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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4장 지혜의 역사적이며 우주적인 성격 (송영찬목사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7. 10. 7. 15:30

본문

잠언 4장
지혜의 역사적이며 우주적인 성격

1. 잠언 4장의 구조와 특징

앞서 3장에서는 지혜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다룬 바 있다. 이어 4장에서는 지혜의 성격과 역할에 대해 더 구체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잠언 기자는 이 내용들을 효과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잠언 4장을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하는 기지를 발휘하고 있다.
1-9절은 지혜의 전승적 성격을 그 주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지혜가 역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혜는 한 순간에 완성되거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의 과정을 통해 전수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10-19절은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에 대해, 20-27절은 부정직과 악함에 대한 경고를 다루고 있다. 이 내용은 2장 9-15절에서 이미 제시한 바 있다.
세 개의 담화 형식을 통해 언급되고 있는 이 주제들은 이미 언급했던 2장에서 다룬 바 있는 ‘하나님 나라와 그 삶의 본질’에 속한 내용들이다. 잠언은 이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3-7장에서 세분화 된 주제로 나누어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

2. 역사적이며 우주적인 지혜의 성격

1) 지혜의 역사적인 성격
1-4절은 구약성서가 일반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가정 교육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아버지는 먼저 아들의 주의를 집중시킨 다음(1절) 자신이 받은 교육을 회상한다(3-4절). 이 과정을 통해 부모는 자녀에 대한 관심과 친밀함과 권위를 보여줌으로써 자녀들에게 베푸는 교육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신명기에서는 자녀 교육을 하나님의 계명들과 연관지어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라”(신 6:6-7)는 여호와의 명령은 자녀의 양육이 성장과 더불어 성숙으로 이어지도록 권위를 행사하는 책임을 요구한다. 이 권위는 지혜를 얻고 명철을 얻는 자유를 주는 권위이다.
지혜는 이처럼 오랜 역사적 전통과 더불어 주어진다. 참된 의미에서 지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지혜를 한 순간에 보여주시기보다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따라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지혜를 나타내 보이셨고 그 지혜는 역사라는 틀 속에서 주의 백성들에게 더 분명하게 나타나신다.
이 사실은 지혜가 충분히 객관적이며 역사적 검증의 절차를 밟은 확고한 실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창세 이래로 지혜는 하나님 경외를 증거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를 얻은 성도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일생을 헌신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신 6:6)는 명령은 역사를 통해 진리로 입증된 지혜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잠 4:5)고 말하며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7)고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이미 증명한 것처럼 지혜 외에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 경외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또한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우주의 주권자이시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떠나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인생의 본분을 행할 수 없다. 지혜가 제일인 것은 하나님 경외를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경외는 결코 사람이 얻는 재물로 대신할 수 없다. 이것은 사람의 수단과 방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단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지혜를 얻음에 있어 무엇보다도 역사의 과정을 통해 전수된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수용해야 한다.

2) 지혜의 우주적인 성격
앞서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잠 3:14)고 이미 언급한 것처럼 지혜를 얻는 길은 개방성과 호기심과 탐구와 발견이 중시되는 길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5-8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얻는다, 마음에 둔다, 지킨다, 사랑한다, 높인다, 품는다’ 등 지혜와 관련된 동사들은 지혜를 탐구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비록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들 편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혜는 우리들에게 탐구되어지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인간의 의지로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지혜의 근원으로 정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탐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원칙을 세우셨다. 곧 신명기 6장에서 보는 것처럼 부모 또는 교사의 교육을 통해 지혜를 얻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고 적극적으로 부모 또는 교사의 가르침에 응답해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 ???)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탐구에 대해서는 보상이 따른다는 약속을 의지해야 한다. 잠언 기자는 지혜를 탐구하고 그 지혜를 성실히 수행하는 자에게 특별한 보상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잠 4:9).
이 약속은 마치 혼인식 혹은 대관식을 연상시킨다. 지혜가 인정받고 사랑 받게 될 때 지혜는 영광과 아름다운 관으로 묘사된 매혹적인 삶과 영화로운 면류관을 그 보상으로 줄 것이다. 동시에 이 말 속에는 그 반대의 상황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미련하고 지혜 없는 삶은 망신거리가 될 것이고 부끄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장 27-32절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지혜는 모든 사람들, 즉 우리 이웃과 열방들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혜가 탐구되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도 포함되어야 한다. 지혜의 부름이 인종과 국적을 초월하는 것처럼 지혜에 대한 탐구 역시 인종과 국적을 초월하는 범 우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잠 4:9)는 약속은 모든 인류를 그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약속이다.

3. 지혜에 대한 의식(意識)과 신인식(神認識)

본문 10-27절의 내용은 앞서 2장 12-15절에서 제시한 바 있는 악의 정체와 성격을 더 분명히 하고 있다. 2장에서는 지혜가 어떻게 악으로부터 주의 백성을 보호하는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먼저 악으로부터 지혜의 보호를 받는 것에 이어 악의 성격을 규명하고 경계하는 내용들을 제시하고 있다.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잠 4:10)는 권고는 앞서 3:1-2의 축약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들으라, 받으라’는 권고는 쉐마(??שׁ)를 연상케 한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쉐마(??שׁ)에 근거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의 삶에 대한 하나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는 약속 역시 쉐마와 연결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장수’(長壽)는 신명기에서 주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신학적 주제이다.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6)는 약속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처럼 ‘장수’는 하나님 경외에 대한 약속이며 언약의 지상적 성취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사실은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에게 대하여 베푸시는 신실하심(???)의 상징적 표현이다. 그 결과로 주어진 것이 바로 평강(??שׁ)이다. 여기에서는 평강의 상태를 ‘지혜로운 길’을 상징하는 ‘정직한 첩경’(a way of straight paths)으로 묘사하고 있다(12절). 이 곧고 분명한 길은 악인들의 운명이 될 실족하는 길과 생생하게 대비되는 길로서 사람들이 달려가도 넘어지지 않는 시원하게 뚫려 있는 대로와 같다.
지혜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무런 거침없이 곧바로 달려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의 길을 가는 사람은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란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잠 4:12)는 약속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 약속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거나 실족하는 일 없이 평안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일을 기억하게 한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하신 것과 규례를 삼가 지키며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신 6:17-18). 이 말씀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평강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한다는 의식을 전제로 한다. 즉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와 그 문화를 세운다는 분명한 역사적 사명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혜의 길, 즉 평강의 길을 간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고 하는 확고한 인생의 목표가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여기에서 지혜의 길은 앞서 수 차례 강조해 왔던 것처럼 하나님의 경외를 그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를 얻은 주의 백성은 하나님의 경외를 통해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명확하게 드러내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사특한 자의 첩경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라”(잠 4:14)는 것이다. ‘사특한 자’란 습관적이며 고의적으로 악을 계획하고 행하는 사람이다. 악을 행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상대로 한 것과 같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그 누구라 할지라도 종교적 환경을 떠나서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에서 산다는 것은 그 지역을 관장하는 ‘신’(神)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한다는 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매사의 일상 생활에서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못하고 그 영향 아래 살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악을 행하는 것은 곧 신을 대상으로 행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이 점은 너무나 분명한 개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악을 행한다는 것은 고의성을 갖지 않고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시편 14편 참고).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라고 시편 기자가 탄식하였던 것처럼 악인들은 언약 관계에서 형성된 여호와의 인자하심에 대한 바른 이해가 결여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잠언 기자는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잠 4:15)고 경계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반면에 악인은 이미 그 마음 속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경외 대신에 악을 행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16-17절). 이에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은 뚜렷한 대조를 나타내지 않을 수 없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8-19)는 말씀처럼 의인이 광명한 대로를 가는 동안에 악인은 그 길의 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의인의 길이 생명(23절)과 평탄한 길(26절, 의미상으로 볼 때 환히 뚫린 길)이라면 악인의 길은 그 반대의 길이다. 곧 어항 속과 같이 죽음과 꽉 막힌 길에 갇혀 있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사실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악인의 눈이 닫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죽어 있는 상태와 다를 바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악은 바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 4:27)고 경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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