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란 무엇인가?
박영선 남포교회 담임목사
우리는 이 장에서 “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한다. 우리가 ‘신학’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 주제 때문인가, 아니면 그 학문의 방법 때문인가? 우리가 볼 때, 그것은 분명히 주제 때문이다. ‘신학’이란 이름은 그 학문이 다루는 내용과 주제 때문에 주어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신학에서 방법론은 어떤 자리를 갖고 있는가? 신학의 방법론은 일반 학문과 동일한가, 그렇지 않다면 무슨 다른 독자적인 것이 있는가? 신학도 학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학문 분야와 공통된 방법론이 있을 것이다. 만일 신학이라는 이름을 다른 학문과 독립되게 하며, 구별 짓는 것이 그 주제 때문이 아니라면 방법에 의한 것이 되고,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면 주제에 의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과 다른 학문과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서, ‘문학’, 혹은 ‘공학’이라고 할 때 우리는 “문학과 공학이라는 학문은 그 방법론에 있어서 같은가, 다른가?”에 대하여 질문해 볼 수 있다. 만약 학문으로서 두 분야의 방법론이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속은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국문학과 전자공학을 비교해 볼 때, 두 분야에 대한 연구방법이 달라 보이는 것은 그 주제가 다르고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방법이 달라 보이는 것은 중심주제가 사용하는 술어와 표현, 그리고 연관된 여러 가지 특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같은 것이다. 즉, 두 학문 간의 차이는 그 방법론 때문이 아니라, 주제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신학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것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신학을 다른 모든 학문과 구별 짓는 이유는 신학이 다루는 내용과 주제가 하나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일반 학문과 신학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일반 학문은 인간의 인식과 지각 안에 있는 것, 즉 유한한 것을 대상으로 다룬다면, 신학은 초월하고 계신 하나님을 대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특성상의 차이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신학에 있어서는 학문을 하는 원리가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즉, 신학이 초월을 다룬다면, 도대체 어떻게 유한한 인간이 ‘초월계’를 다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예를 들어, “문학을 한다” 하면 그 주제와 내용은 이미 기존하고 있는 작품들을 대상으로 다루게 된다. 그러나 신학은 그 대상이 초월에 관한 것이므로 그 내용과 주제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학의 원리는 계시가 된다.
“신학의 원리는 계시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곧 바로 “그렇다면, 이성의 위치는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리하여, 신학의 원리는 ‘계시’냐? 혹은 ‘계시와 이성’이냐? 하는 문제가 커다란 논쟁거리로 떠오르게 되었다. 공학이나 문학이 방법론상에서 같다는 것은 이성을 그 학문의 원리로 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수학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공학이든, 사상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문학이든 간에, 둘 다 사용하는 학문의 원리는 이성이다. 왜냐하면, 합리성을 그 원리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의 원리는 계시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성도 원리에 끼느냐, 안 끼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계시란 결국 무한하신 초월자께서 이성으로 감지할 수 없는 내용을 유한한 인간에게 보여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보여준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절대자가 인간에게 자신의 전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즉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인식기관은 이성이라는 것밖에는 없다는 데 있다. 물론 눈으로 본다든가 손으로 만진다든가, 하는 직접적인 감각기관(sense)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인식 기능은 이성에 있다.
이성은 우리에게 합리성을 요청한다. 그래서 직접 눈으로 보았어도 그것이 합리성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퇴색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서, 사람들이 신앙적인 체험에 있어서 환상을 보든가, 커다란 기적을 경험하여도 시간이 흐르면 그 무게와 색깔이 퇴색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성이 인간의 인식 기능 가운데 최고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보았다 하더라도, 이성이라는 것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정신의 필름에 현상되지 않으며, 그 영상이 정신 속에 맺혀지지 않는 한계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계시와 이성을 합하여, 신앙의 원리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성은 계시를 인지하는 기관이지 내용일 수 없다. 신학의 내용은 신(神) 자신이며,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지 내가 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는 중요할지 모르나, 신학 자체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의 원리는 계시 뿐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계시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행위”이다. 즉, 무한이 유한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이며, 초월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계시라는 것은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다. 계시란 기본적으로 ‘벗는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어떤 대상이 자신을 ‘벗고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계시라는 것은 “감추어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볼 수 없었던 것을 나타내어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계시’라는 말 속에는 어떤 제한성이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보이실 때 속속들이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다 보이시는 것은 아니다. 즉 우리가 모호해지거나 의심이 생기거나 혼동이 없도록 모든 것을 밝히고 설명하고 변명하는 식으로 계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 계시의 제한성이 있다.
우리는 종종 계시란 하나님이 백과사전처럼 자신을 나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하나님은 백화점의 진열장에서와 같이 자신을 계시의 쇼윈도에 모조리 나열하시고 우리가 알아서 선택하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계시를 수동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계시를 어떤 하나의 지식의 내용들로 오해하기 쉽다. 계시를 어떤 자체적인 의지나 동력이 없이, 그냥 무중력 상태 속에서 방향성도 없는 고정된 정보들이 나열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것보다 더 큰 오해가 없을 것이다. 계시는 지식과 정보의 노출 이전에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라는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너, 나를 선택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라고 묻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을 누군가에게 나타내시는 한, 그 사람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에 나타나는 가장 굵은 사상인 것이다. 계시는 그냥 선택 대상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것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며, 계시 자체가 목적을 갖고, 의지를 갖고, 집념을 갖는 행위가 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성경은 계시를 다음과 같은 식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언제부터 계셨는가?”
“선악과는 왜 만들었는가?”
“왜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택하지 않는가?”
“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실 때, 죄짓지 않게 만들지 않으셨는가?”
위와 같은 질문들은 모두 성경 계시의 특성을 오해한 데서 나온 것들이다. 성경계시는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모든 호기심을 답하는 식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증명하거나 변명 하는 식으로는 주어지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수학을 배우면서 ax2+bx+c=0에 해답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으로 영어를 배울 수는 없다. 물론 이 공식에서도 영어를 배울 게 있다. a도 배우고 b도 배우고 c도 배우고 x도 배운다. 여기에 4개의 영어 철자가 있지만, 이것은 영어가 아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성경이 하려는 이야기가 있다. 성경이 목적하고 성경이 그려내는 그림이 있다.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에서도 ax2+bx+c=0을 가지고 영어를 배우려는 사람들 같은 부류가 있다. 그들은 “성경은 진리의 책이며, 거기에는 모든 해답이 다 있다”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논리적인 함정에 빠지게 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라고 말하자, 누군가 이렇게 되물었다. “하나님은 자기가 들지 못할 만큼 무거운 물건을 만드실 수 있는가?”
“못 만든다면?”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다.”
“만들 수 있다면?” “그는 들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전능하지 않다.”
성경에서는 “들 수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을 전능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이 없다”가 성경이 말하는 ‘전능의 개념’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안다, 혹은 모른다”라고 말할 때, 대부분 그것을 정보의 양으로 판단하는 성향이 있다. 이리하여 신자들도 신앙을 정보의 양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성경이 요구하고 있고 의도하고 있는 방향을 못 잡아 뒷북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달리 생각하여야 할 문제의 핵심이 있다.
그렇다면, 성경의 계시란 어떤 특성을 갖는가? 특성이라는 것은 그 외의 것은 구별되지 않는 어떤 고유한 성격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경계시의 특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원한 목적을 갖고 계신다”는 것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하여 영원한 목적을 갖고 계시며,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만큼 열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 성경계시의 중심 특성으로 드러난다.
성경계시가 “하나님의 일하심, 그의 목적, 그의 목적을 이루시는 섭리, 그 열심”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로 증거할 수 있다.
우선 신구약성경 66권의 기록의 형태를 보면 ‘역사’가 가장 두드러지고 있다. 성경은 사상에 관한 것보다, 역사가 중심을 이룬다. 구약성경에서 모세 오경은 거의 전부 역사이다. 이어서 나오는 책들, 즉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상하가 모두 역사서이다. 대선지서와 소선지서에도 역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복음서를 이루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출발과 성장과 성숙에 대한 역사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역사서’라고 말할 때,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을 연대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이 목적을 두고 목표를 향하여 진행하고 있는 이야기를 담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역사서가 아닌 다른 성경들은 무엇인가? 거기에도 분명히 어떤 정보와 사상들이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보와 사상들은 성경에 담긴 구원의 역사가 궁극적인 목표로 향하여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 꼭 발견하고 알아야 하는 어떤 의미들과 가치들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들이다. 달리 말하자면, 역사서가 비역사적인 책들을 위하여 있기 보다는, 후자가 전자를 위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역사서 외의 책들도 전부 영원한 세계를 알고, 우주의 주재가 되신 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히 창세기를 보면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창5:1)와 같은 족보 형식이 10개나 나오고 있다. 족보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데 있다. 신약성경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로 시작한다(마1:1). 여기에서 ‘세계’는 우리가 아는 이 세상으로서의 세계(世界, world)가 아니라, ‘자손과 후손을 뜻하는 세계(世系)로서, 즉, ‘족보’(族譜)를 가리킨다. 즉, 신구약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목표를 향한 진행과 그 성취를 보여주는 특성을 갖고 있다.
성경 기록의 특성들 중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성경 계시가 의도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가 하면,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와 근거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질문들에 대해서는 성경이 답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람들은 “난 이러면 믿겠다”라고 말하지만, 이런 것에 대해서는 성경에 답이 없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계시면, 왜 착한 사람은 못 살고, 왜 저 악당들이 더 잘 사는가?”라고 묻는다. 이러한 의문은 신자인 우리들에게도 있다. 시편 73편에 보면 “악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다”(4절)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며, 마음에 기대한 것보다 더 얻는다”라고 말한다(7절). 그래서 시인은 약이 더 오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신자답게, 의롭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들 주변에서 보면, 경건하고 진실된 사람들이 꼭 성공하진 않는다. 성공이란 말이 우습지만, 세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오히려 누가 성공을 하는가? 세상적인 방법으로 열심을 내는 사람이 훨씬 잘된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뜻밖에도 자기의 자존심을 걸고 욕심을 내는 교회들이 더 잘된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잘 안 된다. 이런 현상이 꼭 들어 맞지는 않지만 보편적으로 그렇다. 그리고 신학교에 가는 학생들도 그렇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데 취직해서 잘 나가는 사람들이 신학교에 오지는 않는다. 그런 인물은 한 세대에 하나 내지 둘 밖에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은, 학업 성적 가지고 어디에 갈 데도 없고, 고시공부를 하여도 밤낮 떨어지고 하니까, “에라, 그냥 목사나 하자”하며, 신학교에 간 사람들이 의외로 더 많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그 일을 수행하시는 선의와 그리고 우리에 필요한 복종만이 요구되고 있다. 우리가 질문하는 것에 대한 답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 혼자 일하시고 “난 이렇게 한다” 하시면서, 실제로 우리가 별로 갑갑해 하지 않은 데서는 별일을 다 하시는 것이다. 홍해도 가르셨고, 그리고 돌 맞고 죽을 스데반을 성령과 지혜로 충만하게 하시고, 죽을 때에 그 얼굴이 천사같이 빛나게 하시지만, 지금 목회하는 나에게는 아무것도 안 주신다. 돌 맞고 죽을 스데반에게 주신 것을 지금 나에게 주었다면, 하다못해 장학금이라도 탈 것 아닌가?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는 아무 설명도 답도 없이 복종만 하라는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계시의 특성임을 알아야 된다.
성경의 계시에서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과 의로우시다는 것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외에는 별로 다른 이야기가 없다. 이것에 근거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우리가 지금 알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대부분 우회적으로, 간접적으로, 사탕발림 같이 슬쩍 넘어가고 만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시며, 의로우시니, 끝까지 견디는 자는 면류관을 받으리라”라고 말한다. 장차 우리에게 면류관을 주시고 미래에 열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수 있는 분이 왜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꿈에라도 한번 나타나셔서 “너 잘하고 있다”라는 말씀 한 마디 안 해 주시는가?
이것은 바로 계시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 특성을 모르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목적을 갖고 자신의 일을 하시는 데에 우리를 부르시고 그 일에 우리의 순종만을 요구하시는 것이 부당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5:17에 보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시다. 나는 여기에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계시의 정보적 차원과 지식적 차원을 몰아내려고 한다. 성경 계시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에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고 싶으신 일에 우리가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 계시의 올바른 요구이고 방향이다.
요즘은 데모하는 시절이므로, “교회의 사회참여가 옳으냐, 틀리냐?”라고 물어볼 수 있다. 이것에 대한 대답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커다란 차이가 생길 것이다. 소위 ‘사회구원론’으로 가면 사회참여를 해야 마땅하다. 보수주의적인 ‘개인구원론’으로 가면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다. “그럼, 방관만 하자”는 뜻인가? 그렇지는 않다. 문제는 “그 일을 어디에서부터 하여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누가 물을 틀어 놓아서 목욕탕의 물이 아파트에 가득히 흘러 넘친다면, 맨 처음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도꼭지를 먼저 잠그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물만 퍼낸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개인구원론자’는 “수도꼭지를 잠그자”라는 파(派)고, ‘사회 구원론자들’은 “물을 먼저 퍼내자”는 파(派)이다.
이것은 데모 전체에 대한 일반론은 아니다. 그 중에 이런 부작용도 있다는 얘기이다. 우리나라 민주화는 학생운동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다음과 같은 부분까지 확대되는 것은 잘못이다. “학교에서 공부하지 말고 데모하자”라는 것은 어쨌든 손해 보는 일이다. “공부하는 것보다 시대적인 상황으로서의 민주화가 먼저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학원에 가서 데모하는 것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지 않는가? 영어 학원에 와서 “우리가 지금 영어 배울 때냐, 나가서 데모해야지.” 이건 다른 것이다. 그 뉘앙스를 알겠는가?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이해했느냐에 따라서 꼭 이런 식으로 일을 한다. 말하자면 성경이 영어 학원이라고 생각해 보자. 영어 학원에 와서 “우리가 지금 영어 배울 때냐 전부 운동하러 나가자”라는 식으로 오해하면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는 것이다. 즉 영어 학원에 와서 “꽃꽂이를 하자”든가, “그 안에 있는 것으로 수학 배우자”든가, “영어 선생이 키가 크다, 옷이 좋다 나쁘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학원의 성격을 왜곡하는 경우가 된다. 성경계시 속에서는 언급도 않고 필요로 하지도 않는 부분들인데 성경계시가 목표로 이해한다면, 큰 부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정보적 차원에서의 계시,’ ‘지식이라는 개념에서의 계시’ 개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계시란 ‘하나님의 일하심, 그의 능동성과 주도권’을 중심 개념으로 담고 있다. 이 개념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신앙이 순종으로 열매맺게 된다. 신앙은 ‘가위 바위 보’로 정하거나, 투표로 정할 문제가 아니다.
히브리서 11:6에는 믿음에 관한 정의가 나온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 편에서 볼 때, 우리가 믿기 위해서 요구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이것만 있으면 믿겠다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정말 계시는가?” “하나님, 당신은 정말로 최종 결재자입니까?”라고 묻는다.
성경은 언제나 이 문제를 믿음의 항목으로 분류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증명해 주지 않겠지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성경계시를 오해하고 있는가? 성경은 우리가 증명을 요구하는 모든 사항에 대하여, 전부 믿으라고만 하고 증명은 안 해 주겠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보통 무슨 싸움을 하는가? 우리는 전도를 할 때에나 설교를 할 때에, 우리가 믿어야 하는 부분을 설명하려고 덤빈다. 성경이 목표로 하고 있지 않는 것을 우리가 목표로 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상담하는 편지들 중에 이런 것이 많이 있다. 어떤 사람은 주일 학교에서 교사를 하는데 너무나 답답해 한다. 왜냐하면 “내가 이 정도밖에 못 가르치는가”에 대한 자괴감을 갖는다. 이리하여, 자신에 대해서 화가가 나고, 교회에 대해서도 화가 나고,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에 대해서도 화가 난다. 그런데도 내가 알고 싶어하는 문제에 대하여 성경에 설마 답이 없으리라고는 감히 상상을 못한다. 그래서 아마 우리가 무식해서 그럴 것이라고 추정한다. 결국,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신학을 다시 공부해서 제대로 한번 가르쳐 보았으면 하는데 내 생각이 옳은가?” 하는 질문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내가 뭐라고 답하겠는가? “꿈 깨고, 당신의 직업에 충성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그런 것에 대한 답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원래부터 그런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이제 우리도 성경 계시란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가 있고 목표하시는 바가 있고 그것을 향하여 추진하시는 일들을 기록한 것”이라는 특성이 있다는 점에 대하여 일단 받아들이도록 하자. 또한 우리도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믿음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점에 대하여 동의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성경에는 하나님을 믿는 기준이나 믿을 수 있는 어떤 조건들을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주장하는 바는 그것이 성경의 일차적인 목표가 아니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백과사전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근거들은 얼마든지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를 향한 사랑인데 이것은 믿음의 선조들이 항복한 모습으로써 가장 뚜렷이 등장한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신의 신실하심을 한결 같이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성을 변함 없는 은혜와 자비로 드러내어 주신다.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하여 똑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고 하면 무엇이 증명되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도대체 얼마나 믿을 만한 분이시기에 백 살에 난 아들까지 바칠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유일하게 믿을 만한 근거로 제시하는 방법이다. 신약교회의 사도들은 복음 때문에 옥에 갇히고 매 맞고도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근거들이다. 성경은 이런 식으로 증거하지, “여기에 지옥이 있다. 보아라. 얼마나 무서운가? 믿을래, 안믿을래?” 이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
디모데후서 1:12에 보면, “이를 인하여 내가 또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는 말씀이 있다. 바울은 그가 하고 있는 일이 그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며, 그가 무슨 고난을 당하고 또 어떤 좌절되는 환경 속에 있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가 의지하는 예수를 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알고 있는 예수는 어떤 분이었는가?에 대하여, 우리가 요구하는 식으로는 바울 서신이 제시한 것은 없다. 바울은 기껏해야, “내가 삼층천에 갔다 왔다”고 말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더 자세하게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게 어디 있는가? 그게 무슨 계시인가? 내가 갔다 왔더니 아무 날 아무 시에 너 신학교에 간다고 되어 있더라.” 이래야 확실히 믿어지지, “갔다 왔는데 내가 그 말은 할 수 없다”가 뭔가? 그런데도 우리에게 간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무수한 고난과 말로 다할 수 없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그의 길을 기쁨으로 가고 있으며, 그를 이 길로 부르신 분에 대하여 100% 항복하고 있다. 이 점이 계시에 대한 증거가 된다. 달리 말하자면 성경이 우리에게 믿을 근거들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우리 식으로 믿을 만한 근거들을 제시하는 것이 그 일차적인 목표나 특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믿을 만한 근거나, 설명이나 증거를 제공하는 책이 아닌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에 가장 뚜렷한 차이가 나타난다. “다른 모든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은 계시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까지 정확하지 않다. “기독교만이 진리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들도 자기가 믿는 것을 진리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만이 진리라는 것이 구별이 안 되는가 하면, 성경 자체가 우리 만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만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성경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너희와 우리의 다른 점으로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구원이 있는데 너희에게는 없다”라든가, “우리는 진리이고 너희는 가짜”라든가, “우리 종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고 너희 종교는 너희들끼리 만든 것”이라는 식으로는 구별이 안 된다.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기독교는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
기독교인들이 보통 일반 종교와 기독교를 구별할 때 그 기준으로서 초월성을 제일 많이 꼽는다. 즉, “기독교는 초월종교이고, 다른 종교들은 자연종교”라고들 말한다. 혹은 “다른 일반 종교들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기독교는 신적인 것이다. 기독교는 신적인 개입, 즉 기적이 있고 다른 종교에는 그것이 없고 단지 추상적인 도 (道) 만 있을 뿐이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이지만, 이것마저도 옳지 않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종교일지라도 그 종교의 특성으로서 초월을 갖고 있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며, 종교는 무엇이든지 초월성을 그 특성으로 가진다. 그래서 아무리 낙후된 원시사회에도 종교가 있고, 그 종교의 종사자는 하다못해 무당일지라도 초월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내가 가깝게 지냈던 선배 한 분은 신앙이 아주 순수하신 분인데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깨끗하게 해 왔다. 고등학교 다닐 때 바로 옆집에서 무당을 불러서 푸닥거리를 하길래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그러나 가서 뭐라고 싸울 수는 없고 마음의 안타까움을 갖고 보고 있는데 무당이 칼을 갈아서 칼날 위에 올라서서 춤을 추었다. 또 신이 들려서 주문을 외우며 다니더니, 돼지머리에 식칼을 콱 꽂고 탁 뒤집어 놓으니까 그것이 똑바로 서는 것을 보았다. 중심을 잡아 세워도 그게 잘 안 서는데 식칼로 돼지머리를 아무 데나 콱 찍어서 칼자루를 거꾸로 세워 놓아도, 딱 서는 것이다. 그래서, 이분이 속으로 “하나님 넘어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더니, 정말로 딱 넘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무당이 얼굴이 하얘지더니 다시 한참 춤을 추고 딱 세우니까 다시 서 길래, 또 “넘어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였더니 또 딱 넘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무당이 싹 돌아보더니 “여기 예수 믿는 놈 있으면 다 나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기독교 외에는 초월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어떤 순간에는 마귀가 더욱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초월성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구별하는 차이점이 아니다. 기독교와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른 것은 계시이다. 이 때 우리가 말하는 계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스스로 답을 해보라.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느냐”하는 데 있다. 기독교는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시작하시고 끝내신다. 다른 모든 종교는 어떤가? 그들의 신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그들은 인간이 계획하고 하고 싶어하는 일에 동원 되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리고 신들도 가끔 화가 나면 내가 일을 방해하므로, 그래서 진사를 해야 되는 일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제물을 드려 화를 사그러뜨린다. 즉, 신들의 진노를 풀어주는 일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제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에 있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근본적으로 범신론이다. 범신론이란 각자가 신이 되는 것이다. 내가 ‘나’라는 존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내가 목표를 정하고 내가 방법을 정한다. 신이란, 내가 해 낼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으며, 내게 없는 것을 갖고 있는 존재이므로 내 목표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하여 동원되는 존재일 뿐이다. 그를 동원하기 위하여 주문을 외우거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신다. 우리는 그에게 순종할 뿐이다. 다른 모든 종교는 도를 깨우치며, 나를 극대화하고 내 안에 부족한 것을 채워나가는 것으로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데 반해서, 기독교의 신앙이 가장 많이 요구하는 것은 순종이며, 자기 부인이다. 얼마나 다른가.
한국교회는 이 점에 대하여 시급히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려는 식으로 신앙을 이해하고 있다. 마치 알라딘의 램프와 같이, 램프를 문지르면 마왕이 나타나서 알라딘을 ‘주인님’이라고 부른다. 힘은 마왕이 갖고 실제로 주인은 알라딘이다. 알라딘이 램프만 문지르면 마왕이 나타나서 알라딘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된다. 즉, 하나님을 ‘내 손에 넣고 장악하려고 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기도, 금식, 헌금’ 등 종교적인 일에 힘쓰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나를 거룩하게 자라가도록 요구하신 것이다.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것이 기도의 중심적인 목표이다.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나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이 내 말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 마치 알라딘이 램프를 문지르듯이 내가 기도 많이 하고 정직하고 거룩하게 살아서 내가 하고 싶은 욕심과 내가 원하는 뜻을 하나님이 꼭 이루어 주게 만드는 자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니까 열심히 살며, 나를 위한 봉사가 아닌 것 같은 데도, 나중에 가서 보면 사실은 ‘신성한 사기’가 되는 셈이다. 이것이 오늘 날 한국교회에서 가장 오해 되고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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