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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예배

김명도박사 설교

by 김경호 진실 2009. 7. 31. 23:15

본문



일시: 2008년 6월 1일  11시
장소: 튤립 선교회
본문: 롬 12:1-2
제목: 영적예배
설교: 김명도 목사
길이: 40분
녹음: C-60

서론
바울은 지금까지는 수리아의 안디옥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앞으로는 전도 지역을 넓혀서 스페인까지 전도할 계획을 세우고  로마에 가서 로마에 선교 본부를 두고 활동해야하겠다고 생각하고 로마교회에 협조를 부탁하는 편지를 씁니다.  로마인서의 구성은 1-11장 까지는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쳐주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성도들의 실천 생활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개인 윤리와 정치 윤리 등으로 분리하여 믿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제16장은 로마에 있는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하라고 바울이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성도의 실천생활의 가장 우선할 것이 12:1-2에서 영적예배를 드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오늘은 영적예배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서 영적 예배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I   영적 예배의 의미
II  영적 예배의 방법
III 영적 예배의 중요성

I  영적 예배의 의미
   본문은 처음에 “그러므로”  란 말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앞의 내용과 연결을 시켜주는 접속사입니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이런 것이니” 라는 말인데 이런 교리를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앞서 11장까지에서 교리를 가르친 것은 그런 교리를 교훈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 교리를 실천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의 교리는 반드시 그 교리를 성도의 일상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입으로만 고백하는 신앙은 구원을 보장 못합니다.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가롯 유다나 오늘 수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Rudolf Bultmann 은 자신이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찹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입으로 고백하는 말이고 실제 그의 학문에 나타난 실천생활은 그와는 정반대로 공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을 부인합니다. 신학박사의 호치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구원과는 거리가 먼  이단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한 것이 아니고 기절했다고 가르친 Strauss 같은 사람도 신학박사이지만 구원과는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교훈은 반드시 실천생활을 동반해야합니다. 실천생활이 없는 성도의 생활은 “죽은 믿음” 을 가진 사람입니다. 옛날  처음으로 교회를 개쳑하던 때에 생긴 일을 잊지 못합니다. 새로 개척한 교회는 기웃 거리는 사람들이 많게 마련입니다. 그 때 출석하는 장로 한 사람이 “성경대로 살자고 강조하는 것은 율법주의자” 라고 하여 그 사람을 설득시키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던 일을 기억합니다. 누구에게 배웠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려서 그렇게 배운 사람은 커서 바른 신앙으로 고쳐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라고 디모데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하나님의 자비”로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크리스챤의 생활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획되고 행해집니다.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 진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 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은 구약의 의식법과 비교해서 설명해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살아 있는 짐승을 죽여서 피를 바쳤습니다. 물론 그 짐승의 피는 장차 십자가에 돌아가실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 나오던 그 마지막 여호와의 밤에 죽음의 천사가 애급의 장자를 모두 죽일 때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인명피해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입니다. 그 양의 피는 흠도 티도 없는 어린양 예수의 피를 상징합니다. 장차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흘려 돌아가실 그리스도를 내다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의 모든 의식법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에게 제물을 바칠 때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짐승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흠과 티가 없는 분, 즉 우리와 같은 인성을 지니신 분이지만 성령으로 잉태하여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고후5:21).

   구약에서는 짐승을 죽여서 드렸으나 신약에서는 몸을 “산 제물로”, 즉 우리 몸을 죽이지 않고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적 예배란 구약 때처럼 외면 중심이 아니라
내면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에서는  도덕법, 민사법, 그리고 의식법이 있었는데 도덕법을 어기면 그것은 민사법으로 다스려지고 민사법은 반드시 의식법을 통해서 그 죄의 해결을 명합니다.  양을 훔쳤으면 “도적질 하지 말라”는 도덕법을 어긴 것이고 민사법대로 4배를 갚아주어야 하고 의식법에서는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려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의식법을 형식적으로 행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로마인서 12장의 “영적예배” 에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예배” 라고 말하면 통상 주일에 온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일을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만  아닙니다.  물론 주일의 예배가 중요합니다. 예배를 성경대로 드려야합니다. 그러나 주일의 예배가 실천생활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위선이 될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시은자이신 하나님에게 수은자가 시은자의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그를 찬양하며 경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마음을 다짐하는 의식입니다. 예배드리는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예배는 형식적인 예배와 구별됩니다.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속사람이 변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합니다. 주님께서도 수가 성 여인에게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배는 받으시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는 예배는 소용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가증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 고안한대로, 또 사람이 기분 좋은 대로 예배를 드리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살 뿐입니다. 우리 모두 Westminster 신앙고백서를 믿습니다. 성경과 같은 차원이 아니라 성경을 가장 잘 충실하게 요약한 신조로 받아 드립니다.

신앙고백서 21장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에서도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식이므로 사람이 사람의 방법으로 고안하여 드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대부분의 교회는 사람이 고안한 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곧잘 마태복음 7장을 인용합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지만 적군이 처들어오면 나팔을 불어야 하는 것은 파수 군들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나팔을 불지 않아서 모든 병사들이 살상을 입으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파수 군에게 돌아가는 것이며 그의 손에서 하나님은 피를 요구하시겠다고 에스겔 3장 18절과  33:7-9에 두 번씩 이나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은 이단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고 그냥 내 버려둔다거나 잘못하는 형제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마태복음 18장에서 잘못하는 형제를 타이르고 징계하라고 그래도 불복하면 출교하라고 가르칩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들을 용납하였다” 고 바울이 노여워 말합니다.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은 5절 말씀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합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그릇된 교리를 전파하면서도 남의 잘못을 비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난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1-5 말씀은 그릇된 신학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릇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보존되기 위해서 반드시 고쳐져야 하지요. 자기의 잘못을 못 보면서 바로 믿는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성경구절을 왜곡합니까?  

오늘 본몬 말씀에서 말하는 “영적 예배” 는 구약의 외적인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내적으로 변화를 받은 내적 영적 예배를 말입니다.  그 예배는 비단 주일 드리는 예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주님에게 예배드리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면서 주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신령한 힘으로 다음 일주일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신 주님을 위해서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인생의 목적입니다.  실천생활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휼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잊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신 분으로 죄를 참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수록 더욱 죄를 멀리하며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온 땅에 주의 영광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II  영적 예배의 방법
   첫째로, 변화를 받으라고 합니다.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변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자나갔도다‘ 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의식이 변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기 전에는 모든 것이  우리들 자신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되면 생각이 변하여 나를 처셔 복종시키고 그리스도의 영광만 추구하게 됩니다. Rick Warren 목사는 그가 설계 하는 바 전 세계 10억명 전도를 위한 계획을 설명하면서 성도들이 영광을 받는다고 발언하여 파문이 일고 있지만 우리가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습니다.  우리가 영광을 받는 것은 주님이 재림하여 우리가 모두 주님나라에 들어갈 때 되어지는 일이며 이 땅에서 성도가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성도가 세상 사람들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게 됩니다.

본문에서 “너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라고 했는데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라는 말은 schema입니다. 변화를 받으라는 말은 morphe 라는 말이니  이 시대의 모양즉 풍습을 따르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살전 5장에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이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말할 때가 있고 성경은 또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고 세상과 벗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줄을 알지 못하는가?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타락한 세상의 풍습을 말합니다.   타락한 세상의 풍습과 인간의 타락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원죄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죄를 지으려는 육체의 생각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고민은 바울이 롬 7장에서 말해 줍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치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은 행하니 참으로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하며 롬 7장이  끝납니다.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당장 천사같이 되어 지지 않습니다.  점점 성화가 계속되어가는 것뿐입니다.  그 성화는 평생 계속하다가 죽을 때 끝납니다.   성화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아주 버리지 못한채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좋아합니다. 바울을 따라다니던 사람들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니 모두 떠났습니다. 사람이란 그런 것입니다. 본인에게 유익이 있으면 따라다니지만 스승이 곤경에 빠지면 모두 떠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근성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데마는 세상을 살아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 고 했는데 “세상을 사랑하여” 란 말을 바울이 힘주어 말합니다. 생각에 변화가 없으면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변화를 받으라는 말은 원문에서 morphe 라고 했습니다.  틀이 변한다는 말입니다. 세계 관과 인생관이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Renew your mind 란 영어 성경에  renew 이지만 “틀이 바뀌는 것, remolding" 을 말합니다.  이전에 세상과 벗하면서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던 그 버릇이 깨지고 온전히 변해지는 삶을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가를 구별하면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나를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한 삶으로 전환되는 것은 대단한 변화입니다.  주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주님이 워하시는 일을 하면서 살라는 말은 주님 중심의 생활을 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엡 5:10 에서도 “주께 기쁘시게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라” 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핍박이 옵니다. 핍박이 오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다르니까  핍박이 옵니다 이질적이니 핍박이 옵니다. 우리 몸에 병균이 들어가면 이질적이니 우리 몸 안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경대로 사는 사람은 핍박을 받으리라고 데모데후서 3:12에 바울을 말합니다. 성도는 핍박을 이겨내야 합니다. 진리를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이땅의 교회를 전투적 교회 church militant 라고 합니다. 이 땅에 존속하는 교회는 싸우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전투적 교회의 용맹성이 살아지고 모두 교회가 여성화 되어갑니다. 세상에 잘 보이기 위해서 세상처럼 곱게 화장하며 얼굴을 가꿉니다. 따라서 외부에서 병균이 들어와도 저항할 힘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는 세상의 유행병을 이기지 못해 병들어 온갖 이단에 빠집니다.


III 영적 예배의 중요성
   영적 예배는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는 행위와 한 주일을 세상에셔 살 때 예배 하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면이 있습니다. 둘다 중요합니다. 성도가 교회에서는 거룩하게 시간을 보내고 세상에 나가서는 되는대로 살 수 없습니다. 이런 연고로 1966년에 Anton LaVey 라는 교인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에서는 거룩하게 예배를 인도하고 기도하지만 주중에는 나이트 클럽에 나와서 술을 마시며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는 것을 보고 교회출석을 중단하고 San Francisco에 The First Church of Satan 이라는 사탄교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못하면 형제를 실족케하고 형제를 실족케 하면 성경은 “연자 돌을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지우라” 라고 마태복음 18:6 에 주님이 엄하게 경고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주일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예배갸 되지 못하고 주일 예배를 소홀히하므로  신앙생활이 침체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예배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어서 일어납니다.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졸면서 예배 드릴수 있습니까?  이사야는 그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자기를 저주할 정도로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박국도 3:16에 찾아오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창자가 흔들렸고, 입술이 떨렸다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 진정 하나님의 사람은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떱니다. 그러한 떨림이 오늘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에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심판과 지옥은 도도지 말하지 않습니다. 귓맛 좋은 말만 합니다.  성도에게 독약을 먹이는 독사의 무리들입니다.

세상에서도 영적 예배를 드리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성도의 순례자의 길입니다.  성경은 고린도전서 15:31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가요? 자기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죽이지 못하고는 성도의 일상생활에서 영적예배를 드리는 심정으로 살수 없습니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사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2:20에는 “내가 육체로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려주신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세상을 본받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의 생활은 항상 영정예배를 드리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이 그러했습니다. Scotland 의 언약파들이 그러했습니다. 청교도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매일 매일 일과를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심정으로 충실히 살아갔습니다. Soli D대 Gloria 는 칼빈 선생이 만들어낸 구호이지만 이들 신앙인들은 그런 심정으로 살아갔습니다. 우리도 본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일주일을 일하면서 늘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심정으로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영적예배입니다. 나중에 후손들에게 와서는 그 예배가 해이해져서  제1차 각성운동이 1720년대에 일어났지만 그 전까지는 건전한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의 자손 대에 와서 교회를 등한히 한 것도 예배시간에 영적예배를 드리지 않았고 따라서 사회 생활에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대로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성경대로 예배드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세상에 나가 매일 매일 생활을 예배를 드리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성도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는 우리를 어둠에서 인도하여 빛의 나라로 옮기신 구주 이십니다.  들을 귀가 있는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영적 예배.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적예배를 드리라고 말합니다. 구약 시대 처럼 형식이 아니라 내적 심령의 변화를 받아 세상을 본받지 말고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교회에서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바른 예배를 드리고 세상에 나가 생활할 때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에게 영적 예배를 드리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우리가 모두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 설교를 들으시는 여러분에게 은혜를 더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그 어느 날 선악 간에 우리 육체가 행한 대로 심판받기 위해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것을 기억하십시다.     -설교, 영적 예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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