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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 노래를 부르고 있다(계14:1-3)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7. 9. 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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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 노래를 부르고 있다(계14:1-3)



우리는 사탄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들을 공격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세상 정부와 권력을 통해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거짓 교사들을 세워 진리를 왜곡하고 성도들의 신앙을 배도하게 만들기 위해 계속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탄의 훼방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교회 안에서 거짓목사들을 강단에 세워 복음이 선포되지 않게 합니다. 성도는 복음을 들어야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면 여전히 자연인으로 사는 습관 때문에 죄를 흠모하고 이웃을 나보다 못하게 여기며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일에 쉽게 빠져 듭니다. 하지만 복음을 들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찬양하며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겸손하게 삶을 살려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위해 목적을 가지고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사탄은 성도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려고 어리석고 무지하고 성경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신앙을 가진 목사들을 교회에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 주님의 교회는 아주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계속 순교를 당하고 먹고 사는 문제는 여전히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과연 성도들은 어떻게 될 것이고? 주님의 교회는 존재할 수 있는지? 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어린양처럼 계속 이리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과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움 받은 교회와 성도들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 전쟁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세상은 힘의 원리로 존재합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이깁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은 세상의 방식대로 보면 강한 나라가 아닙니다. 로마제국 아래에 있었던 교회는 아무런 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유대주의 자들은 로마제국을 향해 반기를 들고 로마 군인들과 싸워 이기는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손에 칼과 창을 들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잡혀 죽임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어떻게 세상과 싸워 이길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힘의 원리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이 그들에게 최고의 무기이며 승리의 조건이었습니다. 이것을 과연 세상이 알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다녀도, 교회의 중직을 맡았다고 하는 목사와 장로들도 이러한 신앙의 원리를 과연 알고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목사와 장로들이 세상의 방식인 힘의 원리로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았다고 여기면 아주 사나운 짐승들로 변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목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죄를 지어놓고도 계속 자신을 변명하고 남을 탓하는 것은 신앙의 방식으로 사는 모습이 아니라 세상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방식대로, 힘의 원리로 나가면 그곳에는 거짓이 난무합니다. 진리는 세상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알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 때문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신앙을 버리는 것이 오늘 현대인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아주 분명한 신앙의 승리를 보여 주십니다. 믿음의 성도들이 힘의 원리가 아닌 믿음의 방식으로 살 때 반드시 승리한다고 하는 것을 친히 보여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보고 있는 시온 산에 서 있는 어린양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산 위에 서 있어야 할 존재는 나약하고 힘이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사자와 같은 힘센 짐승이 최고의 봉우리에 서 있어야 아주 멋있는 그림이 되고 그렇게 해야만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서 계십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권세를 다스리고 통치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죽인 볼품없는 예수께서 오히려 시온 산에 서 계십니다. 시온 산이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그리고 자신들의 조상들에게 친히 임재 하셔서 나타나신 곳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이 시온 산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시온 산이 얼마나 위대한 산인지 말입니다. 모세는 이 시온 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임재하는 곳입니다. 이곳에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 것을 사도 요한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한 구절을 가지고도 아주 많은 설교의 내용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아주 위대하고 뛰어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2편에서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고 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다시 말해 시온은 하나님께서 승리하신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곳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에 가득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든지 승리자로 서 계십니다. 그러나 시온 산에 계신 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승리가 완전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보통 우리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것에 익숙해 졌습니다. 내 자신이 해야 그것이 은혜라고 여기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승리하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가장 큰 구원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보고 있는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다는 것은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위로의 선물이며 승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로마제국과 자신들의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당하지만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이 완전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확신하며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더 위대한 신앙의 승리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자 시온 산에 서 계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을 믿는 성도들과 함께 시온에 서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위대한 왕이십니다. 원수들의 조롱과 비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시고 완전히 승리하셨습니다. 사탄이 파괴시켜 버린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며,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을 화목하게 하는 일을 이루십니다. 죄로 인해 죽었던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시는 이 승리의 기쁨을 혼자 누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누리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양 이신 예수님께서 혼자 시온 산에 계신 것이 아니라 144,000명과 함께 서 계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 7장을 통해 이 144,000명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이스라엘 백서의 모든 자의 상징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한 모든 백성들의 수를 의미한다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정확하게 말해 이 숫자는 앞으로 구원 받을 모든 백성들의 수까지 다 포함된 것입니다. , 구약 모든 곳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수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린양과 함께 시온에 서 있는 것을 사도 요한이 본 것입니다. 이 광경은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직접 우리 눈으로 이 광경을 보았다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감정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간혹 이 모습을 우리는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산위에, 그리고 아주 멀리까지 서 있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그림 한 점이 우리들에게 주는 감동이란 것은 그렇게 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 요한은 자신이 본 것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환난과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은 사도 요한이 본 이 위대한 광경을 직접 보지 못하였지만 요한이 쓴 이 계시록을 읽으면서 동일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이유 하나로 인해 먹고 사는 문제에 어려움을 당하고 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이르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장이라도 로마황제를 섬기는 그 모습을 보인다면, 즉 자신들의 오른 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은 그 우상숭배의 모습을 행한다면 쉽게 살아갈 수 있는 그 길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44,000의 모든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오히려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을 자신들의 이마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가장 위대한 것으로 여기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심지어 죽음 앞에서 까지도 어린양을 믿는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버림을 당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144,000명이라고 하는 숫자가 주는 참된 의미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사도 요한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성도들이 다 확신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단지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독한다는 것에 목적을 두지 말고 아주 섬세하게 읽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것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독한다는 것에 목적을 둔 순간에는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리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 성경을 읽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아주 놀라운 위로와 담대함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이 말씀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비록 시간상으로는 그 당시 성도들에게 주어진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오고가는 모든 세대에 다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위로와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원하고 있지만 인간은 땅위에서 만족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늘 좋은 옷을 입고 하루를 살아도, 좋은 것을 찾아 먹을 것을 먹었다고 해서 만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내일 또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염려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오직 어린양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되시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 가는 자만이 참된 행복을 누리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새 노래를 부릅니다.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노래를 부릅니다. 144,000명이 어린양과 하나님 아버지께 노래를 부릅니다. 그 소리가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습니다. 땅에서는 들을 수 없는 오직 하늘에서만 들을 수 있는 노래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합니다. 오직 144,000의 숫자에 든 자들만 노래를 배우고 부를 수 있습니다.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는 찬송 시는 지상의 성전에서 불려졌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참람하게 만드는 짐승들이라고 하여 노래도 부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자들의 노래는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를 믿고 부르는 자들의 노래만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새 노래라고 합니다. 여기에 참된 의미의 노래가 있습니다. 새 노래라고 하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가사와 곡을 만들어 부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 노래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좋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편의 노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비록 시편 기자들이 시를 써서 곡을 만들었지만 그 모든 시편의 내용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가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가사에 악기를 가지고 노래를 하였습니다. 많은 다양한 노래의 형태들이 시편에 나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이 불렀던 노래들은 옛 노래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린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새 노래는 새로운 노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 인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시편의 찬송을 부르면 그것이 새 노래이며, 새 찬송인 것입니다. 아무리 수천 년 전에 불렀던 노래라고 하지만 오늘 믿는 자들이 부르면 그것이 새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는 그 말씀의 의미가 이 노래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것은 새 노래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현대 교회에서 불리는 수많은 찬양을 우리는 쉽게 따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노래들 가운데는 인간의 감정만 뜨겁게 만드는 세상 노래와 같은 즐거움만을 주기 때문입니다. 찬양 가사 가운데 하나님, 예수님이 들어 있다고 해서 찬양이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바른 찬송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먼저 성도 안에서 믿음으로 일어날 때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린양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신 그 구원의 큰 은혜를 찬양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지금 144,000의 모든 성도들이 그것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믿는 자들이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비록 짧은 구절의 말씀을 통해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들었던 말씀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적 이스라엘과 로마제국에 의해 순교를 당했던 그 사람들이 어린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새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산에 올라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그것은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구원을 받은 자들이 서 있는 그 기준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로마황제를 숭배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고 죽인 자들은 자신들이 계획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흥얼거리고 즐거워하였을 것입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처럼 말입니다. 미치광이 네로가 시를 써서 노래를 부르게 하였지만 그 노래는 파멸로 이끄는 전주곡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 그리고 가장 화려한 곳에 늘 서 있었던 네로는 결국 스스로 죽었습니다. 하지만 어린양처럼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받으시고 계십니다. 오늘도 삼위일체 한 분 하나님은 믿음의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를 받으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또한 144,000 가운데 속해 어린양과 하나님께 찬송과 경배를 드릴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144,000 가운데 속한 자들입니다. 이 복을 기뻐하시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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