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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0:31-33, 무엇을 하든지...

구원론

by 김경호 진실 2017. 4. 3.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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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0:31-33, 무엇을 하든지...
오성환 목사(이야기가 있는 교회, 세움성경신학연구원 원장)
   
1. ‘구원받았다는 말은 여러 가지 이미지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이미지이신칭의(以信稱義)’이다. ,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구원에 대한 이미지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 즉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인해 법정적으로 죄 없음이 선포되었다는 의미이다. 구원에 대한 이런 법정적인 이해는 우리가 가진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임에 틀림없다. 또 다른 구원에 대한 이미지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얻었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이사야1:18)라고 이야기하신다.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없다고 절망하는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스스로 문제 있음을 알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배회하는 자들이었던 우리가 왕의 강권으로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고(마태복음22:1-10), 집 나간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할 때, 아들보다 먼저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아들에게 뛰어가 아들을 영접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이사야1:18에서 우리는 읽는다. 이렇게 안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울은하나님의 은혜(에베소서2:8)’라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2.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하여 설명한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역사(history)를 만들어 가시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의 역사(history)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며 만왕의 왕으로, 그리고 하늘 아래와 땅 위에서 역사(work)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엘리야는 바알의 제사장들과 갈멜산에서 대결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열왕기상18:36-37)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른채 바알과 하나님 사이를 절둑거리며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달라는 기도였고,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 응답하심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다. 신약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음을 이야기한다. 복음서의 주된 내용이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답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가는 복음서를 쓰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가복음1:1)이라는 말로 시적하여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가복음15:39)라는 말로 예수님의 생애를 마무리한다. 마가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답한다. 성경은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심을 드러낸다.

 

 

3. 구원은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백성 삼으시는 하나님의 행위의 결과이다. 그래서 구원의 출발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사랑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로마서8:39)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구원은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고, 결코 그 끝을 알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구원은 끝이 없는 신비함이기도 하다. 나를 불러 구원해주신 것도 신기한 일이고, 너를 불러 구원해주신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더욱 신기한 것은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것이다. 우리같은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만드시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만드신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이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의 이런 놀라운 신비를 체험한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 아니 떠나서는 안된다.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 때 그 과정이나 삶의 일부분이 어찌되었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신약의 히브리서는 이런 납득되지 않는 움직임에 대하여 그러지 말라는 권고를 히브리서를 쓴 저자의 공동체에게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권고의 바탕은 역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고, 그 구원의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4. 구원에 대한 이신칭의(以信稱義)’적인 생각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된 설명이고, 이런 이미지를 바탕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고린도전서15:10)라는 고백이 가능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산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감당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규제하는 원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모든 믿는 자의 삶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31)살아감으로 하나님 사랑이 나타나며,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32-33)하는 이웃 사랑이 드러나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의 이런 생각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12:29-31)라는 주님의 말씀과 일치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랑행위이고,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의 삶의 윤리적 바탕은 사랑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우리 이야기가 있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자.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266&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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