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개혁자들의 활발한 연대와 상호 영향은 짧은 시간 유럽서 종교개혁 확산과 성공 이끌어
“중세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불안’으로 정리할 수 있다. 유럽 대륙은 수백년에 걸친 전쟁으로 피폐했고, 공포의 질병이었던 흑사병의 창궐, 오스만투르크에 의한 동로마제국 멸망과 이슬람 침공에 대한 불안함, 그리고 교황의 아비뇽 유수와 분열로 인한 영적 공황상태. 로마가톨릭은 이런 불안함과 영적 필요를 채워줄 수 없었다. 로마가톨릭은 성경으로부터 괴리됐고, 복음의 본질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성경의 재발견,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 회복이어야만 했다.”(총신대 안인섭 교수)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논제>로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리기 전, 프랑스 리옹 출신 피터 왈도는 1170년부터 4복음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왈도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청빈을 강조하며 성경의 말씀을 전했고, 사람들은 로마가톨릭의 부패와 구별되는 그를 추종했다. ‘리옹의 빈자들’(왈도파)이라고 불린 이들은 로마가톨릭에게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1382년 영어 성경을 완간한 영국의 개혁자 위클리프는 사후 그의 개혁정신을 두려워한 로마가톨릭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졌다.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얀 후스 역시 자국어로 성경 번역에 공을 들이며 로마가톨릭 비판과 교회개혁을 주창하다가 화형대에서 순교했다. 후스는 <교회론>에서 성경 말씀대로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죄사함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고, 교황을 비롯해 누구도 성경에 어긋나는 교리를 선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런 성경에 바탕을 둔 인식 아래에서 로마가톨릭의 미신적인 미사와 성지순례를 비판했다.
‘성경’은 교회 개혁의 시작이었고 완성이었다.
개혁의 핵심 “성경만으로 충분하다”
물론 당시 로마가톨릭도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절대적 진실성을 믿었다. 하지만 로마가톨릭은 성경만으로 불충분하고 교회의 교훈과 전통이 더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지만, 그 성경은 교회의 전통 속에서 만들어진 불완전한 것이었다. 결국 성경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이 있으며, 그 부족함을 로마가톨릭 교회의 교훈과 전통으로 보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만이 무오하고 최종적인 권위”가 있으며, 성경을 ‘모든 사람의 견해와 교회의 신조와 전통에 대한 결정적 규범’으로 명확히 규정했다.
“루터는 성경을 바탕으로 오직 믿음의 이신칭의 교리를 세웠으며, 만인제사장론을 통해 로마가톨릭의 사제주의를 붕괴시킨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루터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설교로 강론하면서 사람들이 변화를 일으켰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 발명된 금속활자를 통해 진리를 문서로 배포함으로 루터를 종교개혁의 시초로 여기게 했다.”(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 서창원 원장)
▲ 제네바 ‘종교개혁자의 벽’에 조성된 기욤 파렐, 요한 칼빈, 테오도르 베자 그리고 낙스 등 4명의 석상. 석벽에 ‘Post tenebras Lux’(어둠 이후 빛)이 새겨져 있다. |
연대를 통해 확산되는 종교개혁
루터 이전에도 성경을 중심에 둔 중요한 교회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학자들은 당시 사회적 경제적 국제적 과학기술의 요소까지 점검하면서, 이전 개혁운동과 달리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안인섭 교수는 교회사적으로 살펴볼 때, “동시대 개혁자들의 활발한 연대”를 종교개혁 성공의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위클리프는 추종자들이 많았지만 그 영향력이 영국 내에 한정됐다. 후스 역시 자국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지만 홀로 개혁의 깃발을 들어야만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개혁은 같은 신념을 가진 이들의 연대를 통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안인섭 교수의 지적처럼, 루터는 혼자가 아니었다. 루터의 동료이자 함께 독일의 종교개혁을 일군 필립 멜랑히톤(1497~1560)을 비롯해 안드레아스 폰 칼슈타트 등과 함께 했다. 메랑히톤은 개신교 최초의 조직신학서를 출간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독일의 종교개혁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하이델베르크신조>를 작성한 자카리아 우르시누스와 카스파 올레비아누스이다. 우르시누스(1534~1583)는 루터의 비텐베르크대학에서 공부한 후, 제네바의 칼빈과 교류를 했다. 우르시누스는 하이델베르크신조를 작성하고 독일 교회의 지도자로 개혁을 이어나갔다. 카스파 올레비아누스는 독일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했지만, 프랑스에서 출생했다. 그는 제네바에서 칼빈과 베자에게 공부를 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교회를 조직하며 우르시누스와 함께 독일 개혁교회를 이끌었다.
이처럼 1517년 이후 종교개혁자들은 이전의 개혁자들과 달리 ‘교류와 연대’ 속에서 교회 개혁을 추구했다.
들불처럼 유럽을 휩쓰는 교회개혁
아래 <초기 종교개혁 연표>를 보면, 루터의 동시대에 유럽 각 지역에서 종교개혁자들이 얼마나 많이 탄생했는지 알 수 있다. 루터보다 1년 앞서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요한 오이콜람파디우스가 1482년 태어났고, 루터(1483)에 이어 츠빙글리(1494), 기욤 파렐(1489) 마르틴 부써(1491) 윌리엄 틴델(1494) 하인리히 불링거(1504) 그리고 저 유명한 존 칼빈이 1509년에 탄생했다.
오늘날 장로교회를 태동시킨 존 낙스(1514)와 칼빈의 후계자 베오도르 베자(1519)까지, 유럽 전역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핵심 인물들이 불과 한 세대 동안 탄생했다. 이들은 하나가 되지는 못했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가능한한 연대했다.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츠빙글리가 신학적으로 루터와 얼마나 교류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츠빙글리와 사역했던 오에콜람파디우스는 루터와 멜랑히톤에게 영향을 받았고 바젤에서 종교개혁을 진행했다. 기욤 파렐은 프랑스 출신으로, 베른과 제네바에서 사역하면서 칼빈과 동역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스트라스부르크 개혁을 주도한 마르틴 부써는 루터와 칼빈의 영향을 받고 이후 영국 캠브리지대학에서 개혁사상을 이어나갔다.
스위스에서 불링거와 베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종교개혁자이다. 불링거는 루터 멜랑히톤에게 영향을 받았고 츠빙글리의 후계자로 제1, 2차 신앙고백문 작성에 기여했다. 칼빈의 후계자로 제네바 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한 베자는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어나가는 것은 물론 이후 프랑스 위그노를 지원하며 가톨릭의 압박 속에서 프랑스 개혁운동의 맥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했다.
샛별 이후 200년, 루터 이후 20년
‘종교개혁의 샛별’로 불리는 위클리프 이후 200년이 지나지 않아, 루터의 <95개조 논제> 이후 20년 만에 교회의 개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이후 루터를 중심으로 한 개혁교회는 독일을 비롯해 스웨덴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등 북유럽 지역에서 자리를 잡았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발발한 칼빈의 영향은 프랑스 개혁자들을 지원하면서, 바다를 건너 스코틀랜드에서 꽃을 피웠다.
1553년 제네바에서 칼빈을 만난 존 낙스는 1559년 개혁교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여느 종교개혁자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교회개혁을 추진할 때, 낙스는 스코틀랜드 국가 전체를 성경 위에 세우고자 노력했다.
“종교개혁가 낙스의 위대한 점은 국가를 변혁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를 장로회 정치 유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낙스의 중심은 2가지, 오직성경과 그리스도의 왕권이었다. 성경과 어긋나는 것은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성경 중심, 세상권력이 교회의 머리를 주장할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 이것이 낙스의 종교개혁 원칙이었고 오늘 우리에게 이어져 온 장로교회의 원칙이다.”(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 서창원 원장)
초기 종교개혁 연표 |
특별기획팀 ekd@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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