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예배와 성찬 / 서창원 목사

서창원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7. 12. 11. 09:46

본문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예배와 성찬(서창원 목사)


1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예배 모범


1560 년 5월은 스코틀랜드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대 전환점이었다. 존 낙스 목사는 다른 다섯 명의 '존' 목사들과 함께 교회개혁의 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 스코츠 신앙고백서>(The Scots Confession of 1560)와 <제일 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을 제정하였다. <스코츠 신앙고백서>는 '간단하고 명확하며 명백한 말로 일반적인 신앙원리를 기술한 정직한 문서이다. 신앙의 확신과 결단 및 열정을 나타낸 고백서이다. 그 안에는 단순히 항거하였던 자세로부터 범국민적인 종교로 자리 잡게 한 적극적인 입장을 담고 있다'

이 두 문서는 '하나님의 분명한 성경말씀'으로부터 입증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드렸다. 존 낙스는 그의 스코틀랜드 교회사에서 이 두 문서를 작성함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를 얼마나 철저하게 인정하였는지를 밝히고 있다: 'Sacra scriptura est principium theologiae doctrinae'. 이것은 '성경만이 개혁교회의 신학원리'라는 분명한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스코츠 신앙고백서>에서 그동안 로마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에 예속된다는 것을 부인하고 성경만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교훈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확신 속에서 개혁교회의 표준 예식서라고 부를 수 있는 <제일 치리서>를 제정한 것이다. 이 문서는 의회에서 재정사용 사항에 관하여 이의를 제기함으로서 통과되지는 않았다.. 목사들에 대한 재정지원과 교회 재산 분할문제로 인하여 당시 전통적으로 로마교회의 재산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의원들과의 마찰로 인한 것이었다. 결국은 로마교에 몸담고 있던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그대로 가지되 말씀선포 사역과 올바른 성례거행을 위한 교회의 모든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용했을 뿐이지 재정에 관한 조항을 법적으로 인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서는 당시 종교개혁의 원리에 입각한 개혁교회의 올바른 모습을 세워나가는 원리를 충분히 제공하였다. 물론 이 두 문서에서 예배에 관하여 규정한 것은 특별히 없다. 그러나 성례에 관한 규정은 교회의 공 예배에 관한 개혁자들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존 낙스목사는 스코틀랜드에 오기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칼빈과 함께 사역할 때 1556년에 제정하여 사용한 을 기초로 하여 조국의 교회의 예배갱신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제네바 예식서>에 나타난 예배모범은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근저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 문서에서 낙스는 주일 오전 예배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예배의식의 중요성 및 예배에, 있어서 목사의 위치를 언급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칼빈이나 낙스 및 다른 종교 개혁가들은 하나같이 그 당시에 발간하였던 예배 예식서 또는 기도 예식서등은 반드시 초대 교회의 전통에 따라 제정되어야 할 것을 언급하였다. 개혁가들은 항상 초대 교회의 기독교 전통을 중시하여 교회 개혁의 표준으로 삼고 그들의 전통을 유지 보존하려고 힘썼다.

그 결과로 그들은 주일 예배가 반드시 성찬식과 연계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예배의 범위와 내용이 이것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것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요 보편적인 가르침이요 복음이라고 하였다. 성찬 테이블은 크리스천들의 기도와 헌신의 장소이며 강단은 예언(말씀선포를 가리켜 당시에는 예언이라는 말을 썼다)하는 처소이다. 따라서 성찬 테이블과 강단의 그 구분을 반드시 지키라고 하였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용했던 예배순서는 다음과 같다: 예배부름, 죄의 고백과 용서를 위한 기도, 시편 찬송,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 성경읽기(신약과 구약에서 한 장씩), 설교, (성례), 헌금, 긴 기도와 주기도문 암송, 사도신경(목사 혼자 했음, 그러나 성찬예식이 있는 주일이면 성도들과 다같이 하였다), 시편 찬송, 축복선언.


스코틀랜드에 돌아와 종교개혁을 성사시킨 낙스는 1564년에 이른바 예배지침서를 만들었다. 이것을 우리는 낙스 예식서(Book of Common Order, or Knox' Liturgy)라고도 부른다. 적어도 예배와 교회정치 및 신학적 입장은 통일된 모습을 간직하였던 스코틀랜드교회는 1648년에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서 작성된 신앙고백서와 예배지침서를 승인함으로서 새로운 전기를 맏이하게 되었다. 청교도들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17세기 에배지침서에서 확증된 예배순서는 이러하였다: 예배부름, 은혜와 조명을 위한 기도, 성경읽기(신약과 구약에서 한 장씩, 시편찬송, 죄 회개와 중보기도, 설교, 감사와 간구의 기도, 긴 기도와 주기도문, 시편 찬송, 축복 선언.


이와 같은 순서가 지금까지 장로교의 전통적인 예배순서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시 여길 것은 예배의 중요한 네 가지 요소는 변함없지만 예배 순서는 시간이 자나면서 약간의 변형되었다는 점이다. 예배부름이나 회개기도와 중보기도, 그리고 찬송과 성경읽기와 설교 등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던 것에 비하여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고백은 성례식과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그리고 헌금시간이 따로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도 특이한 것이었다. 물론 칼빈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순서에다 삽입하는 것을 용납하기는 했지만 1549년 이후의 자신의 예배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이 헌금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배당에 들어오면서 헌금함에 헌금하게 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개혁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실천이다.


또 하나 눈 여겨 볼 것은 예배 기도가 둘로 나누어졌다는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져진 목회기도는 한국식처럼 장로나 평신도를 대표하여 누군가가 한 것이 아니라 목사가 하도록 했다. 그리고 회개와 사죄를 위한 기도와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 및 중보기도를 나누어서 두 번 대표기도 시간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 부분을 오늘날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는 하나로 묶어 목사가 그야말로 목회기도를 한다.


예배순서와 관련하여 잉글랜드에 최초로 장로교회를 세운 토마스 카트라이트가 예배의 세부사항을 결정하는 네 가지 성경적 기준을 제시한 것을 소개하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전 10:32). 
둘째, 질서정연하게 시행되어야 한다(고전 14:40) 
셋째, 교훈하고 훈육적이어야 한다(고전 14:26) 
넷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고전 14:6-7) 
-The Works of John Whitgift, Coolidge, p.5.  


이것은 예배순서와 관련하여 어떤 사항은 개 교회가 알아서 처리해야 할 것이 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본질적으로 세대, 장소, 회중, 그리고 다른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번에 결정해서 영원한 표본으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예배모범과 맞물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내세운 청교도들과 언약도들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들이 취해야 할 초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주신 글에 담긴 하나님 말씀이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이것이 종교와 예배, 그리고 섬김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유일한 정경이요 규범이라고 믿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록한 말씀이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합법적이지 않다'. William Bradshow의 1605년도 논문임,


이 교훈은 오늘날에도 매우 적법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의식이 극성을 부릴수록 진리는 줄어든다. 예배의 단순화는 장로교 예배나 청교도들의 예배의 특성이었다. 그들은 사제복장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종교자유의 침해와 로마 가톨릭을 연상시킬 우려가 있으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겸손을 멀리하고 오히려 화려함과 겉치레를 조장할 수 있으며 또한 평신도와 성직자간의 위화감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회 건물조차도 단순하게 만들었다. 각종 형상과 조각상을 교회에서 치워버렸으며 사제와 회중을 갈라놓는 예배실도 없애버렸다. 이들 교회당의 특색은 예배당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강단과 강단에 올라가기 위해 만들어진 나선형 계단과 강단위에 펼쳐져 있는 큰 성경, 그리고 강단아래에 위치한 성찬 테이블이 있을 뿐이었다. 강단이 제일 높은 위치를 차지한 이유는 교회에서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는 사상 때문이었다.


이들은 구약적 성전 개념을 없애버리고 교회를 예배당이라는 모이는 집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그리하여 예배를 하늘의 아버지와의 영적 가족들의 만남이라고 해서 예배의 가족성을 크게 부각시켰다. 여기에 주일의 축제적인 의미가 나타나 있는 것이다. 청교도들이나 언약도들은 가톨릭이나 성공회가 만들어 놓은 성일이니 축일이니 하는 날들을 주일 예배로 대체시키고 모든 절기를 폐지하였다. 리차드 그린함 목사는 "우리에게는 매 주일이 부활절, 승천절, 성령강림절이다" 라고 하였다. Leland Ryken, op.cit., p.249


또 이들은 교회 음악을 단순화 했다. 교회에서 부를 수 있는 찬송은 오로지 시편만이 합당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화음을 이용한 작곡이나 애매모호한 라틴어 노래들 그리고 직업적인 음악가를 배제시켰다.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된 시편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바른 찬송이라고 믿었다. 지금도 스코틀랜드의 개혁장로교회인 자유교회에서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으며 공 예배 찬송은 시편만을 부르고 있다. 신학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논하기에 앞서서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주신 시편을 예배 시에 부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회개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한마디로 이들의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성도들을 교화하며 영적 지식과 거룩함, 형제들을 향한 기쁨을 피차 나누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믿었다. 예배와 관련하여 존 카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요관심과 소원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의식을...잘 집행하는 것이다...이 때 우리는 인간적인 잔꾀를 덧입힐 생각을 버리고 그것의 때 묻지 않은 순수성과 단순함을 보존해야 한다'. ibid, p. 252.


2. 장로교 예배와 성찬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 따르면 성찬식은 '자주 집전 되어져야 한다' 고 했다. 물론 여기에는 얼마나 자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명시하지 않았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성찬식은 오전 예배시 설교 후에 또는 마지막 시편 찬송을 부른 후에 집전 하도록 했다. 이 지침은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성찬식이 공 예배에 붙어있는 하나의 첨가물로 간주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스코틀랜드 장로교가 성찬식을 자주 하지 아니하고 일년에 두 번 하는 것과 연계하여 나온 비판의 소리였다. 사실 칼빈은 성찬은 매 주일 오전 예배에 병합하여 집전 되어져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 자신도 성찬식이 매 주일마다 집전 되어져야 함이 바람직하나 인간의 죄성 때문에 성찬을 남용할 소지가 있어서 가능한 자주 하되 한 달에 한번 또는 일년에 4번 정도로 권장한 것을 간과한 비판의 소리이다. 또 하나는 스코틀랜드 교회가 성찬식을 일년에 두 번만 하게 된 역사적 이유를 알지 못하는데서 나온 비판이라고 본다. 장로교에서는 한번도 성찬식을 예배의 한 부가물로 간주한 적이 없다.


그들은 성찬을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로 믿었지만 주의 몸과 피를 함부로 먹고 마실 우려 때문에 칼빈의 권유를 따라 집전 횟수를 제한 시켰으며 그것도 일년에 두 번 하는 것은 당시 노회별로 연합하여 공동 성찬식을 가졌고 또 한번 성찬식이 공포되면 두 주일 동안 이른바 성찬시즌이 지속되기 때문에 일년에 두 번만 해도 10개 교회가 연합하여 한다면 일년에 모두 20회의 성찬 시즌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곧 년 40주를 성찬시즌으로 보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년 3회라고 하면 일년 내내 성찬시즌을 가지게 되어 그 횟수를 제한시킬 수밖에 없었다. 칼빈 자신도 그 횟수를 매 주일마다 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면서도 실지로 제네바 교회에서 년 4회밖에 실지 하지 않았다.


 누구를 성찬에 참여시킬 것인가?


일반적인 권면은 '무지한 자나 문제를 일으킨 자, 신성 모독죄를 범한 자, 죄가운데 거하고 있는 자'들은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칼빈은 성찬 전에 성도들의 성결된 삶을 점검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장로교에서는 장로들이 구역을 맡아서 개별 심방하여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점검하고 합격을 하는 자들에게만 성찬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성찬 테이블에 참여자를 나오게 하여 함께 앉아서 떡과 잔을 나누었다. 이 문제에 관하여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비국교도 청교도들은 성찬 테이블에 무릎을 꿇고 성찬에 임하자고 주장하였으며, 스코츠 대표단들은 성찬 참여자들이 성찬 테이블에 나오게 하여 참여치 아니하는 다른 회중들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회중 교회 지도자들은 회중 석에 앉아 있으면서 떡과 잔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여길 것은 주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곳은 희생제단이 아니라는 것이며 또 떡과 잔을 받는 것은 상징적인 행위임을 기억하는 일이다. 성찬 테이블 앞에 나와 무릎을 꿇는 것이든 좌석에 앉아서 받는 것이든 사실 예수의 제자들은 떡과 잔을 비스듬히 기대어 누운 채로 받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와 같은 자세는 성도 수가 많은 교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하는 방식은 교회 내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의 연합은 모두 다 한 자리에 앉는 다고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에드워드 칼라미 교수가 지적한대로 성도의 연합은 성결의 연합에 있는 것이다. 토마스 구드윈의 지적대로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여기시는 것은 테이블에 앉아서 성찬을 받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섬기는 것에 있다'는 말은 옳은 지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성찬에 임하는 자들에게 십계명 암송과 사도신경 및 주기도문 암송을 하게 하였다. 주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과 성결된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특별히 장로교회의 성찬식에서는 성찬 참여자의 올바른 참여를 위하여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언급된 성찬에 관한 규례는 다음과 같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그의 몸과 피로 성례를 제정하셨으니, 곧 주님의 성찬이다. 그것은 세상 끝날 까지 그의 교회에서 계속 지켜져야 할 말씀이다. 성찬의 의미는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영구히 기억케 함이요, 신자들에게 그의 죽으심의 혜택이 임한다는 보증의 표요,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에게 영적 양식이 공급되어 자라게 한다는 것이며, 그들이 행해야 할 의무에 헌신한다는 것이며, 신자들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통을 가지도록 매는 줄과 보증이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의 지체들로서 신자들끼리 가지는 교통이다.


성찬거행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성부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의미가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실제로 다시 제물로 드려진다는 의미도 아니다.


성찬 거행의 올바른 의미는 일찍이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위에서 단 한번만 자신을 영원한 제물로 바치신 그 사건에 대한 기념행사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이루신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에 대한 신자들의 영적 찬송에 불과한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성찬을 "미사"라고 하여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찬 거행시마다 그리스도를 실제적 속죄 제물로 거듭거듭 바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택한 백성을 위하여 단 한번만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 죽으신 것으로 충족했던 그리스도의 속죄적 희생의 절대적 완전성에 대하여 가장 해로운 교리이다.


성찬을 거행함에 있어서 예수께서 그의 사역자들에게 지시하신 것은 다음과 같다: 1)그가 성찬을 제정하신 때에 주신 말씀을 회중에게 선포하심, 2) 떡과 포도주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여 그것들을 성별하게 하심, 3) 떡을 떼고 잔을 들어 수찬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시되 자신도 참여케 하심, 4)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주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신부의 기도나 감사로 인하여 떡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화체설은 성경과 위배될 뿐 아니라 일반 상식과 이성에도 모순된 것이며, 성찬의 성격을 뒤집는 교리이고, 많은 미신과 우상주의의 원인이 되어 왔고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성찬을 합당하게 받는 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요소들을(떡과 포도주) 받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및 그의 죽으심의 모든 혜택을 믿음으로 받는다. 이와 같은 섭취행위가 참된 것이기는 하지만 육체적인 것이 아니요 영적인 것이다. 그 섭취과정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물리적으로 그 요소들과 더불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섭취자 들의 신앙에 영적으로 현림한다.


무지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할 때에 그들이 물질적인 요소를 받지만 거기에 상징된 실체는 받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의 성찬 참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며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누리는 데 적합하지 못하니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동안에는 사실 상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고 성찬에 참여하도록 허락될 수도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29장, 박윤선 역, 영음사, 1988



http://thevine21.hompee.com/bbs/bbs/view.act?menuId=120425&topMenuId=6&menuType=1&newMenuAt=false&pageNow=1&bbsNo=1295825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