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으로 (Sola Fide)
저자: 제프리 와이마
번역: 김재한
“내가 할꺼에요!” 4살짜리 우리 손자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내가 도우려고 할 때마다 그 녀석이 전형적으로 하는 말이다. 그 녀석의 엄마도 그 녀석만한 나이였을 때 나에게 똑같은 말을 했었다.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는 것 - 외부에서 오는 어떤 도움도 거절하고 우리 스스로 이룩한 성취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자 하는 것은 단지 어린 아이들만이 아니라 다 자란 성인들 안에도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욕망이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해서도 이는 동일하게 진리이다. 우리는 구원을 우리 스스로 이루고 싶어한다. 비록 이성적으로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sola gratia)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우리는 다른 대다수의 사람들보다는 좀 더 나은 인간이고 그렇기에 우리가 하는 선행들이 우리를 은혜 받기에 합당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유혹에 휩싸인다. 은혜는 우리가 찬양하듯이 “놀라운(amaizing)” 것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또한 대단히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내 안에 있는 자아와 자기-정당화 정신은 나로 하여금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없고, 그저 무력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이것이 종교 개혁자들이 sola fide라는 구호를 가지고 되찾으려고 했던 중요한 성경적 진리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믿음은 인간의 순종의 행위들로 보충되어야 하는 것을 강조하던 배경 속에서 종교 개혁자들은 대담하게도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주장했다. 이 구호가 성경적이라는 것은 몇몇 성경 구절들에 명백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비슷한 정서가 빌립보서 3장 9절에 있는 사도의 말에서도 발견된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종교 개혁자들은 이것과 또 다른 많은 구절들을 우리는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 수 없는 죄인들이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은 자들로 서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수단으로 해서 구원을 - 우리의 공로에 기초하지 않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에 기초한 구원을 - 은혜롭게 제공하셨다. 믿음이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성취하신 그 의로움을 붙들게 해주는 수단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오직(alone)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하더라고, 그 믿음은 결코 외로운(alone)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다음과 같은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나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어떻게 살든지 아무 상관없어!” 구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흥얼거릴 술 있는 이유가 없다: “통로를 걸어가라! 기도를 해라! 일회용의 믿음이 너를 그곳으로 데려가 주리니!” 이러한 잘못 인도된 사고방식은 “값싼 은혜”라는 고발, 즉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구원에 대한 강조가 “아무렇게나 사는” 생활방식을 낳는다라는 비난으로 이어진다.
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를 지지하는 이들에 대해 제기한 고발이었는데, 이로 인해 종교 개혁자 멜랑흐톤은 다음과 같이 응수하게 되었다: “우리의 대적들은 우리가 선행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비방하고 있지만, 우리는 선행을 요구할 뿐 아니라 선행들이 요구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아우구스부르그 고백서를 위한 변증 Apology of the Augsburg Confession 1531) 종교 개혁자들은 야고보서 2장 14-26절과 같은 본문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참되고 구원하는 믿음은 자연히 구체적인 순종의 행위들로 표현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행위들은 의롭게 되는 것에 있어서 조건은 되지 못할지라도, 의롭게 된 결과이기는 하다. 제임스 페이튼 (James Payton)은 종교개혁 오해하기 (Getting the Reformation Wrong)라는 제목을 가진 유익한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칼빈과 모든 개신교 종교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었다. - 그러나 믿음은 결코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의롭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순종 안에서 행하는 선행으로 인도한다. … 어떤 개신교 종교 개혁자들도 의롭게 하는 믿음이 고립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허용치 않았다. 아니, 단 한 명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IVP, 2010, 127페이지).
루터처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받아주시기에 앞서 충분한 선행을 해야 한다는 잘못된 관념으로 인해 오늘도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는 모든 이들은 종교개혁의 슬로건인 솔라 피데 sola fide로 위로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호는 그들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어떤 선행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그 복음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에 나타나는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행동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서 솔라 피데 sola fide를 입심 좋게 인용하는 모든 이들은 이 사실, 즉 참된 믿음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도록, 성령님의 강건케 하시는 도움을 힘입어 온전한 사랑과 선행의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는 이 사실에 의해 도전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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