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역행이라는 말을 우리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효력이 구약의 조상들이 율법 하에서 드린 동물의 피의 제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완전한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백성들이 동물의 피의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들이 죄를 용서 받고, 구원 받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드린 동물의 피의 제사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를 통해 구약 백성들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 받은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역행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시간의 역행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구약의 율법 하에서 드려진 동물의 제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 하에서 드려진 동물의 제사는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온전하게 하였다면 해마다 동물의 피를 가지고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반복해서 같은 제사를 드리는 것은 사람을 단 번에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구약의 백성들은 동물의 피 제사를 드리고 다시 죄를 반복하여 짓고 또 제사를 드리면서 계속 반복합니다. 이처럼 불완전한 속죄제사는 백성들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여 주지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일회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회용품은 한 번 사용하고 버리지만 필요할 때 또 다시 새것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영구적인 것은 한 번 사용하고 다른 새것으로 하지 않습니다. 계속 그것만 있으면 됩니다. 비록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러한 예를 가지고 말하고 있지만 결국 동물의 피의 제사는 계속 반복되고 또 반복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피는 단 번에 속죄의 사역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다시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백성들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늘 같은 죄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지만 이러한 아담의 죄로 인한 죄책과 우리의 죄의 모든 형벌을 단 번에 용서하여 주신 것은 오직 아들의 피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동물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피의 제사를 기다리게 하는 것의 모형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동물의 피의 제사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죄를 기억하게”한다는 (10:3)말씀을 가지고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죄를 기억하게” 한다는 이 짧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피의 죄 사함의 효력이 무엇인지를 아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고 여깁니다. 이 말씀에 대한 이해를 우리 모두는 중요하게 가져야 할 것입니다. 먼저 동물의 피의 제사가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의 죄를 말합니다. 동물의 제사를 드려도 죄지은 사람의 죄가 그대로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은 죄가 늘 기억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를 지으면 여전히 우리의 죄가 기억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피의 제사와 동물의 제사가 같지 않습니까?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예수를 믿는 성도도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기억납니다. 개혁신학과 청교도 신학의 중간 다리에 있었던 윌리엄 에임스라고 하는 분은 성령은 우리가 지은 죄를 기억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칼빈도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성도가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은혜의 방편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가 아담이 지은 그 죄로 인해 영원한 심판의 형벌에서 구원 받은 것과 자신이 지은 죄에서 구원 받은 것은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죄들이 아들의 피로 다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기억난다고 해서 죄를 용서 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구약의 백성들이 “지은 죄가 기억난다”고 하는 것은 그 제사에서 죄용서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동물의 피의 제사는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를 없이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마다 계속 반복해서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이후부터 짐승의 피의 제사를 드린 시간이 대략 1,500 년이나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전 1,5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계속 동물의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많은 제물과 제사를 드려도 그들의 죄는 용서 받지 못하였고 그대로 그 죄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신의 피로 제사를 드린 그 사건으로 인해 1,500년 동안 동물의 피의 제사를 드린 그 모든 제사들이 단 번에 영향을 받아 동물의 피의 제사를 드린 사람들도 온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시간의 역행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시대에 자신의 아들을 통해 완전한 속죄 제사를 이루시겠다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편40편에서 하나님께서 동물의 피의 제사를 기뻐하지 않고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이 시편은 다윗의 시편인데 다윗은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진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구약의 선지자나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말해주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윗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다윗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하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중요한 진리들을 접하고 있습니다. 성육신 하실 하나님의 아들을 구약의 조상들이 믿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다윗은 믿음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능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러한 동일한 믿음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에 드려지고 있었던 동물의 피의 제사를 통해서는 그 누구도 완전한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또한 알았습니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않는 다고 하는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제사를 통해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 동물의 피의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실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기전까지 모형으로, 그림자로 동물의 피의 제사를 통해 드리게 한 것입니다. 율법을 따라 드리게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기 전까지 드린 것입니다. 결국 때가 차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령으로 처녀의 몸을 통해 오셨습니다. 이제 실체가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구약에서 드려졌던 동물의 피의 제사는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과거 1,500 여 년 동안 드렸던 동물의 피의 제사도 하나님의 아들의 피의 제사로 인해 다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완전하게 할 수 없고, 죄를 용서하여 주지 못하는 이 동물의 피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는 것이며, 결국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유대인들은 계속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형태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만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행하던 신앙의 습관들을 가지고 계속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성립되는 것은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러한 위선적 신앙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기뻐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제정된 제사제도만 잘 이행하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없는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쉽게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형식적인 것만 잘하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이처럼 위선적인 신앙은 결국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만연되었던 모습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형식적인 신앙은 현저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다른 곳에 두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일주일을 보냈는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예배 가운데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의지하지 않고 예배하는 자들의 예배는 헛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을 찾지 않고 인간의 노력과 경험과 의지로 드리는 예배 또한 거짓 예배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배야 말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의 사건을 하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무엘 상 15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어떤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의 보기에 아주 좋은 짐승들과 노략물들을 취하였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왜 너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느냐고 책망하였고 이에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아주 좋은 짐승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히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 그의 왕위가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으로 그가 심판을 받는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삼상15장 22절을 보면 사무엘은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요점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비록 율법으로 동물의 제사 제도를 제정하였다고 할지라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제사를 통해 우리의 죄를 덮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동물의 제사를 통해 즉 양의 몸이 갈라지고 황소의 피가 흐리는 그 모습을 통해 자신의 죄를 애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지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방편으로 먼저 주신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동물의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이 동물의 피의 제사를 원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 일만 아주 잘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폐위시킨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구원하시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단지 율법에 매여 형식적인 신앙을 중요하게 여긴 것 때문에 폐위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는 자신의 마음에 합한 자를 찾으셨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한 의도를 알고 순종하는 자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동물의 제사가 주는 메시지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를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동물들이 죽어가는 것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물의 피의 제사는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피를 통해 완전한 제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물의 피의 제사와 아들의 피의 제사를 분명하게 비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지금 아주 상세하게 비교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 언약을 폐하시고 둘 째 것을 세우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것을 세우시기 위해 아들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의 몸을 단 번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대속사건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합니다. 대제사장도 거룩하지 못하는데 아들의 피를 믿는 자만이 거룩함을 얻는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아들의 피가 모든 죄인들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동물의 피는 제사를 드리는 자의 죄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죄가 여전히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의 피는 그 사람의 죄를 기억하지 않게 하십니다. 비록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는 기억나게 하시지만 우리가 지은 죄가 용서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그런 의심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우리의 죄가 아들의 피를 통해 용서받고 더 이상 기억하지 않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아들의 피를 믿는 자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 말씀은 우리들의 죄가 다 용서 받았다고 하는 것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죄가 용서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가 죄를 기억하고 있다면 아들의 피는 완전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용서 받았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씻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가장 위대한 속죄제사의 피 입니다. 이것을 의심하면 결국 유대교가 계속 드리고 있는 짐승의 피의 제사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드린 피의 제사는 어떤 죄인의 죄도 단 번에 영원히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 피를 믿는 자들은 성령께서 그 마음에 새 언약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여 주시고 늘 그 법을 생각나게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그 율법을 준행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구원 받은 자의 표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일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음으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불법을 자행하는 자는 결국 믿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믿음의 신앙이란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싸우고 그 가운데 좌절하고 또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계속 죄와 싸우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의 피로 다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다시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의 피로 모든 구약의 제사를 다 폐하시고 완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동물의 피의 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하고 있는 저자는 그 시대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직 아들의 피를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 다고 하는 이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삼위일체 한 분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께서 흘리신 피를 믿는 자만이 거룩하여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이 피를 부정하는 자들은 결국 역사적으로도 다 심판을 받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믿고 고백합니다. 오늘 말씀에 아들의 피가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다고 하는 이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현대신학과 교회는 아들의 피를 부인합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순종에 감사하며 늘 우리가 의지하고 믿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모든 것을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940&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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