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생각(1)
- 지겨운 복음 앞에 -
예수님의 12제자를 자신있게 암송할 수 있는가?
전도사 시절 주일학교 학생들과 예수님의 12제자를 암송하도록 하려고 나름대로 랩(?)을 섞어서 가르친 적이 있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청년 대학생들에게 성경 개관을 강의하거나 설교할 기회가 있을 때, 가끔씩 ‘랩버전’(?)으로 예수님의 12제자를 암송하도록 가르쳤다.
그런데 어느날 이 암송을 하다보니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이 내 눈에 띄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 중 예수님의 12제자에 해당하는 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저자도 마찬가지이다.
마가복음은 성경을 조금만 공부해보면, ‘요한 마가’가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한’은 유대식 이름이고,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다(행 12:12절). 마치 ‘사울’이 유대식 이름이고, ‘바울’이 로마식 이름인 것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그는 예수님의 12제자에 해당하는가?
아니다. 다시 말해 그는 사도적 권위가 없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그는 바울과 1차 전도 여행에 참여하였다가 도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너무나 미성숙한 행동을 보였다(행 13:5;행 13:13절). 그런 자가 마가복음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배경은 요한마가에게 그리 유리한 반응으로 작용하지 못할 수 있다. 어쩌면 자칫 다른 성도들로 하여금 마가복음에 대한 신앙적 권위나 신뢰를 기대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사람이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이 군대 면제가 된 것이 알려지면 그 사건에 대한 진실 여부를 떠나서 표심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나와 같은 어려운 상황을 제대로 견디어보지도 못했던 자가 마치 나에게 뭔가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누구나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 가소롭고, 무시하고 싶을 것이다.
아마 당시 마가복음의 1차 수신자로 추정되는 이방 지역인 로마 출신의 기독교인들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요한 마가’에게 그러한 감정을 충분히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복음 때문에 세상(로마)의 권력으로부터 너무나 혹독한 압제를 받으며, 힘겹게 살아가야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요한 마가’는 같은 신앙인들에게는 어쩌면 세상 물정도 모르고, 유약해빠진 백면서생(白面書生) 같은 존재로 비춰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참으로 신비로운 사실이 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격 없을 것 같은 자를 통해서 마가복음을 기록하셨다는 것이다.
요한 마가에게 뭔가 대단한 능력이나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마가복음을 쓰도록 하신 이유를 인간적인 차원에서 쉽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요한마가에게 원인과 근거와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준이시다. 요한 마가의 입장에서는 그저 은혜이고, 감사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임을 고백할 뿐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마가복음 설교를 책으로 쓰고자 하는 이유이다. 나 역시 내세울 것이 없는 일개 개척 교회 목사에 불과한 존재이다. 그렇다고 규모가 큰 교회에서 분립되어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엄청난 인맥과 함께 뭔가를 치밀하게 계획하고서 지역 교회를 개척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장이 멈춘 정도가 아니라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다. 기독교 천만 명 시대는 이제 ‘추억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무슨 베짱(?)인지 감히 교회 개척 사역에 뛰어들었다. 내가 봐도 미친짓(?)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자본금도 없었다. 2009년 당시 나는 결혼도 안한 강도사 따위에 불과했다. 재정적으로나 인맥의 지원이 든든하지도 않았었다. ‘개척을 하여도 계속 유지가 될지’ 앞으로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개척 교회 담임으로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개척 교회 사역을 하면서 참으로 서럽기도 하였고, 외롭고 힘든 과정들도 많았다. 경제적으로나 개인 상황으로나 목회를 하는 환경 조건도 그리 녹록치 않았다. 앞으로의 목회 사역에 대해서 불투명해보였다. 아무것도 보장된게 없었다. 막연함! 그 자체였다. 지금도 물론 쉽지 않은 목회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설교자로서 누리는 기쁨이었다.
나 같이 보잘 것 없어 보이며, 자격 없는 자가 놀랍게도 매 주일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교회 개척 사역을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1장부터 마지막장까지 설교를 하였다.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 책이 바로 ‘마가복음’이었다. 너무나 큰 기쁨이었고, 감사의 제목이었다.
1년 안에 성도가 몇 배로 성장한 것도 아니고, 예배당을 화려하게 지은 것도 아닌데 나는 기뻤고, 감사했다. 큰 보람과 즐거움을 누렸다. 이런 것이 설교자로서의 기쁨이지 않을까 어렴풋하게나마 혼자서 속된 말로 ‘자뻑’(?)[‘스스로 잘난척’]을 취해본 적도 있었다.
그 이후 꽤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금 내가 설교했던 마가복음을 되돌아보았다. 나 스스로 은혜가 되는 설교 원고도 있었지만 대체로 부끄럽고, 다시 손을 보고 싶을 법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마가복음을 설교하면서 한 가지 느끼고 깨달은 것이 있었다.
아무리 목소리 높여 설교하고, 열심히 성경 공부를 하여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고, 여전히 어렵다는 것이다. 어쩌면 더 악화되는 것 같다. 뭔가 사람들의 오감각을 자극할만한 쌈빡한(?) 비법이나 대안책이 없어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포기할 수는 없다. 세상을 등질 수도 없다. 대충 살아갈 수도 없다. 우리는 알고 있다. 복음이 전부이다, 복음이 핵심이다, 복음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외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내 삶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남아있다. 눈물 흘리고, 소리 지른다고 세상과의 영적 싸움이 끝나는게 아니다.
물론 복음만이 전부이고 핵심이다. 그러나 그 복음을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하다.
복음을 내 삶에서 묵묵히 적용해 보았는가? 얼마나 힘든지 아는가?
복음의 삶은 너무나 힘들다. 괴롭다. 고독하다. 때로는 복음이 지겹다. 짜증날 정도로 지겹다. 재미없게 느껴진다.
십자가가 뭐 그리 좋겠는가? 죽는 게 좋겠는가? 손해보고 굴욕당하는게 좋은가?
목사이지만 나는 싫다. 복음의 삶이 싫다. 뭐가 그리 좋을까? 나는 손해보기 싫다. 굴욕당하기 싫다. 희생하기 싫고, 인내하기 싫다. 사람들 앞에 힘 있어보이고 싶고, 군림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대접받고 싶다. 높은 자로 제압하고, 쟁취하고 싶다.
그러나!
복음을 외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러한 나의 본능적 욕구를 전혀 채워주지 않는다.
복음 때문에 내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세상은 복음 앞에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복음을 조롱하며 우습게 여길 것이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복음을 버릴 것인가? 복음의 요청 앞에 모른 척할 것인가?
그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데 괴로울 것이다.
복음 증인의 삶은 힘들다. 그런데 복음을 외면한 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자 안간힘을 쓰는 삶은 더 괴롭고 힘들다.
도대체 어찌하라는 것인가?
응답해야 한다. 반응해야 한다.
세상을 군림하려는 목적으로서가 아니다. 높은 자로서가 아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제자로서, 낮은 자로서 응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아는 것, 복음을 토론하는 것, 복음을 가르치는 것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다른 대안은 없다. 다른 곳으로 눈 돌려봤자 소용없다. 답은 없다.
단 한 가지, 답이 있다. 아주 분명하고 단순하다.
그냥 내가 있는 삶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숨을 잃는 죽음도 순교이지만 복음 때문에 내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 역시 결코 만만치 않은 순교이다. 그러한 삶으로 죽어가는 것. 그것이 답이다. 복음 때문에 죽어가면서도 묵묵히 견디며, 살아내는 삶. 그것이 막막한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 앞에 응답하는 분명한 답이고, 삶이다.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복음이 재미없고, 지겨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 가운데 세상을 향해 정면승부 해야 한다.
힘과 권세로 세상을 제압하자는 것이 아니다.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지듯 묵묵히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한 마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복음의 반전이요, 복음의 능력이다.
어쩌면 너무나 지겹도록 듣는 복음일 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못들은 척, 모르는 척, 무감각하게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응답하자. 반응하자. 성급하지 말고, 자존심 세우지 말고, 자책하지 말고, 자기 감정 앞세우지 말고 응답하자. 낮은 자로서 겸손히 차분히 반응하자. 복음을 시작하신 분, 나에게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은 나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자를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며, 나의 믿음도 완성하실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만이 아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성경이 지식으로 머물지 않으려면, 역사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을 읽어내되 오늘의 우리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재설정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한 고민을 이 글을 통해서 시도해보고자 하였다.
복음은 결코 지겨운 것이 아니다. 지겨워보일 뿐이고, 지겹게 느껴질 뿐이다.
복음은 오늘날에도 우리로 하여금 반응하도록 요청한다. 복음은 단순히 목소리 높여 외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복음은 살아내는 것이다. 지겨울 것 같은 복음 앞에 반응한다는 것은 내가 처한 이 세상을 정면으로 부딪혀가야 하는 오랜 기간의 싸움을 의미한다.
어쩌면 막연하고, 답답한 삶이 나에게 지속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도 너무 힘들고 고될 수 있다. 수없이 갈등하며, 거룩한 신음을 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삶의 연속선상에 있다.
답이 없는 듯한 삶의 현실일지라도 여전히 묵묵히 복음 증인으로서 반응하며, 살아내고자 애쓰는 무명의 진실한 성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전이 되고,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출처] 마가복음 생각(1) - 지겨운 복음 앞에!!!|작성자 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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