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개혁교회의 미래 이래야 한다.
앞에서 제시한 개혁교회의 삼대 표어가 제 가치를 충분히 발하는 교회의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개혁교회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느 사회학자의 진단에 의하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두 가지 종류의 교회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철저하게 시대의 조류에 발맞추어 사람들 욕구 충족에 발빠르게 움직여가는 교회입니다.
또 하나는 정 반대로 성경에 더욱 충실한 교회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성경에 충실한 교회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천지는 없어지겠지만 주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요 그 말씀에 충실한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존속하시고 지키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단의 교회, 특히 개혁교회의 미래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교회가 주님의 교회여야 합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섬기고 있고, 속해 있는 교회가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실지로 우리 모두는 다 주님의 교회라고 믿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솔직하게 진단해 봅시다. 내가 속하여서 섬기고 있는 교회가 진짜 주님의 교회 맞습니까? 맞는다면 무엇을 근거로 주님의 교회라고 자신 있게 말하시렵니까? 대답을 듣기 전에 개혁교회의 삼대 표어를 잠시 더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여러분의 교회가 이 삼대 표어에 잘 부합하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 중심입니까? 혹시 여러분 중심은 아닙니까? 혹 성도들 중심은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임이 분명하십니까? 주님의 이름만이 높임을 받으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주인노릇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교회에서 하는 행사들이 무엇이든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좋은 의견들이 지배적입니까? 사람들의 이성적인 판단과 합리적은 소리들이 우세합니까? 아니라면 진짜 기록된 말씀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까? 주님의 공교회 중심입니까? 개교회중심입니까? 아니면 국가나 사회 중심입니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한 질문을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다 노회나 혹은 총회 내 지 교회들을 방문하실 때에 여러분이 속하여 섬기고 있는 교회와 똑같습니까? 아니면 다릅니까? 교회마다 다 같습니까? 다릅니까? 색깔로 표현한다면 동일한 색채를 띠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마다 색깔이 다릅니까? ‘다르다’는 답변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예배도 다르고 가르침도 다릅니다. 심지어 직임까지도 다르며 권징이 다르고 부르는 노래가 다르며, 전하는 말씀도 다릅니다. 과거 80년대 이전에는 단순히 찬송가에 따라서만 구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가장 결정적인 차이를 나타낸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같은 신앙고백이 있었고 동일한 권징과 교육과 직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은 명목뿐입니다. 실질적으로는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힘 있는 분들의 의지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나는 엄밀하게 말해서 한국에는 주님의 교회는 거의 없고 오로지 두 개의 교회만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목사교요, 다른 하나는 장로교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힘이 세면 그 교회는 목사교요 장로들이 힘이 세면 그 교회는 장로교라는 말입니다. 우리 교단에서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계신 여러분들의 교회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고 장담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렇다고 시인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라는 사실을 언제나 확정하십시오.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의 교회에서 가장 힘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모든 판단의 잣대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개혁되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종교적 집단으로 전락하고 마침내 신랑되신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불행을 초래할 것입니다(마 7:22-23).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엄중한 선언을 우리 주님의 입으로부터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좌정해 계시기에 결코 불편해 하지 아니하는 교회, 주님의 우리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자랑스러워하시는 복된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혁명적’으로 쓰임을 받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실 우리들은 은혜로운 설교나 강의를 듣고 그래 맞아 고개를 끄덕이거나 무릎을 치면서 이거야 라는 감정적 동요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지지 아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의 욕심 때문입니다. 내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애써 하나님의 의를 부정해 버린 유대인들이 갔던 길을 우리들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한 건 했다는 자기과시욕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 가치에 의한 좋은 것들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지금까지 누려온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교회가 이대로는 안 된다고 확신하신다면 먼저 누려온 모든 기득권을 교회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양보하십시오. 그 분의 의지와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십시오. 그 분께서 우리에게 따르라고 제시해 준 말씀에 어긋나거나 위배되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과감하게 포기하십시오.
500년 전에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던 개혁가들은 천년을 유지해 온 기득권들을 포기했습니다. 천년을 유지해온 아름다운 건물들과 화려한 예전들을 다 파괴하였습니다.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위배된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현재 개혁의 외침은 많지만 개혁되지 않고 더 부패하고 타락해져 가고 있는 이유입니다. 어쩌면 노아 홍수의 시대와 같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먹고 마시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비가 와 다 쓸어가 버려도 알지 못하고 단번에 파멸되고 만 그 시대처럼 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부활절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 명백한 진리를 온 몸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는 것처럼 땅에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이 천국의 전부인양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하는 찬송하고는 역행하는 일들만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내 교회, 내 왕국을 만들기에 급급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혁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교회를 주님의 교회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인 노릇하던 자리를 내려놓고 주님이 그 보좌에 좌정하게 하셔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법을 제정하고 반포하고 명령할 유일한 권세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하고는 정 반대의 의견들이 목사의 이름으로, 혹은 당회나 노회나 총회의 이름으로 제정하고 반포하고 명령한 것은 없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시고 머리이신 주님의 교회가 되게 하는 혁명적 과업을 오늘 이 시대에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개혁교회의 미래는 공교회 회복에 그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앞에서 제시한 것에 이어서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여야 합니다. 예배가 같고 교육이 같고 설교가 같으며 신앙고백이 같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믿음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개교회마다 다 다른 현상을 띠고 있습니다.
교회의 승패가 목사나 특정인의 자질과 능력에 달려 있는 것으로 전락했습니다. 심고 물주는 일은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을 목사 스스로 다 하려고 하니까 목사교회라는 말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었다는 자부심이 사람들이 반대해도 무리수를 둬가면서 세습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적어도 교단 내의 교회만이라도 공교회성, 즉 주님의 보편적 교회를 회복해야 합니다. 성도 각자는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지만 온 몸에 붙어 있음으로 몸, 그 중에도 머리가 있는 얼굴이 부각되지 몸에 붙어 있는 지체 하나하나가 부각되지 않습니다.
개교회에서 선교도 하고 봉사도 하고 교육도 하고 다 합니다. 그러내 개 교회가 아니라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교단이 부각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교회입니다. 우리는 같은 교단에 있으면서도 우리 교단 정책이나 선교나 교육을 잘 모릅니다. 다 자기 교회와 관련된 것 아니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시정되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은 선교도 구제도 봉사도 교육도 성례도 하나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양한 교파들이 존재합니다. 중세의 거대한 로마 가톨릭의 공교회성, 교회의 사도성과 보편성이 심하게 훼손되고 교황교회로 전락시켜버린 것을 주님의 교회로 되돌려 놓은 거대한 작업이 칼빈과 존 녹스의 수고와 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표면적 현상이 장로회주의 정치 원리에 의한 공교회성 회복이었습니다.
주님의 보편적 교회를 장로회주의 정치원리로 형성한 것입니다. 장로교회란 지상에 있는 유형교회를 장로회주의 정치에 의한 유형교회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교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개교회주의의 최고 권위에서 벗어나 과거에 우리 선배들이 물려준 진정한 장로회주의 회복이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주님의 공교회성 회복은 저절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시찰회가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동일한 신앙고백 하에서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함께 공교회를 세워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본질적인 교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교회개혁운동은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지속되어야 할 운동입니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
첫째, 개혁교회가 공통으로 지향하고 있는 신앙고백서에 기초한 통일된 예배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어느 지역교회를 가든 동일한 예배 모범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신랄하게 비판하셨듯이 입술로는 주님을 존경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은 멀어진 자들이 하는 공통적인 것은 “사람들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8-9)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지만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시는 헛된 예배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가인조차도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확신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분향했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주님이 받으신다고 확신하여 각양 제물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성일들을 만들어서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져오는 제물은 가증한 것이라고 탄식하셨습니다(이사야 1장). 혹 우리들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우리들의 헌신과 헌물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믿음의 선진들이 남겨준 고귀한 유산을 훼패하고 사람들의 계명들, 전통이나 관습이라는 것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상관이 없이 자행되며 지키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우리들의 신앙고백서가 강조하고 있는 예배모범은 철저히 하나님께만 영광입니다. 여러분이 매번 모일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매우 흡족하게 여긴다고 믿습니까? 아니면 그럴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개혁교회의 미래상은 성도들의 모든 모임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없고 오직 성 삼위 하나님만 높임을 받으시는 교회가 될 때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직접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보존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근거한 것이라야 합니다. 말씀에 따라 행하지 아니하는 행위들은 그것이 아무리 장엄하고 화려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정성이 깃든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둘째, 개혁교회가 신봉 할 수 있는 동일한 성경번역본과 시편찬송가를 사용해야 합니다.
진리를 훼손해가면서 교회 연합 운동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천지는 사라져도 일점일획도 사라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즉 성경 66권의 교훈에 합치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으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의 종교적 연합 모임과 사업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고 말씀의 권위가 훼손되며 교회의 순결함이 무너지는 활동들은 무엇이든 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잘 관리 감독하라고 교회 직분자들로 세움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목사는 철저하게 기록된 말씀을 잘 풀어 증거하여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교회가 온전히 세워지는 일에 사력을 다해야 합니다. 신령한 일을 통찰하라고 세움을 입은 우리들이 제대로 된 분별력을 지니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도무지 분별할 수 없는 자입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에 힘쓰라고 했습니다. 옳게 분별하는 지혜와 지식은 오로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 성령은 교회의 양적 성장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의 병듦과 실패를 보듬어주는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와 같은 일에 전혀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주된 관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더욱 풍성히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만 존귀히 여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죄인들이 사는 길이고 그것만이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는 것입니까? 우리들의 금욕적이고 불철주야 땀 흘리며 교회를 위한 수고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 대속의 제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의 공로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의 공로로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받아드려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기 위한 열정 때문에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뒷전으로 밀어내는지 모릅니다.
칼빈이나 녹스의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가장 올바르게 예배하고자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로마교회의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교훈과 가르침이 그들의 사고와 행동의 모든 동력이었습니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500년 전의 개혁자들의 눈에 비친 적폐청산의 주적이었던 로마 가톨릭은 이 사회에서 국민들의 신임을 제일 많이 받는 종교가 되어 있습니다. 그에 비해 개혁의 기치를 들고 주님의 올바른 교회를 세우겠다고 토대를 다시 닦은 개신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신뢰도가 낮은 종교가 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제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교회 모습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자 합니다. 찬송가 문제입니다. 필자는 10년 전부터 이 부분을 총회에 헌의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 동분서주했습니다. 그리하여 칼빈 탄생 500주년 때는 칼빈의 시편찬송가를 교단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21세기 찬송가와 개역개정 성경을 총회에서 받아드리고자 했을 때 혼자서 반대의견을 개진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고 기록된 말씀의 권위를 높이 세우고자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지만 이번 총회에서 다시 한 번 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단의 개혁신학과 신앙에 맞는 예배찬송가가 다시 편찬해야 한다는 헌의입니다. 무산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여기 오신 여러분들이 이에 관심을 기울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찬송은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께 노래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 찬송가나 교회에서 즐겨 부르고 있는 복음 송들 안에는 하나님을 노래하거나 하나님께 하는 노래들은 조금뿐이고 다 사람들 들으라고 하는 노래들이 더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구약에서 제사하던 모든 의식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다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교회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도리어 받은바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예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에서 하는 중요한 찬송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500년 전에 종교개혁하면서 칼빈이 개혁교회의 중요한 유산으로 오직 성경이라는 기치와 더불어서 예배시에 불러야 할 시편찬송이었습니다. 그는 시편을 ‘영혼의 해부도’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기록된 말씀을 우리 입에 넣어주시고 그 말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그의 말씀을 따라 아뢰고 찬양도 그의 말씀을 가지고 부르게 한 것이 시편찬송가를 직접 편찬하고 보급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도 전 세계 개혁 교회가 시편으로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이어받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는 시편을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약시대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사도들의 교훈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배할 때마다 불렀던 찬양은 시편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성경의 교훈과 개혁주의 신학을 신봉한다고 믿는다면 우리가 부르는 찬송을 깊이 재고해야 합니다.
제가 총회 신학부장으로 섬기고 있던 2009년에 시편찬송가 편찬위원회 이름으로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시편찬송가를 편찬하여 제작했습니다. 고려서원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시편찬송가도 작년에 새롭게 출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부분이 이 찬송가입니다.
총회의 헌의가 계속해서 무산되어 어쩔 수 없이 몇몇 편찬 위원들이 모여서 순수하게 개혁교회가 부를 수 있는 시편과 찬송가를 합해서 제작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총회 전에 우리 교단 앞에 내놓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아무 노래를 부르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헬라어 θυσίαν αἰνέσεως는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리자는 말씀을 뜻합니다(a praise-offering,זֶבַח תּוֹדָם).
사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것과는 정반대인 영적인 제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제사들은 무엇이든지 한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원한 제사가 이 찬미의 제사라는 말입니다. ‘제사’라는 말은 구약에서 레위인들이 고안해 낸 어떤 방식으로 하는 제사는 없었습니다. 어떤 제사이든지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계명에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이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답과 아비후처럼 즉결처분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찬미의 제사라는 말을 쓴 것도 우리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을 말씀하는 것이요 동시에 반드시 하나님이 규정해 주신대로 노래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사야 43:21절을 보아야 합니다. 개역개정판의 번역보다 옛날 개역 성경이 더 히브리어 원어에 정확한 번역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이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을 노래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고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찬송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이 부르라고 주신 시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모든 성도들이 부른 노래가 이 시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찬미는 ‘할렐루야’라는 단어의 ‘할렐’(Hallel)이라는 말과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시편 56편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4, 10절).
하나님이 부르라고 주신 시편 반드시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즐겨부르고 있는 찬송가들 중에서 사람들 들으라고 주신 것들은 시편 가사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노래하고 하나님께 찬송부르는 일이 속히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 작업을 위해서 시편과 우리 개혁신학을 올바르게 담아내고 있는 건전한 찬송가를 새롭게 편찬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성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셋째, 한국의 개혁교회는 직분자 개혁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교훈하고 있는 대로 주님께서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은사에 따라서 교회 직분이 세워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직분은 계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계급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반드시 사도들의 교훈과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직임이어야 하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서 세움을 입어야 합니다. 장로는 잘 다스리고 잘 가르치는 자여야 하며 집사는 구제와 봉사하는 일에 필요한 은사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집사에서 장로가 된 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집사였고 처음부터 장로였습니다.
교회와 성도의 관계를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과 그 몸에 붙은 지체로 말하고 있습니다. 손이 발이 된 적이 없고 코가 입이 된 적도 없습니다. 우리들의 지체는 어떤 면으로도 진화가 되어서 귀가 변하여 손이 된 적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 필요한 기능을 처음부터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장로나 목사는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하고 그 중에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 즉 강도장로가 있는 것입니다(딤전 5:17).
목사나 장로 집사는 다 주안에서 동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다만 하는 역할 혹은 기능적인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목사가 되려면 신학훈련을 비롯한 많은 훈련과정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장로는 안수집사를 거쳐서 장로가 되는 것 외에 목사와 같은 특별한 훈련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동등한 지도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앞으로 개혁교회의 모습은 교회의 이 지도력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자질을 갖추는 자여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총회는 적어도 개혁교회의 직분자들의 신학적 수준과 실천적 삶의 형태가 하나님 백성으로서 구별된 자들이 되게 하는 공동교육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장로학교나 집사훈련학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규정을 지켜야 합니다. 여성 안수의 필요성은 사회적 환경요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에 따라 규정되어야 합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디모데전서 3장 2절과 12절을 고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교회 직분은 성경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수천 명의 성도들이 군집해 있었습니다.
그래도 12명의 사도들과 구제와 봉사의 일을 맡은 7명만이 선출되었습니다. 교회 직분이 너무나도 남발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깨끗한 양심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새로운 성직매매가 이루어지는 형태는 반드시 척결되어야 합니다.
넷째, 개혁교회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을 위한 평생교육의 장을 통해서 공교회성 회복을 마련해야 한다고 봅니다.
국가 공무원들도 1년차 3년차 5년차 10년차 20년차 공교육이 실시됩니다. 나라의 정책에 맞게 잘 섬기라고 하는 교육입니다. 목회자들도 장로들도 이와 같은 공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어느 지역에서 하든 같은 색깔을 나타내는 개혁교회의 본래 모습을 구현해 가리라고 봅니다.
지금처럼 교역자 개개인의 능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공교회의 지도와 시찰을 통해서 하나 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개혁 교회의 본 모습 구현을 통한 주님의 참된 교회로의 개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자질과 관련해서 한 가지 짚고 갈 것이 있습니다. 교회마다 목회자 청빙을 보면 과거와 사뭇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말 그대로 청빙이었습니다. 모셔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스카웃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가 지원자들을 선발합니다. 그 기준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교회가 지교회 담임목회자를 선발할 때 그 기준이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가치판단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목사 새로 부임해서 성도들의 영적 생명을 더 윤택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더욱 풍성하게 닮아가도록 이끌며 천국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천국 안에 있는 영적 복락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 분을 모시면 우리 교회가 부흥이 되겠는가?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후임을 모시는데 설교를 못하는 목사를 골라 모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장로들이 후임을 주물럭거리고자 하는 것이요 또 하나 이유는 현재의 담임목사와 전혀 딴판으로 성도들을 신나게 만들어주는 것을 잘 한다고 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오면 살맛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없는 교회는 신바람 납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금송아지 만들어놓고 아침 일찍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신바람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던 것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교회가 그런 것이 아닌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교적 예배의식에 참여합니다.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배 후에 혹은 심지어 예배시간에도 신바람 나게 노래하고 춤춥니다. 주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가운데 임재하여 주시며 다가와 말씀하시고 소생케 하시는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밖입니다. 그런 것은 덤으로 주어진다면 감사하고 그런 것 없어도 종교적 예식에는 참석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하는 일거리들, 자신이 인정을 받고 좋아하는 일 실컷 할 수 있다면 만사오케이입니다.
평생 교회를 다녀도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 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 분의 인격을 닮아가는 일은 거의 없이 교회 일에 익숙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생들도 훈련받기 위해서 교회 지원할 때 그 기준이 뭔지 아십니까? 진리가 기준이 아닙니다. 이 교회에 가면 내가 주님의 진리를 얼마나 더 갈고 닦을 수 있는가가 기준이 아닙니다.
생활비와 학비 보조가 되는가? 그리고 앞으로 담임목사로 나아가는데 좋은 징검다리가 되는가에 있습니다. 실지로 교회에서 부교역자를 선발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진리의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기능인들을 선발합니다. 성경과 씨름하는 일들은 부 교역자로 있는 동안 거의 불가능합니다.
특별 세미나에 다녀오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양적 성장과 관련된 세미나이지 진리를 더 배우고 오라는 데는 보내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에 능한 자가 되지 못해도 교회 일에 능숙한 자가 되면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미래의 개혁교회는 교회 기능인이 아니라 진리의 일군들로 넘쳐나야 합니다. 그런 일군들을 길러내고 양육하는 일에 교회는 헌신해야 합니다. 말씀에 능한 사람이 되고 경건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로 한국 교회가 채워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러한 부분이 개혁된다면 이것을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 중심에서 성경중심으로, 국가나 사회 중심이 아니라 교회 중심으로, 개교회 중심이 아니라 공교회 중심으로 바꾸어 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한국의 개혁교회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개혁교회 식구들을 위한 주님의 보편적 교회 세우기가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의 헌신과 수고의 땀을 통해서 성취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가는 말
한국의 개혁교회는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복음 전파의 위력을 통해서 세계 곳곳에 세워지고 있는 주님의 교회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르다면 그것은 주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지역의 종교집단에 불과합니다. 사이비나 이단적인 종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정치 형태가 어떠하든 주님의 교회여야 하고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의 본 그림에서 벗어나서는 아니 됩니다. 그 그림은 우리들의 환경과 토양에 맞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건물의 형태나 규모 또는 재정적 연건이나 사회적 지위와 형편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주님의 교회는 기록된 말씀에서 제시하여주고 있고 가르치는 교훈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교회, 혹은 독보적인 교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개혁이 필요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속해 있는 교회도 ‘개혁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nda semper reforma)는 모토에 해당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본질에서 너무나 많이 벗어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모습으로 대 전환이 시급합니다. 개인의 능력과 역량에 따라 판단하고 세속적 가치관에 따라 크기와 규모와 인적 자원에 의하여 조명되는 교회의 힘을 이제는 철저하게 적은 믿음으로도 큰일을 감당하는 주님의 교회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목사 개인이나 오랫동안 주인행세 하고 있는 특정한 이들의 교회가 아닙니다. 누구도 교회에서 왕 노릇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잘났든 못났든 다 무익한 종들입니다. 주님 앞에 스스로를 자랑할 수 있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의 우리 됨은 오직 주님의 은혜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지 아니하는 교회는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나 크든 주변 사람들의 인지도가 남다르든 주님의 눈에는 쓰레기더미만도 못한 것입니다. 규모가 적어도 사람들의 눈에 무시될만한 크기가 될 지라도 주님이 높임을 받으신다면 주님은 그곳에 거하시길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초대해 놓고 사람들이 자기들 좋아라 난리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다시는 그런 자리를 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고 높여주고 대우해 주는 곳이라면 비록 모임이 단출한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함께 있는 것을 매우 기뻐할 것이며 기회가 된다면 얼마든지 참여하고자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께서만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교회를 찾으십니다. 왜 한국의 교회가 이렇게 많고 세계에 유례를 찾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을 높여드리는 일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사람들이 가로채고 있는데 그곳에 주님이 계실 이가 만무합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밖을 넘어가지 말아야 하는데 말씀만으로 아니 된다고 헛소리하면서 말씀의 권위와 충분성을 붕괴시키고 있는데 그곳에 어찌 말씀의 위력이 들어나겠습니까?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온 몸이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온 몸이 다 영광을 얻는 것이 주님의 교회이건만 개인주의적 개 교회 형태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공교회의 두려움을 사회 속에서 들어내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 주님의 교회가 어디에 있든 몸이 하나이듯 한 하나님, 한 주 예수 그리스도, 한 성령을 마시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같은 신앙고백과 같은 예배와 교육과 선교와 봉사와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개교회의 위세를 자랑하고 개인의 능력을 과시하는 일이 있는 한 세상의 유행과 흐름과 전혀 다르지 않는 불편한 압력단체밖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교회를 옮길 때 이명서를 띠어주면 다른 지역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명서를 띠어 와도 새로운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려면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기초한 전통이 아닌 것은 구속력이 없습니다. 교회마다 다르기 때문에 교회에 적응을 못하고 빙빙도는 교인들 심지어 ‘가나안’ 교인들이 증가일로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말을 하기조차 힘든 시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교회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는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필자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떠날 수 없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참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믿습니다. 이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자 한다면 우리 교회가 오직 성경이라는 모토를 선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 실행해야 가능합니다. 구호가 없어서 개혁이 안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무엇이든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법이 없습니다. 다 공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섬기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계급이 되어버린 직제를 버리고 주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따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세워가는 일에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교회만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세상에 건재할 것입니다. 그 날에 주님께서 누가 참 그리스도인이었는지를 직접 밝혀주실 것입니다. 미래의 개혁교회는 성경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지금처럼 목사의 개인 목회철학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합리적인 생각과 경험을 중심으로, 사회의 흐름과 국가의 시책을 따라가는 교회로 나아간다면 반드시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의 이야기는 한국의 교회 미래는 암울합니다. 실지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그의 말씀 앞에 두려워 떨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들이 있는 한 주님의 교회는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강력한 도성일 것입니다.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기여하는 자들이 아니라 교회를 살리는 일에 헌신하는 진리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서창원 교수/ 총신대학교, 총회신학부장 역임
http://www.christianfocus.kr/news/view.html?section=9&category=14&no=5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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