 성경 롬 12장의 말씀 “세상을 본받지 말라” 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기독교 신자는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입니다.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데 “어느 것이 필수이고 어느 것이 지엽적입니까?”  예배 해위 전체가 본질에 속하며 지엽적인 일은 몇시에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가에 국한 합니다. 이런 것들을 지엽적이라고 합니다. 예배의 형태와 예배의식에 지엽적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을 하다 보니 과거 제가 NAPARC 즉 북미주 보수 장로교단 및 개혁교단 협의회 에서 일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WCC 의 등장과 함께  보수 장로교단들이 점점 자유주의로 변해가고 미국 북 장로 교단이 자유주의로 물들어 갈 때, 이에 반발하여 EPC Evangelical Presbyterian Church (미국 복음장로교단) 이 창립되었습니다.  이 교단이 1978년에 창립되었는데 1980년대 후반부터 NAPARC 이라는 북미주 장로교단 및 개혁교단 협의회에 회원 가입 신청서를 냈는데 10년이 경과한 1997년까지도 가입을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그 교단은 여성장로, 여성목사를 인정합니다.  그렇게 하락하는 이유를 물으면, “본질적인 것은 유지하고 지엽적인 것은 문화에 따른다”는 철학입니다 (EPC Postion Paper 참고). 이런 이론은 궤변이라고 인정하고 NAPARC 의 교단대표들은 EPC 교단의 회원 가입을 적극 저지했는데 제가 회장으로 있던 1994년까지도 가입이 부결되었고 제가 NAPARC 을  떠나던 1997년 까지도 가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배란  신앙생활에는 본질이 따로 있고 지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예배는 더욱 그러합니다.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경배하는 예배는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예배의 구성요소 모두가 필수이며 지엽적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본질과 지엽을 분리하여 사람의 마음대로 예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패역한 교계 지도자들은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데 말씀에 도전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무어라고 가르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믿는 내용을 알고 방법을 알았으면 목적은 무엇일까요?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인간이 주 예수의 은혜로 죄용서 받고 영생의 구원을 얻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힘쓰는 것이 성도의 목적입니다.  기독교는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입신양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주님의 성호를 찬송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구주로 모시는 성도의 삶입니다.

믿는 도리를 알았으면 동의해야 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은 그 성경 내용에 동의하지 않고 믿지도 않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알았으면 이제 그 진리에 동의해야합니다. 자유주의 신학교의 교수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머리로만 알고  동의하지 않는데 이런 믿음은 진정한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라면 그런 믿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믿는 도리를 알고 동의했으면 순종해야하고 순종하면 그대로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입니다. 그대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살아 드리는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이 성경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정의입니다. 그런데 그릇된 믿음이 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II, 그릇된 믿음
사람들은 야고보서는 로마서와 서로 상치된다고 가르치고 야고보의 신학은 바울 신학과 다르다고 말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그릇된 믿음이 있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습니다. 본문 에 보면 어떤 사람이 헐벗고 가는데 형제여 평안히 가라하면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을 보여 줄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둡는 것이 원칙입니다. 사람들은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professing Christian> 은 구원이 있을 수도 있고 구원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로마인서 10:10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고 가르쳐 줍니다.  

믿음에는 종류가 여럿 있습니다. 대개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 역사적 신앙 이 있습니다.  머리로만 믿는 신앙이며 동의하거나 순종하거나 의지하는 일이 없으니 구원이 없습니다. 대개의 자유주의 자가 여기에 속합니다. 둘째 임시 신앙이 있습니다.  믿다가 어려움이 오면 곧 신앙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닌까닭에 구원이 없습니다.

셋째 기적 신앙이 있습니다. 기적위주의 신앙입니다. 이런 분들은 항상 기적을 좇아 다닙니다. 성경은 고후 5:7에는 “보는 것으로 행치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한다 (걸어간다)” 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것도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끝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에 언급한대고 구원에 대한 지식 (구원의 도리) 이 있고, 동의하고 순종하고 의지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신아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고 생활은 제멋대로 하는 자 곧 믿음의 열매가 없는 사람은 구원 얻은 자가 아닙니다. 이 말은 해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참다운 신앙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신앙의 열매가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신앙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행위입니다.   열매가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7:18에 기록된 대로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입으로만 주을 고백하고 열매가 없는 신앙생활은 잘 못된 신앙이란 말입니다.

가령 전 세계의 종교를 하나로 통일하려고하는 Alpha Course, contemplative spirituality 같은 것은 잘 못되어가는 믿음입니다. 현세에서만 잘되고 잘 살려고 하고 돈을 모으고 살려는 신앙은 기독교적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샤마니즘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은 그릇된 신앙입니다. 요즘은 번영신학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Bruce Wilkinson 의  야베스의 기도라든지 Joel Osteen 의 <긍정의 힘> 이라든지 모두 잘못된 믿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히브리 11장에 기록된 모세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애급에서 장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즐겨하는 신앙생활을 보면 잘못된 신앙생활은 설 땅이 없습니다.  옛날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로 계시던 B.B.Warfield 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의 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사람의 생각대로 바꾸어 버리는 자는  이미 성경의 권위를 무시한 이단이다.  이단의 특성은 성경말씀과 성경이외의 말씀이 서로 다를때 성경보다 성경이외의 말씀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III 바른 신앙
   그러하다면 바른 신앙은 무엇인가?  
  열매가 있는 신앙을 말합니다.  신앙의 시금석은 바로 그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나쁜 나무는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법입니다. 뿌리도 문제가 됩니다.  같은 태양아래 같은 토양에 두 구루의 나무가 서 있는데 하나는 열매가 풍성하고, 다른  나무는 열매가 없다면 그 이유는 뿌리가 나쁘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고 판단하고 사람은 항상 행실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신앙도 그 결과를 보고 그 신앙의 진위를 압니다. 신앙의 열매가 나쁘면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떠들어도 그는 바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참 신앙은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게 되는데 마음이 변화가 앞서야 합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서 입으로만 시인하는 신앙 (professing Christian) 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런 믿음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라고 반문하는 것을 보십시오. 참 신앙을 가진 분이라면 반드시 선행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선행이 없는 사람이 위선인 것을 말하면서 야고보는 “귀신도 그 정도는 알고 떤다” 라고 19절에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두려워서 감격하여 절대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떨어본 경험이 있는지요?

진정한 믿음은 21절에 보니  회생이 따릅니다.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십시오.  그의 믿음은 모리야산까지 이어졌습니다. 행동이 따랐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100세에 난 아들을 바쳤습니다. 참 믿음은 그리스도 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갈보리로 향합니다. 참 신앙은 현세 중심이 아니라  십자가로 향하는 신앙입니다. 예수께서 말씀 하시되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십자가가 없는 Hoper 의 Be Silent 라른 책이나 Joel Osteen 의 책은 비성경적이라는 말입니다.
  
참 믿음은  또한 24절에 기록된 대로 우리를 의로 인도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불의한 일을 계속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의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열매를 맺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발생적입니다.  이런 것이 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참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고 믿으면 더 좋을듯하지만 고린도후서 5:7에는 “우리는 보는 것으로 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한다” 고 가르쳐 줍니다. 성경의 기록은 객관적으로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입니다.

결론
참다운 신앙은 행함에 있습니다. 두 개가 별개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행위로 말하면 불신자도 신자보다 선행을 더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행은 더러운 옷 같다고 이사야 64:6에 말합니다. 로마서 14:23 에는 “무엇이든 믿음으로 행치 않는 것은 죄” 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구원 얻은 자의 신앙에는 반드시 선행이 따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느니라” 라고 히브리 11:1에 말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우리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른 신앙생활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십시다.       -신앙과 행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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