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크리소스톰의 설교와 그의 설교가 존 칼빈과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1]
저자: 윌리엄 반두드발드 (Dr. William Vandoodewaard)[2]
번역: 김재한[3]
초대 교회 인물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종교개혁의 뿌리들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대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강조했던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을 떠올린다. 그러나 어거스틴만이 그의 저술로 후대의 교회사에 큰 영향을 끼친 교부는 아니다. 이 시대에 두드러지게 많이 언급된 또 다른 인물은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에서 “황금의 입을 가진” 설교자로 불렸던 존 크리소스톰 (John Chrysostom) 이다.
존 크리소스톰 (A. D. 349-407)은 349년 경에 안디옥에서 태어났다. 어거스틴이 카르타고 근처에서 태어났을 때, 크리소스톰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는데, 그래서 그의 경건한 어머니, 안두사 (Anthusa)는 20살의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아들을 양육하는 일에 헌신했다. 존의 스승들 중 한 사람이었던 리바누스 (Libanus)라는 이방인은 안두사를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 그리스의 신들이여, 기독교인들은 이 얼마나 훌륭한 여인들을 보유하고 있는가!”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 있는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신실한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양육되었고, 그 지역 주교였던 고백자 멜레티우스 (Meletius the Confessor)에게서 훈련 받았다. 그는 또한 위대한 안디옥의 성경 해석자, 타르수스의 디오도르 (Diodore of Tarsus) 문하에서 배우기도 했는데, 디오도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발견되는 풍유적 해석경향에 대항해서 성경 본문의 평이한 역사적-문법적 의미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학업을 마친 후 크리소스톰은 규율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교를 더 성장시키기 위해서, 인근 산에 머무르던 한 은둔자 집단에 합류하러 떠났다. 후에 그는 거기서 그리스도와의 달콤한 친교의 시간을 경험했다고 기록했지만, 그런 엄격한 생활은 그의 건강을 해쳤고 어쩌면 그가 다시 안디옥이라는 도시 생활로 돌아오게 만든 요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교회 생활에 다시 참여하면서 그는 곧 집사로 안수 받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장로로 섬기도록 부름 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교회 직분–장로-은 회중에게 설교하는 일을 포함하고 있었다. 크리소스톰은 성공적으로 이 직분을 감당했다. 그의 단순하고 평이한, 그러면서도 매우 유익한 설교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성경에 있는 책들을 연속적이고 주해적으로 설교하였는데, 시편, 마태복음, 요한 복음 시리즈 설교를 포함해서 그의 많은 설교들이 기록되었다.
결국, 그의 설교에 대한 갈채가 너무 커지자 황제는 안디옥으로 군대를 보내 그를 납치해 왔고, 강제로 그가 콘스탄티노플로의 부름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런 별난 상황에서, 크리소스톰은 그 부르심에 순종했다. 그러나 황제와 콘스탄티노플의 귀족들은 곧 그들이 단순한 웅변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경건한 그리고 그들의 삶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적용이 되는 말씀들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크리소스톰의 설교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깊은 감사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특히 황제 아르카디우스 (Arcadius)와 그의 아내 유독시아 (Eudoxia)의 불만으로 인해 크리소스톰은 결국 도시 밖으로 추방되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군인들에 의해 머나먼 유배지로 보내지면서 그가 받은 형편없는 대우는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거의 천년 후, 스트라스부르그라는 도시에서 젊은 존 칼빈은 크리소스톰의 글들을 주의 깊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크리소스톰처럼 그도 그의 교회에서 추방당했었다. 제네바의 지도자들은 칼빈의 평이하면서도 직접적인 말씀의 선포 아래 기꺼이 머물러 있으려고 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침해하는 성경적인 교회 권징을 회복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매우 화를 냈다.
우리는 칼빈이 왜 크리소스톰 설교 연구에 마음이 끌렸는지 정확히 모른다. 어쩌면 그는 크리소스톰의 생애 이야기에 연민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설교를 좀 더 잘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의 주해와 적용에는 배울 것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칼빈의 관심사는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크리소스톰의 말씀 연구와 설교가 어떻게 성경이 가르치는 신학을 드러냈는지를 보고자 했다. 한 현대 신학자는 칼빈이 종종 크리소스톰의 설교에 있는 신학적 논의 부분만큼이나 적용 부분도 강조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스트라스버그에 도착한 그 해에, 칼빈은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크리소스톰 설교 모음집의 번역과 출판이라는 서문을 썼다:
“[설교는]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된 것이지만, 성경의 해석이 최우선적이다. 이 영역에서 우리의 크리소스톰이 현존하는 모든 초대 교회 저자들을 능가한다는 것을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이라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이것은 특히 그가 신약을 다룰 때 더욱 그러하다. … [그의] 주된 공로는 이것이다: 그는 성경의 평이한 의미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말씀의 직설적인 의미를 비틀어버리는 어떠한 자유도 탐닉하지 않기 위해서 어디에서나 엄청난 고통을 감내했다.”
칼빈은 자유 의지와 공로와 같은 부분에 있어서는 크리소스톰이 가진 신학적 오류에 대해 경고했지만, 크리소스톰의 건전한 통찰력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시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무는 동안 그리고 아마도 제네바로 돌아간 초기에도 크리소스톰의 글들을 읽었을 것인데, 기독교 강요는 이러한 칼빈의 독서에서 나온 중요한 열매를 보여준다. 길게 보았을 때, 칼빈이 점차 크리소스톰의 글들을 덜 사용하게 된 것은 교부들의 예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르침과 설교에 있어서 꾸준히 성경 자체를 다루다 보면 점차 다른 이들에 대한 의존이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크리소스톰이 그랬듯이 이러한 성경 중심성(Scripture-centeredness)이 칼빈을 그의 시대에 매우 유익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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