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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히10:19-25)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8. 8. 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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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히10:19-25)
  

지금까지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제사가 1,5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동물의 피의 제사보다 더 위대하고 탁월하다고 하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동물의 피와 비교 할 수 없는 완전한 죄 사함과 구원을 단 번에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 역사의 핵심이었습니다. 이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구원의 확신에 있어 의심하면 안 됩니다. 모세보다, 천사보다, 대제사장보다 뛰어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아들께서 흘리신 피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더 이상 지상에서는 동물의 피의 제사를 드려도 헛된 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휘장이 갈라진 그 순간부터 예루살렘에서 드려진 동물의 피의 제사는 쓸모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형제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주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담력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그런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언제든지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나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대제사장만 제외하고, 대제사장도 일 년에 한 번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절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 갈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자신의 육체로 그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날마다 뵙고 아는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자유롭게 나가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지은 이후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죄인들이 자신 앞에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불검으로 막아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같이 영생하지 못하도록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아버지께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라고 한 것입니다. 새롭게 하나님께 나가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주셨습니다. 이 새로운 길은 율법으로 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열어 놓으신 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물의 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 누구도 동물의 피로 하나님께 나가지 못했습니다. 다만 대제사장만 동물의 피를 가지고 속죄소에 뿌리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휘장을 지나 지성소로 들어갔지만 다시 휘장을 통해 나와야 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휘장이 바로 예수님의 육체라고 한다면 결국 대제사장도 예수님의 육체를 지나 하나님께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를 지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아버지께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인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 아버지께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 나가는 자들에게 담대히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의심을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나가 하나님 앞에 서서 일할 때 자신의 직무를 믿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정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믿고 나간 대제사장도 하물며 하나님께 의심하지 않고 나갔다면 더더욱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나가기 때문에 담대히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가는 자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고 하는 의심을 가지고 나가면 그 예배가 온전한 예배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기도를 하는 자가 의심을 하고 자신의 기도가 과연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인지를 의심하면 그 기도는 처음부터 기도가 아니라 불신하는 신앙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러 나가는 자는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대제사장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큰 집에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이 말씀은 교회 가운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이 교회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를 위해 대제사장으로 계십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보면 왜 우리는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끝을 맺는 것입니까? 기도의 끝을 알리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근거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없고,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순종하여 이루신 구원의 일들을 의지하고 기도하기 때문에 아들의 공로임을 아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우리 힘으로 기도하고, 우리가 무엇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처럼 자신들 안에 뜨거운 열정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가 있다는 그런 헛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지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합 왕 때 바알을 숭배하는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질 것을 위해 그렇게 수고하고 애를 썼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목적을 삼아야지 우리의 탐욕과 정욕을 위해 기도한다면 결국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통해 아버지께 나갈 수 있는 그 길을 열어주신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른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공로와 은혜만을 의지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라도 양심이 계속 죄를 가지고 공격합니다. 양심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할 뿐만 아니라 정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피는 이러한 양심이 정죄하는 모든 것에서도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양심을 악한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들이 누리는 구원의 확신을 누리지 못하게 계속 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 받았다고 하는 자들에게 양심은 계속 괴롭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피는 이렇게 괴롭게 하는 양심으로부터도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깨끗하게 씻겨주셔서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나가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서로 격려하면서 돌아봅니다. 사랑과 선행을 즐겨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를 믿는 자의 삶입니다. 말로만 격려하지 않고 진실 되게 도와주면서 격려합니다. 어려운 형제들과 이웃들을 살피고 도와주면서 함께 신앙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자고 합니다. 야고보서 사도가 기록한 말씀에서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이웃에게 행함으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성도는 살아야 합니다. 24절에서 격려하라고 하는 이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굳건하게 서야 한다는 격려입니다.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신앙의 도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를 의심하고, 십자가의 피를 의심하면서 정말 자신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을 가지는 자들에게 당장 해야 할 일이 바로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운 문제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도는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의심을 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성도들이 한결 같이 격려해야 마땅합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어떤 모임에 자신이 소속되어 있다면 그 모임에 성실히 참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성도는 교회의 지체이고 교회 안에 있는 모임에 성실히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하는 말의 의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형제들 안에서 서로 자신들이 탁월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결국 교회 공동체라고 하는 곳을 떠나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행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방인들이 들어온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율법과 전통에 의해 습관적으로 사람들을 평가하는 모습들이 성도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모든 인간이 가진 병폐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중심으로 항상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받는 형편에 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끼리 또 나누는 그런 일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어도 이방인들하고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이런 일들 때문에 교회를 떠나 회당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열심히 교회중심으로 모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습관적으로 나오고 급기야는 모이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같지 않다고 해서 타인을 배척하는 것 때문에 모임에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런 자들의 신앙은 참된 믿음의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임을 알고 서로 격려하고 권면하여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만들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시고 통치자인신 주님의 뜻대로 교회가 세워지고 다스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람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교회를 만들고 나가려고 합니다. 사실 타인에게 내 자신을 맞추기란 어렵습니다. 오히려 남이 나에게 맞춰주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은 아내가 자신에게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맞춰주고 이웃들이 나에게 맞춰주기를 바라지만 정작 자신은 아내와 자녀들에게 그리고 이웃들에게 맞춰나가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더나가 이런 자들에게 당신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한다면 오히려 화를 내고 돌아서서 나갑니다. 우리는 이처럼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만 잘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바른 신앙에서 끝까지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길 바라십니다. 

아무리 우리 자신이 내 중심적인 삶을 산다고 해도 결코 부인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교회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때문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간다면 그 죄를 속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주 예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있고, 다툼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 예수를 부인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믿고 알았다면 이 믿음 안에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의도적으로 죄를 짓고, 형제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사역에서 떠난다면 다시는 속죄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야기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신앙의 본질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신앙을 판단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신앙을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것으로 믿는 다면 그것은 결국 세상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라고 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가진 소유 때문에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에 더 많은 소유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여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가진 물질적인 것들, 즉 소유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세계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그 때 우리가 가지고 가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가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갑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이것을 말해 주기 위해 지금까지 계속 줄기차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은 율법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아들의 피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 길을 열어주신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대제사장을 존경하고 위대한 직분을 가진 자로 여긴 것은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사건을 자신들이 누리고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의 육체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십자가 사건으로 이룬 것입니다. 이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면서 교회라고 하는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를 이루었는데 여기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것 때문에 서로 갈등하고 급기야는 교회를 떠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이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짧은 본문의 말씀 속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 기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계속 강조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위에 소망을 가지고 비록 조금은 다른 모습이 형제들에게 보인다 할지라고 서로 사랑으로 돌아보고 끝까지 격려하며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날에 빠르게 나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든지 아니면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는 인생의 죽음을 통해 주님 앞에 나갈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나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인지를 바르게 믿는 믿음 안에서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하는 그 모습으로 매일 매일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이런 신앙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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