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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신사참배

교회사

by 김경호 진실 2016. 12. 2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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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신사참배

최재건 교수(연세대 한국기독교연구소)

지난 12월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제3간담회 실에서 열린 "독립운동가 인준 청원을 위한 항일 기독교인들 재조명 학술 토론회"에서 최재건 교수가 본 논문을 발제하고 있다.

목차

들어가는 말

1. 신사참배 강요

1) 일본의 신도, 신사, 신사참배

2) 일본의 한국 내 신사 보급

3) 일본의 한국 내 신사참배 강요

2. 신사참배 강요와 선교사들 및 한국교회의 대응

1) 선교사들의 대응

2) 한국교회의 대응

3. 신사참배 반대운동

1) 반대운동과 그 방법

2) 반대의 이유

나가는 말


본고는 한국교회의 130년 사상 가장 큰 박해였던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다시 살펴보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와 신도, 식민지 한국과 제국주의 일본, 신학적 입장에 따라 찬반의 이유가 얽히고설킨 데다 그 본질에 대한 이해가 상반되고 그 결정과정이 모순되고 후속처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교단 분열과 신학교 분열 등 수많은 후유증을 낳았고, 이런 문제들이 아직도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어 특정한 계기만 생기면 되면 다시 떠오르곤 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모임도 그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6.25동란 전에 한상동 목사의 부흥사경회에서 일제에 의해 고난당한 일들과 6.25동란 중에 벽안의 한부선(Bruce Hunt) 선교사로부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당해 수난당한 일화를 듣고 나서 그 이야기가 한평생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그 후로도 한상동, 황철도, 손명복, 이인재 등 신사참배 반대자들의 투쟁 간증이 담긴 설교를 많이 들었다. 그런 연유로 연세대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의 첫 석사논문에서도, 토론토대학 임마누엘 신학교와 예일대 신학부의 석사학위 논문에서도 신사참배 문제를 다루었다. 공교회가 어떻게 대다수 교인들로 하여금 이교적인 요소를 따르게 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을까? 해방 후 강압하고 회유하는 세력도 더 이상 없었는데 총회는 왜 교회가 신사참배를 했던 것을 다 같이 회개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축출했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반세기가 넘도록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하였다. 그동안 이 주제로 국내외에서 다수의 박사논문과 학술논문과 단행본들이 출간 되었다. 그러나 발제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이 질문 앞에서 영문 저널에 영문 논문 한 편을 낸 것 외에 이렇다 할 저작을 발표하지 않고 뚜렷한 이론과 문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 사실로 인해 자괴감을 품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시점에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최근에 신사참배에 항거한 자들이 더러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공자가 된 이들이나 그렇지 못한 이들이나 다 같이 한국인과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반대했는데 무슨 평가기준에서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더 보태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발제문은 신사참배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기보다는 그것이 강요되었을 당시의 정황과 그 문제의 본질을 살펴보고 한국교회가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되새겨 볼 필요성에 부응하려는 입장에서 정리한 글이다. 이 글은 신사참배는 일본의 전통종교에 대한 예배행위로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인을 황민화 하기 위한 목적에서 강요된 것이었다는 점을 거듭 확인한다. 일부 기독교인들의 신사참배 반대도 기독교의 계명을 따른 것이지만 한국인으로의 항일의 표시를 결합시킨 것이라는 점도 변함없는 확인한다. 이런 점들에서 필자가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과 현재의 생각에 차이가 없어 전부터 주장해온 신사참배 강요의 본질과 한국 교회의 대응의 문제점을 되새겨 보려 한다. 아울러 정부가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선별하여 결정한 독립 유공자 포상이 재고되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그 문제를 다시 제기하려 한다.


1. 신사참배 강요


(1) 일본의 신도, 신사, 신사참배


신도는 일본의 토착적인 종교 신앙이다. 거기에는 단순한 종교의 차원을 넘어 국민을 하나로 묶는 요소가 있다. 신도는 일본인의 고대 신화와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가 융화되어 일본인의 고유한 종교가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일본의 정신을 존속시키고 국가 통치를 위한 정신적 원천의 역할을 하도록 개편되었다. 신도의 신개념인 ‘가미’는 고등종교의 신 개념과는 다른 8백여만의 신을 숭배하는 다종교적인 신관에 근거한다. 이 신들은 창조신, 풍요신, 호국신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에 기독교적인 유일신 절대 신의 개념을 도입하여 일본화 하는 것이 메이지유신 이후에 이루어졌다.


1868년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시작된 메이지유신은 자본주의 체제의 출발을 이루었고, 정치 사회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변혁을 가져 왔다. 그런 가운데 일본 정부는 정신의 진작을 위해 교무성을 두어 국교화 작업에 나섰다. 그 바탕은 고유의 신도였다. 일본역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널리 퍼진 신사신도 신앙에다 천황을 만세일계라고 보는 천황제 전통을 첨가하였다. 천황을 제정일치의 권력을 가진 절대 군주로 만들고 천조대신과 종신들을 신사에 모시게 하였다. 천황을 진무(神武) 천황 이래 만세일계의 현인신으로 숭배토록 하여 신도를 민족종교로 받들고 나아가서 국교역할을 하도록 체계화하였다. 나아가 제국헌법 1조에서 ‘대 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라고 규정하여 정치적, 제도적, 법률적인 면에서도 신도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일본 고유의 신도사상에 충효를 기반으로 하는 유교사상을 가미하여 천황에게 종교적 권위를 덧입혀 국민들에게 충성과 복종을 강조하고 일본을 절대 군주제 국가로 만들려 하였다. 신도는 자국민과 식민국가의 통치를 위한 정신적 지주로서 추앙되었고, 소위 ’대동아 공영권‘ 주장 하에서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일본 국가의 통치권이 총리에게 있어 천황은 상징적인 통치자에 불과하였다. 천황제 논리는 명분을 위한 것이었고 기만적이었다.


신도 국교화의 시도는 신교(信敎)의 자유를 내세워 반발하는 세력에 의해 실패하였다. 이에 그들을 설득하여 무마하면서 일반 국민에게는 신도가 여전히 국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 기능을 양분화 하여 1882년 이후 신도의 비종교화를 단행하였다. 전통적 신사신도와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순국한 이들을 비롯한 선열들을 숭배하는 국가신도로 나누었다. 전통적인 신도를 신사신도(Shrine Shinto)라고하고, 애국적인 행위 면을 강조한 국가신도(State shinto)라고 하였다. 국가신도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의 유공자와 애국자전몰자 등의 충절을 기리는 국민 의례적 차원의 것으로 인정되었다. 신사신도는 그 본래적인 종교적 차원에서 교주도 있고 신앙과 종교적 행사와 포교도 하는 것이 되었다. 그 의도는 이미 언급한대로 대외적으로 일본을 신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국가로 인정받게 하고 대내적으로 신도의 이념으로 천황제 하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국민을 단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근대 신도에서 신사는 ‘만남의 장소’란 개념 외에 신도에 근거한 제례가 이루어지는 처소, 또한 회관을 의미한다. 성역의 의미를 지닌 땅이란 개념도 갖는다. 그 참배는 기독교의 예배와 유사한 개념을 지닌다. 신사신도의 예식은 종교적이지만, 국가신도의 예식은 국민의 의례이므로 신교 자유론자들과 온 국민이 참여해야 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이처럼 일본 정부는 전통 종교를 신도의 양분화와 비종교화 작업을 통해 근대 천황제를 이론적,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으로 체계화시켰다. 또한 이세신궁을 필두로 전국에 12만여 개의 신사(神社, 神祠)를 설치하면서 그 신사들을 중앙집권적으로 서열화하였다. 전 국민들을 참배하게 함으로써 국민정신을 통합하기 위해서였다. 이후에 신사참배는 1945년 패전할 때 까지 자국민은 물론 식민지에서도 통치기구의 축이 되었다.


(2) 일본의 한국 내 신사 보급


일본의 명치유신 정부는 1867년 京都에 초혼사를 설립하여 일본 황실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고 1879년 동경천도와 더불어 청국신사를 건립하였다. 식민지를 만들면 그곳에 관폐대사를 설치하고 일본의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워 침략정책에 활용되었다. 1876년 운양호 사건을 통해 대륙진출의 야욕을 성취하기 위한 첫발을 한반도에 내디딘 일제는 1882년 원산에 신사를 세웠다. 이토 히로부미는 신사건립 장려책을 펼쳤고 그 일환으로 서울의 남산에 경성신사를 설치토록 하였다. 한일 강제병탄 후 1912년부터는 관립신사 건립에 많은 예산을 투입해서 구체적으로 일본화에 나섰다. 한편 실제 현장에서도 의식적인 면에서 시도한 곳도 나타났다. 평북 정주의 신안학교에서 한 교원에게 천황을 향해 최경례를 하도록 요구한 일이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축제일 사립종교학교 의식에 관한 건”을 통해 국가의 대 축제일에 기독교적인 의식을 진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후 총독부는 조선 민족의 정신을 지배하기 위해 7월 18일 내각고시 제12호로 조선신궁을 건립을 공포하였다. 이 무렵 동아일보가 1920년 9월 25일자 신문에서 신도의 3신기에 대해 “제기문제를 논한다”는 사설을 게재하여 총독부로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총독부는 “반도주민으로 하여금 영구히 보본반시(報本返始)의 성을 바치도록” 하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조선신궁은 당시 1,570,000원의 투자로 1920년 5월에 시공되어 1925년에 10월에 준공하였다. 이것의 준공을 계기로 총독부 학무국장이 학생들에게 참배를 유도했지만, 이 파동은 기독교계 학교의 반대로 일단락되었다. 신사 설립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1934년에 한국에 神社가 51개, 神祠가 231개가 되었다. 1936년 신임 미나미 총독이 황민화 정책을 표방하고 읍면에 1개 신사를 두는 정책을 펴서 신사는 이 후에도 계속 증가되었다. 각 주재소, 관공서, 학교에 가미다나를 설치하게 하고 매일 아침 참배하게 하였다. 1939년에는 서울의 용산과 함경도의 나남에 호국신사를 세웠고, 부여의 부소산에 부여신궁을 건축하던 중에 해방이 되었다.

한국에서 전국에 신사를 세우려 한 총독부는 임전 태세의 확립과 한민족 말살정책으로 황민화 정책을 펼쳤다. 1937년 8월 24일에는 일본 각의에서 ‘국민정신 총동원연맹’의 결성이 결정됨에 따라 1938년 7월 7일에 경성운동장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3) 일본의 한국 내 신사참배 강요


1) 강요의 배경과 의도


기독교와 일본 제국주의는 19세기말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들어 왔다. 5백여 년 동안 이어 내려온 조선왕조가 몰락해 가던 그 시기에 기독교가 청일전쟁을 즈음하여 급속도로 수용되었다.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던 사람들에게 새로 소개된 기독교는 망국의 통한을 호소하고 위로를 기댈 의지처가 되었다. 그들은 기독교가 구국을 도모할 정신적 지주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한국을 강제로 병탄시킨 일제 총독부는 한국 기독교를 그들의 한국지배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여기고 ‘105인사건’을 조작하여 테라우치총독 암살음모를 획책했다는 혐의를 기독교인들에게 씌웠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기독교계가 가장 적극적으로 사전 모의에 가담하였고, 교회 조직을 통해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정교분리정책에 따라 한국교회의 반일 정서가 주춤해졌고, 갈수록 거세지는 일제의 탄압 아래 점차 천년왕국의 도럐를 희구하는 내세주의화 경향를 보였다. 이때에 일본은 군국주의와 침략주의에 매진하면서 한민족 말살정책을 통한 황민화정책의 실현을 위해 한국인과 한국교회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세기 말부터 대륙침략을 획책하고 소위 ‘征韓論’을 주장해온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화에 성공하고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런 목적에서 천황제를 정점으로 내선일체-동화정치를 표방하고 군국주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내세웠다. 대동아공영권이란 기치 아래 일제는 1932년 상해사변을 일으켰고, 1932년 3월 만주국을 세우면서 군국주의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천황제를 이념화, 종교화 하여 뿌리 내리게 하는 정책을 폈다. 1936년 8월 미나미지로(南次浪)가 새로이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고 내세운 국체명징, 경신사상 함양, 선만일여 교학진작, 농공병진, 서정쇄신 이란 5대 지침이란 것도 천황제 확립과 영토 확장을 위한 일련의 정책이었다. 또한 ‘황민화정책’이란 것도 소위 不逞鮮人을 근절시키고 한민족의 정신을 말살 시켜 일본화하여 침략전쟁에 이용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同化政治란 것도 동조동근론을 표면에 내세워 군국침략을 위해 이용하려는 같은 맥락의 정책이었다.

총독부는 또한 총독부령 76호로 신사규칙을 정하고 1면 1신사 설치를 실시토록 하였다. 그들의 정신집합체인 신사를 세워 숭조경신심을 심어 침략정신을 앙양시킴으로써 일본화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1937년 10월부터는 ‘皇國臣民誓詞’를 제정하고 제창하도록 하였다. 교회에서는 예배 직전에, 학교나 관공서에서는 아침 조회 때 암송하게 하였다. 아울러 일본어 사용, 창씨개명, 지원병제, 국민정신 총동원, 전시전력 앙양, 시국인식 앙양 등 소위 황민화 교육정책을 펼쳤다. 매월 1일 15일을 국체명징일, 매월 5일을 애국저금일로 정하기도 하였다. 궁극적 목표는 천황제를 시행하여 조선을 정신적으로 일본화 하고 영구히 식민지화 하며 또한 병참기지화 하여 아시아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군국주의 체제화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신사참배 강요는 일본이 동양평화론이란 구실을 내세워 내선일체와 황민화정책을 실시하면서 신도사상을 통해 일본 중심의 사상적 통일을 도모한 것이었다. 천황 중심의 절대주의 체제의 확립을 위해 정신적 결합을 위한 것으로서 마치 독일의 히틀러가 로젠베르크의 게르만 민족 우월성을 내세워 유대인을 학살하고 기독교를 독일 국민에게서 이반시키려 했던 것과 비슷하였다. 조선의 독립불능론, 실력미달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조선역사의 정체성론, 타율성론 등의 식민사관을 내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신사참배를 강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기독교 교세를 분쇄하는 데에 있었다. 총독부는 강제 병탄 직후에 ‘105인사건’을 조작할 정도로 한국교회 안에 내재한 반일세력을 축출하려 노력하였다. ‘3.1운동’ 때 교회가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후에도 교회를 민족운동의 소굴로 보고 탄압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 한국교회가 내세적인 신앙이 강해지면서 기독교계의 민족적인 정신이 다소 희미해져 가자 종교탄압으로 그 뿌리를 뽑아 제국주의 정책에 순응하게 하려 하였다. 일제는 대륙 침략과 동남아 진출을 앞두고 교회를 식민지화의 걸림돌이라고 여기고 그 대응책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신사참배를 더 강요하고 기독교를 회유, 탄압함으로써 교회를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려 하였다.


2) 강요의 시작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탄한 후에 간헐적으로 행한 신사참배 강요는 1932부터 더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전남 광주의 남장로교 선교회의 기독교계 학교 두 곳이 그 시발점이 되었다. 연이어 1932년 봄 평양의 서기산에서 거행되는 춘기 황령제에 기독교계 학교들도 참석 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들 학교들은 신교의 자유를 내세워 참석하지 않았다. 당국은 국민의례라고 하며 추후에는 참석할 것을 독려하였다. 이에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동년 9월 21일 제21차 총회에서 교단 소속 학교 학생이 신사 및 여러 제식에 참배할 수 없다고 못 박으며 총독부 당국에 교섭할 것을 결의하고 교섭위원, 차재명, 유억겸, 마포삼열을 교섭위원으로 선정하여 절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결의한대로 되지 않아 결국은 해당학교의 신앙양심에 따라 결정하게 하였다. 1933년 9월 18일 원산에서도 캐나다연합교회 소속의 바커(Mrs. R. W. Barker)가 교장인 진성여자 보통학교가 ‘만주사변 2주년 기념일’의 ‘순난자 위령제’ 참석 지시를 어기고 불참한 것도 문제가 되었다.


평안남도에서는 야스타케 다다오(安武直夫)가 도지사로 부임하면서 더 한층 강경책을 펼쳤다. 그는 기독교학교부터 신사참배를 하게 하였다. 우카키 총독이 이끈 총독부당국도 황국신민 교육의 궁극적 목표요 이상인 국체명징을 실현하도록 각급학교에 지시하였다. 1935년부터 ‘경신숭조에 관한 건’, ‘국가 관념에 관한 건’ 등의 각종 명령을 내려 황민화정책을 강행하면서 신사참배를 위한 시설도 계속 확충되었다.


마침내 1935년 11월 14일 야스타케 지사는 평양 중등학교장들과의 회의를 마치고 평양신사에 참배를 요청하였다. 숭실전문학교장 윤산온( George S. McCune)과 숭의여학교장 선우리(V. L. Snook)를 대신한 정익성, 안식교회의 순안 의명학교장 이희만(H. M. Lee)은 기독교교리와 신앙양심상 참배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야스타케 지사는 국가의식이므로 솔선수범하여 참배하도록 거듭 요청하고 60일 내에 회답하도록 요구하였다. 불응하면 학교의 폐쇄와 출국을 명하겠다고 위협도 하였다. 윤산온은 신사의 제례가 종교적인 요소가 있고, 신사에서 기독교의 신과 다른 신들을 경배하고 있기 때문에 참배 할 수 없다고 통보하고 사표를 내었다. 그 결과는 1936년 1월 18일 숭실학교 교장직을 취소당하고 1월 20일에는 숭실전문학교 교장직도 취소당하였다. 스눅교장 대리도 1월 22일 숭의여학교 교장직을 취소당하였다. 당국의 강경한 파면조처에 숭실학교 학생들은 반대시위도 하고 농성도 벌였다. 안주노회는 반대를 결의하고, 평양노회에서도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노회를 소집하려 했으나 그 집회마저 금지 당하였다. 총독부 당국은 강경일변도였고 일반 신도들에게도 신사참배를 하게 주지시키라고 되풀이 하여 강압하였다. 1937년 노구교사건 이후부터는 매월 1일의 신사참배가 정례화 되었다.


기독교계 학교의 학생들에게 신사참배 강요는 당국의 국민의례라는 신도의 양분화 정책에 따라 참배 반대와 찬성으로 나누어졌다. 나아가 참배를 반대한 학교장의 사퇴와 북장로회 경영의 8개 학교와 남장로회 경영의 10개 학교의 폐쇄는 교계를 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2. 신사참배 강요와 선교사들 및 한국교회의 대응


(1) 선교사들의 대응


한국의 기독교가 선교사의 영향아래 있음을 간파한 총독부는 한국교회와 선교사를 떼어놓으려는 정책을 펼쳐왔다. 한국교회는 기독교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초기에는 공식적으로 반대를 표명했으나 회유와 강요가 더해지자 점차 참배 찬성으로 돌아서는 경향을 보였다. 주한 선교사들은 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한국교회보다 심각하게 논의하고 구체적인 결의를 하였다. 당시에 주한 선교사들이 기독교계 학교들을 대부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가장 큰 선교회였던 북장로교회는 신사참배를 강하게 반대한 방위량(W. N. Blair), 소열도(T. S. Soltau), 허대전(J. G. Holdcroft)의 안을 따라 불가를 확정하였다. 북장로회 한국선교회는 경영하던 학교를 계속 운영하는 여부에 관해 논의한 끝에 1936년 6월 25일부터 7월 2일까지의 연례회의에서 ’교육철수권고안‘을 69:16으로 가결하였다. 학교설립의 목적과 이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교육에서 철수키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 폐쇄문제에 관해서는 학생들의 진로와 학교와 연루된 다른 문제들이 많아 한국인들과 일부 선교회 회원들은 다수 선교사들과 의견을 달리하여 그 결의를 따르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숭실전문학교 교장 윤산온(G. S. McCune)과 연희전문학교 교장 원한경(H. H. Underwood)의 경우였다. 1938년 4월 18일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실행위원회(위원장 노해리, Harry A. Rhodes)의 모임에서 서면으로 투표하기로 하였다. 5월 2일의 개표결과는 62:33으로 폐교가 다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반대파인 학교교육 유지 측의 표수가 약 배로 증가된 것이었다. 같은 해 6월 평양에서 모인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연례회의에서 선교사들은 교육에서 철수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였다. 이 후에도 이 원칙을 따르지 않은 학교들이 있었다.


2)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전라남·북도와 중심으로 활동하던 남장로회 한국선교사 연례회의는 1936년 11월 전주에서 신사참배를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요한다면 교육 사업에서 철수키로 의결하였다. 남장로회 해외선교부총무인 C. Darby Fulton이 내한하여 조언 하게 되었다. 그는 주일 선교사 2세였고 신사문제에 관해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1937년 2월 전주에서 남장로교 한국선교회가 임시 총회를 소집하고 신사참배문제를 토론한 결과 기독교 교리가 바꿔지지 않는 한 한국에서 경영하는 학교를 폐쇄하기로 가결하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신사참배 강요가 점차 심해 감에 따라 남장로회 소관인 전주의 신흥, 기전, 군산의 영명, 멜볼딘, 목포의 영흥, 정명, 광주의 숭일, 수피아, 순천의 매산, 매산여학교가 폐쇄되었다.


3) 캐나다 연합교회 한국선교회


캐나다 연합교회 한국선교회는 함경남ㆍ북도와 만주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총독부 당국은 캐나다선교회 관할 학교인 함흥 영생학교에 1933년 9월 만주사변 전몰자 위령제 및 2주년 기념식을 함경신사에서 거행하니 참석하라고 통지하였다. 선교회는 신도의식에 의한 종교의례이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 비슷한 일들이 이후에도 되풀이 되었으나 이처럼 초기에는 참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부 선교사들은 계속되는 강압에 밀려 국민의례라는 점을 받아드렸다. 1938년 10월 21일 주한 캐나다선교회의 대표 맥길은 함남 경찰부 고등부장을 방문하여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여 참배하고 종전에 경영하던 교육기관들을 계속 운영하겠다고 언명하였다. 스코트(W. Scott)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두 정책을 모두 그의 영광을 위해서 써 주실 것으로 믿고 기도한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유연해진 태도는 모국 캐나다 연합교회가 감리교, 장로교, 회중교회의 연합으로 이루어져 폭넓은 신학적 입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 호주 장로교한국선교회


호주 장로교 한국선교회는 부산과 경남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일제가 학생들의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선교사들이 1936년 2월 7일 마산에서 임시회의를 열었다. 이 모임에서 천황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사와 국가적인 기념식에는 참석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므로 관할 학생들의 참배를 불허한다고 하는 결정을 하였다. 1938년 9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인 1939년 1월 호주장로교 한국선교회가 특별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선교회가 신사참배는 계속 수용하지 않지만 학교운영은 당국과 협력하기로 하였다. 총독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아 동래의 일신, 마산의 의신, 호신, 명덕, 진주의 시원여학교가 폐쇄되었다.


5) 미국 정통장로교 한국선교회


미국 정통장로교는 1930년대에 미국의 북장로교회에서 분리된 소교단이다. 미국 북장로교 파송선교사로 활동하던 헌트(B. Hunt, 한부선)는 파송교단을 정통장로교로 바꾸어서 한국에 왔는데,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는 만주에서 활동하였다. 신사참배를 타종교 의식이라고 분명히 인식하고 반대운동을 펼쳐왔다.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27회 총회에 참석하여 가장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로 인한 투옥의 고난도 감내하였다.


6) 감리교 한국선교회


미국의 남북 감리교 한국선교회는 기독교인으로서 충성스러운 시민으로서 천황의 초상에 절하고, 교육칙어를 낭독하고, 신도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국가의식으로 규정한 총독부의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를 당연시하였다. 일본 당국의 신사 비종교화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여 장로교 선교사들과는 입장을 달리하였다. 선교회 경영의 학교도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는 한국 감리회의 윤치호, 양주삼 등 지도자들의 영향과 하나로 묶인 서울과 도쿄의 감독 체제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 한국교회의 대응


황민화정책을 위한 한 방책으로 그 기본골격이 되는 신사참배를 한국교계에 강요하여 교계를 분열시킴으로써 힘을 약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회유와 강압 정책을 병행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신도는 비국교이고 국민의례라고 주장하는 술책으로 한국교계를 혼돈 시켰다.


1) 장로교회


신사참배 문제는 기독교계 학교에서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초기에는 반대가 우세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에서는 1931년 9월 주기철 목사를 중심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하기로 결정하였다. 1932년 9월 제2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평양의 창동교회 예배당에서 회집되어 신사참배에 반대하기로 하고 총독부와 교섭해서 문제를 해결키로 하였다. 그 일을 맡을 위원은 차재명, 유억겸, 마포삼열(S.M. Moffett)이었다. 1933년 평북 선천에서 개최된 제22회 총회는 전회에 이어 교섭위원회에 그 일을 위임하였다. 1934년 평양에서 회집된 23회 총회에서는 교섭위원 차재명의 보고가 있었다. 1935년 평양에서 열린 제 24회 총회에서는 정인과를 비롯한 7인을 연구위원으로 위촉하여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연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런 반대 기류에 대응하여 회유와 강압으로 한국교회를 유인하는 한편으로 한국교회에게 시정방침을 하달하면서 탄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대세와 시대의 기류를 따르는 부류는 늘 있어 왔다. 반대 일변도이던 장로교회의 노회들의 태도가 바뀌어 평북노회가 1938년 2월 9일 비록 강압에 의해서 그랬을 것이지만 가장 먼저 참배를 결의하였다. 이해 9월 이전까지 전국 23개 노회 중에서 17개 노회가 참배로 돌아섰다.


신사참배를 적극 찬성하는 자들도 있었다. 일제는 ‘평양기독교친목회’라는 친일적인 단체를 이용하여 그들의 계획을 추진하려 하였다.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 여론이 우세하자 그 친목회에 속한 장로회 인사를 선정하여 일본에 가서 신사에 대해 살펴보고 한국교회에게 잘 말하여 참배하게 만들려 하였다. 회유, 설득, 강요 중의 첫 단계의 작업이었다. ‘평양기독교친목회’ 회장인 오문환은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던 이승길을 포섭하여 김응순, 장운경 등과 1938년 5월4일 도일하여 일본교회를 순방하고 귀국한 후에 일본의 국민은 물론 교인들까지도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인식하는 점을 내세워 신사참배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이 시도는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1938년 9월에 열릴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라는 지시를 하달한 일제 당국은 총회에 참석하는 23개 노회 총대들에게 가결하는 편을 들 것을 미리 주지시켰다. 반대여론에 앞장서온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등은 미리 구금시켰다. 평양경찰서는 신사참배 가결안 각본을 짜서 각 개인에게 전달하고 동의까지 받았다. 평양노회장 박응률이 제안하고, 평서노회장 박임현이 동의하고, 안주노회장 길인섭이 재청하게끔 되어 있었다. 1938년 9월 9일 오후 8시 평양의 서문밖 교회에서 회집된 제27회 총회는 이튿날 회의 때 문제의 신사참배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회의장에는 사복, 정복 경찰관 수백 명이 배치되어 삼엄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총회장 홍택기는 ‘가’를 묻고 나서 10여 명만 ‘예’라고 대답했는데도 ‘부’를 묻지도 않고 가결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이행하고 따라서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이라고 공포되었다.


이 때 블레어(W. N. Blair, 방위량) 등 30여 명의 선교사들이 불법이라고 항의하였다. 그 중에서 브루스 헌트(Bruce Hunt, 한부선)는 무장 경찰의 제지를 무릅쓰고 계속 항의하다가 퇴장 당하였다. 크로더스(J. V. Crothers, 권찬영)을 비롯한 25명의 선교사들은 연서로 “총회의 결의는 하나님의 계율과 조선예수교 장로회 헌법에 위반될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발언을 허하지 않고 강제로 회의를 진행한 것은 일본헌법이 부여한 신교 자유의 정신에도 어긋난다는 요지의 항의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총회는 이에 대해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가결 후에 심의현 목사가 신사참배 실행을 특청하여 부총회장 김길창의 인솔로 23개 노회의 대표들이 함께 평양신사에 참배하러 갔다.


한국 최대의 교단인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지 못하고 강압에 눌려 가결한 것과 선교사들보다 더 유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일제의 회유와 강압을 고려하더라도 그들의 내적 문제성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신도에 대한 상반된 견해, 황민화 정책에 세뇌되어 있었던 것, 신학적 입장의 차이로 인한 갈등, 기독교 신앙의 허약함이었다.


장로교 교단의 유일한 교역자 양성기관인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의 교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었다. 남궁혁, 박형룡, 이성휘 교수는 반대하였다. 채필근, 김관식은 학교와 교회는 분리해야 하고 종교는 문부성에서 신사는 내무성에서 관장하므로 신사참배를 종교적 행위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신학교는 주한 장로교 선교회의 결의에 따라 1938년 1학기 수업을 마지막으로 자진 폐교하였다.


2) 감리교회


감리교회는 중앙집권적인 감독 체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감독의 결정과 지시에 따라야 한다. 1936년 6월 29일 총독부에서 양주삼 총리사를 초빙하여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므로 교회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적극 참여할 줄 것과 협조할 것을 요청하였다. 양주삼 총리사는 국민의 의무인 국가적 의례라고 하면 누구나 다 참여할 것이므로 굳이 가결 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1938년 9월 3일 전국의 감리교회들에게 신사참배가 국민의 의례이므로 참석하라는 ‘통고문”이 발송되었다. 감리교회는 총독부의 안에 협조하였기 때문에 교단적으로 피해를 보거나 나누어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견해를 달리한 반대자들도 있었고 수난자들도 있었다.


3) 가톨릭교회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는 로마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국가와의 관계에서 대립이 적은 편이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31년까지 국가신도를 종교행위라 규정하고 반대해왔으나, 이를 번복하게 만드는 교황의 교서가 발표되었다. 1938년 교황청은 Congregation of Propaganda Fide를 발표하여 신사참배는 황실 존경과 애국용사 존경을 나타내는 문화인으로서 애국심의 발로라고 공인하였다. 이에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그대로 순명하였다. 그러나 35명의 신부들이 반대하여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노기남 주교는 “신앙상으로는 아무런 가책 없이 참가하고 민족감정으로는 분명히 꺼림직 한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피하려고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3. 신사참배 반대운동


(1) 반대운동과 그 방법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한국교회의 반응은 대략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대다수는 회유와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참배하였다. 둘째로 그것은 국가의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래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도 있었다. 더 나아가 자진하여 일제 당국에 충성을 표하고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밀고한 자들도 있었다. 이 두 부류는 대부분 총독부의 신사의 비종교화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렇게 하여 신사참배가 국가적으로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저촉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일신의 안위를 도모하고 양심의 가책을 회피하려 하였다. 그것은 일본에게 굴복하여 민족적 양심과 기독교적 양심을 동시에 저버린 일이었다. 셋째로 신사에 결코 참배할 수 없다고 하는 소수의 반대자들이 있었다.


반대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의사를 피력하였다. 우선 주한 미국남북장로교, 호주장로교의 한국선교회들은 주로 그들이 경영하던 학교를 폐교하고 교육사업에서 인퇴하는 식으로 저항하였다. 이것이 선교사들에게 선택된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지역을 중심으로 몇 갈래로 진행되었다. 평남의 주기철, 평북의 이기선, 경남의 한상동과 주남선, 전남의 손양원, 만주의 헌트와 김윤섭과 박의흠이 그 주축이 되었다. 한상동 목사는 시사참배 반대자들을 지역별로 조직화하여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항거자들의 저항과 투쟁방법도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기선 목사는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제를 입학시키지 말고 교회들도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출석하지 말며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동지들끼리 모여 예배하고 그 세력을 확대하여 신령한 교회의 출현을 위해 협의하자는 주장을 폈다.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교회의 출석을 막은 것은 물론 노회 부담금도 바치지 말고 아예 노회를 파괴하고 참배 거부자들로 새 노회를 구성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신사에 참배한 목사에게서 세례도 받지 말고 참배 거부자들 끼리 서로 도우며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대체하자고 제시하였다. 일제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거나 박관준 장로처럼 일본제국회에 진정서를 투하한 경우도 있었다. 김선두 목사는 일본정계의 요인들을 만나 문제의 타결을 시도하였다. 이만집 목사처럼 금강산에 수양관을 세워 신사참배문제 때문에 피난 온 신도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여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한 경우도 있었다. 경북 청송의 매산에서는 ‘시온산 제국‘이란 소종파 단체가 생겨났다. 그 교주인 박동기는 일제의 탄압정책과 신사참배 및 동방요배에 반대하여 군국주의식의 비밀결사운동을 벌였다. 건국기념당을 만들어 기독교 의식을 거행하자는 대안을 만들어 시도한 일도 있었다. 주기철 목사처럼 순교를 각오하며 반대한 이들도 있었다. 이 적극적인 반대자들은 1940년에 대거 검거되어 투옥되었다. 그밖에 해외, 지하, 산야로 망명한 자들도 더러 있었다.


(2) 반대의 이유


1) 신앙적인 면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초기에 선교사들이 전해준 성경중심의 청교도적 복음주의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게 만든 신앙적인 요소들을 몇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들은 신사참배와 천조대신 경배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영적 간음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를 배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었다. 둘째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절대복종이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이 신사에 참배 하는 것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1계명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셋째는 종말론적인 소망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탄압을 이길 수 있었다. 넷째는 하나님 말씀의 증인이 되려는 사명의식이었다. 반대하는 일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드러내는 것이라고 여겨 법정에서든지 감옥에서든지 그들이 처한 역경을 그 말씀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다. 다섯째는 순교에의 열정이었다. 그들에게는 일사각오의 신앙이 있었다. 그들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최고 명령과 약속으로 믿고 소망하였다.


2) 민족운동적인 면


신사참배는 한국인의 황민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써 강요되었다. 따라서 참배를 거절하는 일 자체가 항일행위였다. 총독부 당국은 신사참배에 항거하는 자들을 국체변혁과 천황페하에 대한 불경죄를 범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기소하였다. 그런 저항을 종교를 앞세워 배일운동을 하는 가면 쓴 행동이라고 단정하였다. 한국교회는 항일운동의 맥을 이어 왔다. 일제가한국교회를 핍박하고 탄압조치를 한 것도 교회가 민족운동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들의 신사참배 거부를 이끈 동인은 신앙적인 데에 있음이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실로 항일의 동기도 함께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사학계에서도 이런 저항운동을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보았다. 민족운동이 거의 고사되었던 당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의 배일사상을 지탱해준 것은 강력한 신앙적 양심이었다. 일제 때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행해진 설교들에서 출애급기가 본문으로 가장 많이 활용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종교입국의 동기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105인 사건이나 3.1운동 등의 여러 분야에서 항일 운동의 전통을 이어왔다. 기독교인들 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나라도 사랑한다는 통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민족교회’라는 불리기도 하였다.


주기철 목사의 항일정신은 잘 알려져 있다. 손양원 목사는 재판을 받으면서 일본의 국체에 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천황의 정치가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역 하는 것이고, 그 자신은 일본의 정치 자체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으며, 국민들 사이에 중국과의 전쟁의 여파로 불만이 많아 천황의 통치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참된 믿음은 애국의 길”이라고 술회하였다. 그는 실용학교 시절에 김성권 목사로부터 배일독립사상의 영향을 받아 그 사상을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시절에도 이어갔다. 3.1운동 때에는 거사를 준비하다 발각되어 고난을 당기도 하였다. 마산의 문창교회에서 시무할 때에도 신사참배 문제로 40일 간 마산경찰서를 드나들며 수난도 당했고 결국 사임해야 하였다. 그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일로 투옥되어 있던 1942년 9월 그 담당관이 그에게 일본 국가를 위해 힘써 달라고 설득하면서 일황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는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을 단 한 마디만 했어도 석방의 기회를 얻었겠지만 끝내 말하지 않아 계속 수감생활을 하였다.


거창의 주남선 목사가 투옥생활 중에 간구했던 기도 제목들 중의 하나는 말세의 바벨론 우상제국, 곧 일본이 파괴되고 조선이 자주독립하게 되는 것이었다. 김두석은 신앙문제를 민족사상에 결부시키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뗄래야 뗄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우리 민족에게도 나라를 주시라고 기도하였다. 이상과 같은 예들은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한 자들의 죽음을 무릅쓴 항거에 신앙적인 차원과 민족적인 차원이 융합되어 있었던 것을 밝히 보여준다.


나가는 말


신사참배 강요는 대동아공영권의 수립과 동조동근 및 내선일체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황민화 정책과 한국인의 민족혼을 말살정책의 요체이었고, 그런 목적에서 신사참배에 저항한 한국교회를 탄압하였다. 그 실현을 위해 일제는 그 강점기 말에 가장 강도 높은 회유, 협박, 강요, 탄압으로 한국교회를 거의 무너뜨렸다. 2,000여 명의 교인들이 투옥되었고, 50여 명의 순교자들이 생겨났으며, 200여 개 교회가 폐쇄되었지만, 교회는 결국 목숨을 내건 소수의 투쟁을 힘입어 승리의 깃발을 얻었다.


본고에서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한 배경과 의도, 선교사들을 포함한 한국교회의 대응과 적극적인 반대자들의 신앙적, 민족적인 동인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신사참배 문제 앞에서 한국교회는 양분되었다. 대다수는 그 일제의 강요에 잘못 대처하였다. 초기에는 거부했으나 일관되게 반대하지 못하였다. 극소수만 반대하고 다수가 굴복하여 한국교회에게 약간의 영광과 커다란 수치를 안겨주었다. 이 문제는 해방 후에 교회분열의 씨앗이 되어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는 그 분파의 수가 300여 개로 세계 최대에 이르는 교회가 되었다


대다수 선교사들은 신사참배에 반대했지만, 사실상으로 극히 소극적이었다. 미국 남ㆍ북장로교 선교회들과 호주장로교 선교회가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및 전국의 미션계 학교들을 폐쇄했던 것은 반대 투쟁을 독려하다가 마지막에 취했어야 할 조치였다. 그런 학교들이 갑작스럽게 폐교함에 따라 선교사업의 한 축이 무너졌고 한국의 교육계에 큰 혼란을 끼치고 재산 양도문제를 둘러싼 잡음을 낳았다. 신학교의 폐쇄도 신학적인 항거가 없는 물리적인 자진 폐교로 많은 문제를 나았다. 신학교가 없어짐에 따라 정신적 공간이 생겨 신학 사조에 변화가 생겨났다. 상당수의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이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산간벽지 또는 외국으로 피신하였다. 불가피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저항방식은 나약하였다. 소수의 인사들만 투옥과 순교를 감수하며 공개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들의 저항은 신앙적인 차원과 민족적인 차원을 모두 내포하고 있었다. 그들의 저항을 신앙운동의 차원과 독립운동의 차원을 굳이 나누려 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신사참배 문제는 아직도 활화산의 상태에 있다. 그 당시부터 문제인식에 차이가 있었고 해방 후에도 그리하여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독일의 교회와는 달리 신사참배 문제를 잘못 처리하였다. 나치에 순응했던 독일교회가 2차 대전 종결 후에 철저히 반성하고 회개했던 것과 한국교회가 총회의 결의로만 문제처리를 끝낸 것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수년 전에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축출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총회 차원에서 1938년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회개하였다. 예장 총회도 수차에 걸쳐 취소를 결의하고 회개의 기도를 했지만, 면피성 행위에 그쳐 감정적 앙금과 근본 병폐를 해소하지 못하였다. 한때 승동측과 고신측이 합하여 합동 총회를 이룩했을 때도 취소를 결의하고 기도하는 것만으로 그 문제를 끝났다. 2012년에 통합 총회가 설립 100주년을 맞이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아직도 흡족한 해결과 정리를 이루지 못해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신사에 참배한 것은 신앙적 입장과 민족적인 입장 그 양 측면을 모두 아울러서 교회가 참회해야 했던 것인데도 불구하고 교권을 쥔 자들이 그 참배결의가 잘못되었다고 가결하면서 그로써 문제가 마치 해결된 것처럼 여론을 몰아갔다. 그러면서 신사참배 회개를 주장하는 총대를 총회에서 교권으로 축출하였다. 회개운동을 주장한 고려신학교 중심의 총대들을 총회에서 축출하여 해방 후 교회분열의 길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쫓아낸 자들이 스스로 분리해 나갔다고하여 교회분열의 책임을 전가하였다. 그러므로 신사참배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신사참배 결의와 시행이 왜 잘못되었고 그 외에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한국교회 총회나 연합기구가 자세히 조사하여 그 문제점을 명시하고 인정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신사참배 가결 후의 비기독교적, 비민족적 잘못들과 해방 후 처리과정의 잘못도 함께 철저하게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는 자세를 보이고 나아가 늦었더라고 현실적으로 처리할 수 일이 있다면 처리함으로써 근본적인 해결이 이루어지게 해야 할 것이다. 사분오열된 교단들이 서로 자기 잘못을 철저히 점검하고 통회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신사참배 반대투쟁에 앞장선 인사들이 국가적으로 제대로 균형 있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문제가 충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어떤 반대자는 독립유공자가 되었지만 어떤 이는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하였다. 그 판단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반대한 자들에게는 포상하지 않는 것이 그 기준인 것 같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과연 종교적 신념의 문제로만 국한시킬 수 있는 것인지, 그 시대의 한국 기독인들이 반일본제국주의 사상을 갖지 않고 어떻게 신사 참배 강요에 맞설 수 있었을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체형조서 같은 곳에 반일 문구가 없다고 하여 종교적인 요소만 그 동기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한 판단이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지사들을 재판기록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신사참배는 한국교회의 수치였지만, 순교를 감수하며 반대투쟁을 벌인 것은 한국교회의 영광이었다. 나아가 천황숭배사상에 대한 승리였고 소위 일본제국의 위세를 멸시한 애국혼의 승리였다. 이후에 신사참배 문제 자체와 소수의 참배 거부자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훗날에도 한국교회가 그 정신을 기리며 지켜가야 할 고귀한 유산이고, 한국인이 다 같이 칭송하며 계승해야 할 민족혼 수호투쟁의 정신적 표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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