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촛대와 일곱 별을 보여주신 이유(계1:8-20) | |
임진남 목사(예본교회, 한국개혁신학연구원) | |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 요한에게 앞으로 일어날 “속히 될 일”들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시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그 일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유대교의 중심인 성전을 파괴시키며 더 이상 지상에서 동물의 제사가 드려지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 모든 제사장들을 다 죽이시고 혈통적인 12지파를 흩으시는 심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요한에게 하여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요한에게 나타나 보여 주시고 있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요한에게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한 번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모세에게 나타나 보여 주실 때 모세가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던 그 대답처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요한에게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단지 뛰어난 인간 선지자로 알고 있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 진리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요한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바로 17절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연결 시켜 주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록하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그리고 왜 예수님은 일곱 촛대사이에 계시는지? 마지막으로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은 바로 지난주에 말씀드린 고난당하는 믿음의 성도들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적대적인 신앙과 로마제국의 잔인한 박해가 계속 믿음의 성도들에게 가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처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위로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며 그것만이 오직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여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단지 몇 마디 말씀으로 말해주고 떠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지상에서 성막과 성전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믿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핍박가운데 죽어가는 사도들과 성도들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믿음의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얼마나 고난과 핍박이 심했던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구원경륜을 이루시기 위해 하신 그 일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고 오직 그 일만이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유대교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 심판을 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요한에게 성부 하나님과 아들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신 시켜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지금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나타나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처음과 나중인 것처럼 아들도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9절에 하나님의 말씀, 즉 구약의 말씀과 예수를 증거하는 그 일로 요한이 먼저 밧모섬에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복음의 확신을 먼저 보여주십니다. 요한이 증거한 복음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고 하는 확신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는 그 말씀으로 믿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뿐만 아니라 요한이 기록한 이 계시록을 읽고 있는 믿음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신앙의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고난과 순교의 제물이 되는 상황에서도 잘못된 신앙의 길로 가지 않았다고 하는 구원의 확신 말입니다.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그 분은 바로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라고 하는 진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위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유대교의 하나님이 유대교를 지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하나님이 유대교를 심판하시고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신다고 하는 것을 요한에게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그 다음에 주님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 지금 네가 듣고 보는 것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시 일곱 교회에 이 계시록을 보내시는 것은 지상의 모든 자신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오늘날까지 이 계시록의 말씀은 모든 교회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당시 요한이 보낸 이 계시록을 받아 읽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아주 놀라운 복음이며 예수님께서 여전히 자신들의 눈에 보이시는 분으로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게 된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본 그 모습을 우리가 그림으로 그린다면 마치 괴물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13절-16절까지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정말 괴이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보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런 외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요한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요한이 알 수 있도록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대제사장의 모습입니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관을 쓰고 끌리는 에봇을 입고 그렇게 사역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는 그 사역에 수종드는 일꾼이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지금 요한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큰 그림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단어 하나에 의미를 부여 하는 것 보다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아버지와 같은 속성을 가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지? 그리고 지금 왜 요한에게 일곱 촛대 가운데 즉 일곱 교회 사이에서 대제사장의 모습으로 나타나 보여 주시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사역을 하는 유대교의 대제사장이 없습니다. 지상에 계셨던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여 없고 땅에는 단지 사도들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들도 하나하나 죽어가고 없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천상에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중보하여 준다고 하는 말을 해도 그렇게 큰 위로와 믿음과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대제사장이 있는 유대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유혹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얼마나 연약한지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정말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주님의 말씀으로만 지켜진다고 하면 얼마나 위대한 성도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저 자신도 때로는 낙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자기 자녀들을 위해 보여주신 것이 바로 세례와 성찬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우리는 과연 만족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갇혀있는 당시의 상황은 아주 힘든 상황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피로 세우신 교회들이 계속되는 유대교의 핍박과 로마제국의 탄압 속에서 든든하게 서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게 된 것입니다.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상황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자신의 교회들을 위해 주님은 천상에서 자신의 교회들을 위해 대제사장으로써 쉬지 않고 계속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약 성전에서 대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위해 헌신하였지만 그들의 사역은 불완전하여 계속 해년마다 반복되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단 번에 자신의 피로 그 모든 구약의 제사들을 다 완성시켰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지상에는 대제사장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아직도 피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예수의 피로 그 모든 피의 제사가 다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피를 믿는 것이면 됩니다. 더 이상 지상의 대제사장은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지금도 대제사장으로 성전에서 일을 하시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성전이 바로 지상에 있는 일곱 교회들입니다. 7은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완전 또는 모든 이라고 하는 상징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의 모든 교회들을 위해 지금도 대제사장으로 계속 일하시고 있습니다. 더 이상 지상에는 대제사장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아직도 눈에 보이는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 그림자만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껍데기만 가지고 마치 그것이 실체인양 동물의 피를 가지고 속죄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계속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당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피를 통해 이루시고 모든 이방 민족에게까지 복음을 통해 자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룬 속죄 사역을 유대인들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유대교를 심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보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마치 괴물처럼 그려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바로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보석과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여 영광스럽게 보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자체에서 나타나시는 영광의 찬란한 빛이십니다. 그러니 요한이 본 예수님의 영광을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그려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영광의 광채는 하나님의 광채와 동일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미 그 영광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왕좌에 앉아 계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를 보았는데, 그분의 옷이 눈과 같이 희고, 그 머리털이 양의 털과 같고, 그 보좌는 불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보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요1:14절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인 것입니다. 이 사실이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위로와 기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에만 하나님의 영광, 즉 임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모인 이 교회 안에 하나님의 영광인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교회를 통해 예배를 받으시고,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는 중요한 진리가 세워진 것입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성도 개개인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것이 교회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드립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신지식은 그야 말로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저주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살인하고 멸족시켜야 하는 이단으로 삼은 이유가 눈에 보이는 건물이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믿었고 성전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부인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모습으로 요한과 그의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지 충분히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왜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십니까? 이 이유도 다름 아닌 고난당하는 자신의 백성들과 교회들을 위해서입니다. 일곱 별은 그 교회의 사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를 다스리는 주의 종입니다. 여기에서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으로 섬깁니까?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오늘날처럼 목사들이 신학을 배워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지만 감독들이 즉, 사도들이나 사도들이 세운 감독들이 교회를 다스리고 섬긴 것입니다. 이것이 왜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말씀으로 주신 것입니까? 바로 복음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아직도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가르칩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고 있는 율법이 가르쳐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당하는 성도와 교회에서 가르쳐지는 것은 단지 교회의 사자인 감독들이 가르치는 복음 밖에 없습니다. 이 복음이 바로 진리이며 전부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교회의 사자들을 자신의 오른 손으로 붙잡고 있으니 아무리 고난당하는 성도들이라고 해도 그 사자들로부터 배우고 전해 받은 복음이야 말로 구원을 주며 영생을 주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와 기쁨이며 혹시 의심을 갖는 성도들에게 비록 고난과 핍박 가운데 있는 상황일지라도 다시 한 번 가르침을 받고 배운 믿음의 도에서 떠나지 말 것을 요한에게 직접 보여주신 계시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각 성도들의 예수에 대한 신앙은 전적으로 그 감독들의 설교와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그 감독들의 설교와 가르침은 과연 신뢰할 만 한 것입니까? 그들이 전한 복음은 믿을 만 한 것입니까? 성도들은 지금 그 복음 때문에 환난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 복음은 생명을 포기해도 좋을 만큼 신빙성이 있는 것입니까? 바로 이런 질문 속에서 주님은 일곱 교회에게 당신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들려 있는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가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당시 유대교는 분명하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비난하면서 그들이 예수 믿는 신앙을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오라고 회유했을 것입니다. 유대교는 정통이다. 우리는 성전도 있고, 대제사장도 있다. 모세가 준 율법도 있다. 그리고 로마로부터 신앙을 인정받아 자유롭게 종교생활도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직업도 가질 수 있으며 형제, 자매 친척들하고도 원수로 지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들이 가진 신앙의 근본이 무엇이며 그 신앙은 참된 것이냐? 라고 말하면서 성도들을 대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이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신앙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가지고 자신들이 가진 신앙이 진리라고 믿은 것입니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예수님 자신이 직접 교회의 사자들을 붙잡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들과 감독들이 전해 준 그 복음이 바로 신적인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로부터 들은 복음은 진리이며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진리위에 너희들이 서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오늘날도 이렇게 주님께서 자신의 교회의 사자들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믿는 자들이라고 하면 그들이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감독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속자이며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전했듯이 지금도 교회의 목사들이 해야 하는 일은 다름 아닌 감독들이 했던 복음 사역뿐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선지자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우십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목사들은 어느 터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목사는 오직 사도들의 가르침만 전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계시를 사도들에게만 주셨습니다. 사도들이 받은 계시를 감독들이 받고 주님의 교회를 세워 섬겼듯이 오늘날 목사들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목사가 전하는 설교가 신적인 권위가 있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바로 사도 들이 전해준 주님의 말씀만 전하고 가르칠 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한다고 해서 그 설교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만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 요한에게 자신은 하나님 아버지처럼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는 말씀과 자신의 교회를 위해, 유대교의 제사장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본채를 가지신 대제사장으로 나타나 보여주시며, 오른손에 교회의 사자들을 붙잡고 그들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신적 권위의 말씀이며 모세의 율법보다 더 위대하고 뛰어난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고난당하는 성도들이 이 예수님의 계시를 직접 듣는다면 얼마나 큰 용기와 담대함이 생기겠습니까? 이것을 위해 지금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자신을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대교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적하며 예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탄은 지혜로워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주님의 교회와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오늘 이 계시의 말씀이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진리를 혼탁하게 만든 이 세대 속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는 것을 믿고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서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205&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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