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심판을 통해 신실하심을 나타내신다(계6:1-17) | |
임진남 목사(예본교회, 한국개혁신학연구원) | |
사도 요한은 두루마리 책을 열어 볼 자가 없다는 것을 보고 크게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린양이 그 책을 받으시고 열어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만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양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동일한 찬송과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세세토록 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 책을 어린양이 하나씩 떼는 것을 봅니다. 첫 번째 인부터 일곱 번째 인을 떼는 것을 보는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여섯 번째 인을 떼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된 것을 본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말씀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할 때 사용한 상징적인 말씀들을 거의 다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요한이 보고 있는 이 상징적인 모습들은 결코 어려운 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네 마리 말들을 탄 메시지를 보내신 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하박국 선지자에게도 동일하게 말들을 타고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고 하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말 탄자들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나오는 전쟁과 기근과 온역과 지진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심판을 당할 것이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말씀들과 같은 것입니다(마24장). 그러므로 네 말들을 타고 나오는 자들에 대하여 우리는 그렇게 어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번 사용하셨던 말씀들이었습니다. 비록 우리는 어렵게 느낄 수가 있지만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상징들은 쉬운 언어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간단하게 네 마리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너무 깊게 그리고 너무 상징적인 이 말들과 말 탄자들에 대하여 의미를 더하는 바람에 말씀을 왜곡하는데 그렇게 설교를 하면 듣는 성도들은 말씀전체가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를 잊어버리고 지루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상징적인 것은 간단하게 전하려고 합니다. 요한이 본 흰 말을 탄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한다고 하는 이 말씀은 시편45편에 나오는 말씀과 유사합니다.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을 타시고 이기신 분으로 노래하는 것입니다. 활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반역한 인간에게 더 이상 심판을 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언약의 약속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노아시대 때 무지개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활을 가지고 자신의 언약을 배반한 사람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시고 있는 것입니다. 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쟁을 하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판을 의미하는데 이미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신다고 하는 말씀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시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요한이 보고 있는 것은 옛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심판이 곧 임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었던 로마제국에 대한 심판도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말 탄자는 항상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민족들을 심판하는 힘을 가진 자를 상징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배반하고 신령한 은혜를 맛보고도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을 향해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포도원지기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많은 선지자들, 즉 종들을 보냈지만 사람들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들마저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들을 더 이상 용서하시지 않는다고 하신 그 비유의 말씀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옛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러 말을 타고 오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인을 떼시자 붉은 말을 탄자가 오면서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죽이도록 선동하시분 분이 아닙니다. 단지 화평을 제거하여 버립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죄로 인해 패역한 인간들이 서로 죽이고 죽이지 않고, 전쟁을 하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은 인간들이 선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뿌리부터 악합니다. 처음부터 살인자가 바로 인간들의 아비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실정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북한이 남한을 향해 핵 공격을 진행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미국이 우리나라를 지켜 준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나라 스스로 자주국방이 어느 정도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아직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이 미국의 힘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이 악한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통제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피를 흘리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화평을 제하여 버리신다면 인간은 당장이라도 서로 죽이고 죽이는 무서운 전쟁을 할 것입니다. 붉은 말을 탄자가 나와서 인간들 사이에 있는 화평을 제하여 버리면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상징대로 로마가 이스라엘을 정복하는 전쟁으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고 죽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세 번째 인을 떼자 “검은 말” 탄자가 손에 저울을 가지고 와서 “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4장)에서 저울은 기근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지금 계시록에서도 한 손에 저울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곧 기근이 일어난다고 하는 심판의 상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자신의 자녀들, 죽은 시체를 먹었다고 합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밀의 가격이 이전 가격보다 1,000배나 비싸졌습니다. 곧 있으면 이스라엘 전역에 기근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세기에 그 일이 이스라엘에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심판의 상징적인 말씀은 요한시대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과 미래에도 언제나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날에도 기근으로 인해 하루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기근으로 죽는 이 일은 그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저주의 심판은 감람유와 포도주에는 영향이 없습니다. 검은 말을 탄자가 그것에 손을 대는 것을 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들에게 심판이 임하지 않는 다고 하는 상징적인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종종 의인들이 받을 복을 기름과 포도주라는 용어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믿는 의인들을 보호하여 주신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검은 말을 탄자는 큰 칼로 옛 언약 백성들,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죽일 것입니다. 이제 네 번째 인을 떼자 사망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청황색 말”을 탄자가 나와서 땅의 사분의 일을 죽일 권세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 죽일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죽일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 백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고, 로마 군인들의 손에 이끌려 노예로 팔려 갔으며, 도망가다가 사나운 짐승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흰말을 타고 오는 분으로부터 어떻게 계속 심판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는지 보고 있습니다. 네 마리 말들이 상징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곧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동일하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따로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사건, 즉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대체로 용서에 대한 신앙적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서도 서로 용서하여 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흘린 피에 대한 복수를 반드시 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9-1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는 것을 요한이 보았습니다. 다섯 번째 인을 떼고 그 내용을 보니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의 억울함을 반드시 풀어주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용서는 하나님의 복수를 전제로 하는 용서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수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 이상 짐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생명에는 생명으로 복수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것을 신원이라고 합니다.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형제끼리 일어나는 억울한 일에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피해를 입힌 자는 반드시 그 보상을 해야 합니다. 말보다 더 싼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하여 함부로 해를 입힙니다. 그러나 값싼 말로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혹 자신 때문에 상대방이 손해를 입으면 갚아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성도간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불신자들에게 해를 당하는 것을 모른 체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 자리에서 생명도 빼앗기지만 그들이 흘린 그 피가 제단에 고여 있는 것을 보시고 반드시 갚아주시는 분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자신의 구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그 신앙고백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었습니다. 가족 간에 생이별을 하고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는 것을 보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는 것을 보고 애통하였습니다. 제단 아래에서 죽은 자들이 있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 피를 흘리게 한 자들이 바로 제사장들이라고 하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 의해 죽은 자신의 백성들의 원수를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고 조금 있다가 그 신원하시는 복수를 하여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직 순교자들의 수가 차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믿음의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님께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저주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많은 저주들이 나옵니다. 바른 믿음과 신앙을 가진 자는 저주가 믿지 않는 자들의 것이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믿는 자들도 저주를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대적한 알렉산더를 향해 저주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을 저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교개혁당시 많은 위대한 조상들이 거짓 교사들과 교황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고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칼빈의 목회 기도를 보면 기도 가운데 악인들과 위선자들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지기를 기도했다는 것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 목사가 복음을 왜곡하고 거짓으로 산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저주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저주가 내려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주가 내려지기를 기도하기 전에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실로 권면이 앞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저주하면 안 된다고 하는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있습니다. 저주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저주 받을 짓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성도는 세상을 향한 저주와 하나님에 대한 신원을 호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진짜 찬송인 시편 찬송을 계속해서 부른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해져야 한다는 노래도 부를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안타깝게도 우리는 시편 찬송을 계속 부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악과 죄에 대항하여 우리의 입으로 저주를 한다면 우리는 좀 더 거룩한 신앙으로 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입으로 그런 죄를 짓는 것을 향해 저주한다면 내 자신은 그 죄를 짓지 않게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합당한 저주는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네로황제 아래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믿는 신앙을 거부하지 않는 것 때문에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로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자신들의 피를 신원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이 간청은 바로 이루어졌습니다. 로마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유대인들을 죽일 때 모든 제사장들을 다 죽였습니다. 네로도 죽었고, 모든 위선자들과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계속해서 요한은 여섯 번째 인이 떼어질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에 대한 파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이 파괴가 1세기 시대에 로마제국과 주변의 모든 지역들에 대한 심판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시대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자신의 창조역사를 하셨던 그 모습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지와 해, 달, 별, 궁창, 땅, 사람, 창조 당시 사용하였던 용어들이 파괴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큰 지진이 날 것이고, 태양이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질 것이고, 달은 온통 피같이 될 것이고, 다시 말해 일식과 월식이 계속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 결국 사라진다고 하는 것을 상징하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또한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진다고 하는 말씀도 이스라엘과 이방의 나라들이 심판을 당한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말려진다고 하는 14절의 말씀은 핵전쟁으로 세상이 파괴된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늘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말로 이스라엘이 심판을 당한다고 하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요한이 여섯 번째 인이 떼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결국 옛 피조물인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음으로 사라질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인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가 새 창조의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과 주변 이방나라에 나타날 때 각 나라의 권세자들과 사람들은 굴과 바위틈에 숨어서 하나님의 심판과 어린 양의 진노에서 벗어나기를 애원할 것입니다. 요한이 이것을 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심판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칼리쿨라 황제와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엄청난 지진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일입니다. 특히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로마 전역에 큰 지진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레데, 서머나, 밀레도, 키오스, 사모스 등지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 거의 모든 건물들이 다 파괴 되었다고 역사가들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네로가 즉위하는 그 날에도 지진이 발생하였고 A.D. 60년에는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 그리고 골로새에서도 지진이 발생하여 거의 붕괴되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아시아와 아가야 지방의 도시들은 어찌하여 그렇게 자주 단 한 번의 치명적인 충격으로 쓰러져 버리는지! 또 수리아 지방에서는 얼마나 많은 성들이 무너져 버렸는지! 그리고 마게도냐 에서는 얼마나 많은 도시들이 무너져 내렸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폼페이는 A.D. 63년에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는 그 시대에 유대 지방에도 상당한 큰 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과 건물들이 다 죽고 폐허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큰 지진이 일어날 때 하늘에서는 계속 번개가치고 해와 달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자 어떤 멸망과 심판이 사람들에게 임하고 있다고 그렇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심판이 일어날 때 그 어떤 권세자들과 장군들이 이것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러한 심판이 일어나지 않게 다만 하늘을 보고 애원하였던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역사적으로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과 그 아들을 믿은 성도들을 죽인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의 피를 그냥 보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한이 어린양께서 두루마리의 인을 떼는 그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인까지 떼는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어린 양의 진노는 아주 정확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성도들이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언약은 불변하다고 하는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에 불순종한 사람들에게 심판을 베푸신다고 하는 그 신실하심이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누가 언약의 백성들입니까? 더 이상 유대인들이 언약의 백성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환난과 핍박과 죽음 앞에 놓여 순교의 제물이 되어가고 있지만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구원 받은 자녀들이라고 하는 것을 기쁨으로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지체 없이 이루어 겼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지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이의 말처럼 더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곧 오실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것만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나타나는 것이 곧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라고 하는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언제나 오셔서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
임진남 목사는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이 있다.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326&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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