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에게 영광과 존귀를... (계5:1-14) | |||
임진남 목사(예본교회, 한국개혁신학연구원) | |||
보통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관심을 가지는데 그 관심이란 어떤 알 수 없는 것들에 상당히 호기심을 가집니다. 특히 계시록을 읽을 때면 이러한 호기심은 더더욱 크게 발동합니다. 지금 우리들의 관심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 보다는 이 두루마리를 열어 볼 수 있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계시록 5장은 이것을 위해 우리에게 기록된 것입니다. 누가 이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라고 하는 이 말씀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4장과 계속해서 연결된 말씀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올라가서 보고 있는 곳이 하나님이 계신 천상입니다. 그곳에서 사도 요한은 수만의 천사와 24장로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 성전입니다. 하늘 성전에 있는 24장로들을 통해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도 구원하셨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이것을 기록하면서 고난 받고 순교의 직전에 놓여 있는 성도들에게 아주 큰 용기를 주고 구원의 기쁨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요한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 말해 줍니다. 먼저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보았는데 그 두루마리는 안과 밖으로 섰고 일곱 인으로 봉하여 졌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한이 보좌에 앉으신 분의 손에 두루마리가 들려져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시는 말씀 한마디도 중요하다면 하나님의 오른 손에 들린 이 두루마리는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을 보면 양면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과거에는 종이가 없고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글을 써서 문서를 보존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양면에 내용을 기록할 수 없습니다. 안쪽에만 내용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두루마리의 안팎에 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 지금 요한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십계명의 말씀이 기록된 돌 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십계명이 두 개의 돌 판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경을 자세하게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돌 판에 기록하여 주실 때 돌 판의 안팎에 계명을 다 기록하여 주셨고, 언약이기 때문에 당사자가 서로 같은 내용의 돌 판을 가져야 하므로 십계명의 돌 판을 두 개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출32:15을 보면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앙면 이편저편에 글자가 있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요한이 십계명의 돌 판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루마리 안팎에 기록된 책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돌 판이 아니라 분명 둘둘 말리는 것에 양면으로 기록된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인데 그 의미가 바로 십계명에 대한 묘사라고 하는 것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요한이 보고 있는 두루마리, 그것도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는 이 두루마리는 다름 아닌 언약의 내용이 담겨 있는 문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상에서 오직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만 하늘 성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도 함께 하늘 성전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약 이 언약의 두루마리가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다면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선택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으로만 계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두루마리를 본 것이 아니라 하늘 성전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 언약의 두루마리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과 언약을 맺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이 언약이 누구 때문에 맺어진 것입니까? 당연히 어린양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이며 우리가 새 언약 백성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려고 하십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을 때 하나라도 숨김없이 다 알리시고 그 언약에 순종할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손에 들린 이 두루마리는 비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안팎에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비밀문서라고 하면 반드시 안쪽에만 기록되어 있고 누구도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둘둘 말아 봉인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 이 두루마리를 요한에게 보여주시고 있는지? 그리고 일곱 인으로 봉인 된, 그 누구도 봉인 된 이 두루마리를 열어 볼 수 없는데 오직 어린 양 만이 이 두루마리를 열어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들어야할 복음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보다는 비밀스러운 책이나 말들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사실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이 무엇인지? 이것이 비밀이라고 하면서 성도들을 미혹하게 하는 이단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그리고 계10:2을 보면 “펴 놓은 작은 두루마리” 라고 하는 것에 또한 관심을 가집니다. 마치 무엇인가 새로운 계시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것을 충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자신의 영으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계시가 없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계시록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려고 한다면, 그리고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에 대하여 정말 알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구약 성경을 더 바르게 읽고 해석할 수 있으면 그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을 아주 싶게 알게 될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풀이하지 말고 이미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배우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루마리 안팎에 기록된 내용은 무엇인지 궁금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안과 밖으로 쓰인 책들에 대한 말씀이 두 번 나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계명이 안과 밖으로 쓰여져 있고 그 다음에는 선지자 에스겔에게 주어진 두루마리 책이 안팎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겔2:9-10). 계명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 언약에 대하여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하는 것을 두루마리 책으로 기록하여 백성들에게 알렸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사도 요한이 보고 있는 두루마리 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다름 아닌 옛 언약 백성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봉인 된 책을 열어서 이스라엘을 향한 언약의 심판을 시작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이 책을 열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요한은 이 책을 열자가 없다는 것을 보고 크게 울었습니다. 구약에 그렇게 위대한 인물들조차도 이 책을 열어 보지 못한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이 심판의 책을 열어 볼 수 있겠습니까? 이 책을 열어 볼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 누구도 중보자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울었던 것입니다. 아담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그리고 다윗조차도 중보자로 나서서 이 책을 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어떻게 됩니까? 지금 지상에서 유대교와 로마정부로부터 핍박과 환난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를 바라보고 의지해야 합니까? 누가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까? 지상에서 사도들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심판의 주로 오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믿는 자녀들을 돌보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오직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 책, 언약의 심판이 들어 있는 이 책을 열자가 없다는 것을 보고 크게 울었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믿고 있었던 그 신앙이 무너지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여긴 것입니다. 아무도 죄 용서와 죽음과 사망을 옮길 만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로 중의 한 사람이 요한에게 울지 말라고 말해 줍니다. 왜냐하면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기 때문에 울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장로 중의 한 사람이 사도 요한에게 구약성경에서 기록된 내용을 가지고 사도 요한을 위로하여 주고 있습니다. 5절의 말씀은 창49장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과정에서 유다에게 축복을 하는데 유다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겼다고 하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 말을 들은 사도 요한은 금방이라도 쉽게 알아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가 다윗의 뿌리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입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로 오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이십니다. 예수님은 혈통적으로 다윗의 후손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보다 앞서서 계셨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시간적으로 해석합니다. 과거에 일어난 시간이 흘러 현재에 이르고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과거의 역사 가운데 일어났던 일들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새와 다윗을 주셨고, 이들을 통해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장로가 한 이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요한은 이 두루마리의 인을 떼실 분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이 두루마리를 떼시기에 합당한 분이라고 하는 것을 안 것입니다. 요한은 두루마리의 인을 떼실 분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믿고 있었던 신앙과 지상의 교회들이 가진 신앙,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신앙이 참되고 위대한 은혜임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유대교는 계속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이단들이라고 매도하면서 로마정부로부터 핍박과 환난을 가하게 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의 언약을 배반하고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사람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요한은 천상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심판을 받을 자들이 누구로부터 그 심판을 받을 것인지 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옛 언약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하시기 위해 봉인된 두루마리 책을 떼시기에 합당한 분이라고 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위대하게 여기고 있었던 모세나 다윗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루마리를 펴시고 그 인을 떼시며 심판의 주로 나타나실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어린양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통 우리들은 어린양이라고 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런 존재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천상에서 여전히 어린양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신격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요한이 보고 있는 어린양은 사람들 앞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지상에서 유대인들과 빌라도에 의해 죽은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일곱 뿔과 일곱 눈, 그리고 하나님의 일곱 영이 온 땅에 가득합니다. 요한이 보고 있는 어린양께서 두루마리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천사들과 모든 구원 받은 성도들이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새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어린 양이 무엇 이 길래 천상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그 앞에 엎드려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까? 모든 피조물들이 찬양을 드려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린 양에게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기도들이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엎드려 경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동일하게 받으신다고 하는 진리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아들은 성령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는 그 영광과 권능과 능력이 동등하십니다. 성도는 자신의 기도들을 가지고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로 나가야 합니다.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아니라 성도의 기도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압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여전히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가장 훌륭한 길입니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새 노래와 기도가 담긴 금 대접을 보여준 것은 지상에 있는 성도들을 계속 해서 위로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새 노래는 어떤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는 자신들이 성전에서 부르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오직 유일신 하나님만을 위해 부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을 찬양하는 그 신앙을 경멸합니다. 왜냐하면 노래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해 불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아들에게 영광을 돌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노래를 부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드립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저주 받은 인간에게 기도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우상에게 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유대교의 눈으로 볼 때 기독교는 우상종교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천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행한 모든 신앙의 모습들이 참되다고 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천사들이 어린 양 앞에서 큰 음성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그리고 온 우주 만물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어린 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자세하게 보면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에게 동등한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린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노래입니다. 새 노래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이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받으시는 노래 그 노래가 바로 새 노래입니다. 어린 양께서 일찍 피를 흘려 죽으셨다고 하는 그 순종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새 노래로 삼위일체 한 분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돌려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 노래는 구약 말씀에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그 앞에 불러지는 전주곡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새 노래를 아버지와 어린 양에게 부르고 있다는 것은 곧 심판이 임박했다고 하는 징조입니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의도적으로 새 노래와 성도의 기도들이 담긴 금 대접을 보여주신 것은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는 어린 양을 의지하고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제는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과 동물의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올 수 없고 일찍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어린 양께서 흘리신 그 피의 제사만이 유일하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목적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하는 이 통치를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는 두루마리 책에 무엇이, 어떤 내용이 기록되었는지에 대한 관심을 갖기 이전에 이 책을 펴시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다 아시고 자신의 교회와 백성들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돌보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경배를 받고 계시다고 하는 진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이고 진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전히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은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아들이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영광을 받으신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심판을 받는 아주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이것 때문에 교회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배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났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 천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주 자세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의 주권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아주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난과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이것을 읽는다면 가장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거짓 신앙입니다. 이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현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들의 마음과 입술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를 찬양하는 새 노래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새 노래로 하나님께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과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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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314&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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