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예배당)에서의 공적인 경건의 의무수행인 예배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이 목사에 의해 행해지는 의무들이다. 목사는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입”으로서와 “하나님께로 향한 회중의 입”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점에서 이중의 의무와 책임을 지는 자인 것이다. 골 4: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보내는 서신(골로새서)과 관련하여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교회)에게 당부하기를, 그 편지를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처럼 읽게 하라는 것은 교회의 회중들을 향하는 당부로서, 교회에서 공적으로 읽도록 하라는 말이었다. 즉 성도들이 함께 모인 예배 중에 읽으라는 것이다. 사실 골로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골로새서를 수신할 당시에 교회당에 이미 구비되어 있었던 성경은 구약성경이었다. 그렇지만 신약성경도 점차 여러 형태로 기록되어 읽히기 시작했으니, 사도들의 증언을 모은 사복음서 뿐 아니라 사도 바울서신의 경우처럼 편지글로 기록되어 회람되어 읽히기도 했던 것이다. 골 4:16절에서 사도가 그의 서신을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돌려 읽도록 한 것이 바로 그 같은 예다. 한편, 행 13:27절에 있는 “안식일마다 외우는바”라는 말은 좀 더 정확히 하면 “읽는바”라고 해야 한다. 즉 안식일마다 예배 때에 성경본문을 읽은 것(낭독함)이다. 오늘날의 예배에서는 성경읽기를 성도들 가운데서 돌아가며 하는 경우를 볼 수 있으나, 신약성경에서 안식일에 성경을 읽는 것은 예배 중에 낭독함을 말하며, 그것은 공적인 사역자들이 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눅 4:16절에서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더라는 말씀의 나타내는 바는, 그처럼 예수께서 예배 때에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을 읽는(낭독하는) 사역을 감당하셨음을 언급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로교회들에서는 말씀 사역자인 목사가 성경을 낭독했는데, 예배 때에 성경을 읽는 일은 고전 14:6절에서 언급한 “계시”의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 사역자인 목사가 낭독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THE DIRECTORY FOR THE PUBLICK WORSHIP OF GOD, 1645)에서는 성경 봉독에 대하여 이르기를 “공중 예배의 한 순서인 성경 봉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지와 순종을 고백하는 시간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훈육하기 위해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것으로 목사와 교사(교수)가 진행한다.”고 명시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배 중에 성경을 낭독하는 일은 목사가 예배당에서 행하는 경건의 의무에 속하는 일이다. 임의로 성도들 가운데로 양보할 수 있는 예배의 부수적인 행위가 아니라, 말씀의 사역자인 목사가 감당해야 마땅한 경건의 의무에 속하는 것이다. 사도들과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친히 그러한 의무를 따라 예배 때에 성경 말씀을 낭독했으니, 바로 이를 바탕으로 하여 설교가 있다는 사실을 눅 4:20-21절에 있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낭독하셨을 뿐 아니라,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시고 가르치시는 일을 수행하셨던 것이 방증하고 있다. 또한 행 13:15절은 안식일에 회당장이 이르기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고 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구약 성경)을 통해 회중에게 설교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4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행적이나 사도행전 13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행적은 공통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과 그 나타내는바 뜻을 설교하여 가르치는 일이 교회의 공적인 사역자들의 중요한 경건의 의무였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
네 눈을 빼어 버리라
장로교회의 모든 신앙과 목회에 관한 전반을 다룬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표준문서들이 산출된 지 300년을 훌쩍 넘겨 400년을 바라보고 있는 작금에도, 전 세계의 장로교회들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의 가치와 효용을 알고 실천하는 일은 아직도 지난하기만 하다. 이 글을 쓰는 본인 역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재를 시작으로, 웨스트민스터(혹은 스코틀랜드) 가정예배모범의 해설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의 교재를 연이어 고백과 문답이라는 출판사의 이름으로 발표했지만, 저자와 출판사의 지명도는 차치하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활용한 교재와 해설서라는 뜻 깊은 의미가 무색하리만치의 반응을 경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확신하건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신적 권위(Jure Divino)와 성경에 따른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에 근거하는 가장 원천적이며 표준임이 분명하다. 특별히 개혁신학에 근거하는 장로교회의 목회를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역자들과 직분자들에게,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지침서이자 가장 풍성한 원리를 담고 있는 실용서이기까지 하다. 단언컨대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1878-1961)의 『목회학』과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중요한 필독서들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이다.
안타깝게도 조선에 장로교회가 전래될 당시에 이미 유럽대륙은 자유주의의 물결이 휩쓸고 간 후였고 북미대륙에서도 장로교회의 신학이 거의 몰락하던 상황이었기에, 선교 초기부터 장로교회들은 이미 초교파적인 형편이었다. 특히나 그 시기는 경건주의적인 풍토에서 더욱 나간 19세기 오순절 은사주의운동이 한참 붐을 이루던 시기였기에, 서양 장로교회 선교사들과 조선의 예수교 장로회 신자들도 1907년 평양에서의 구르고 울부짖으며 죄를 자복하는 현상들이 과연 성경에 합당한 역사인지에 대한 인식조차 결여하고 있었다. 그런 취약한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지닌 상황에서 일제의 침략을 받았던 역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에 있어서는 치명적이며 결정적인 퇴보와 몰락의 역사였다. 비록 양적으로는 장로교회들의 교세가 여전했었지만 신학과 신앙은 이미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풍토와 지교회들의 은사주의 성향으로 인해 장로교회의 정체성은 사실상 몰락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장로교회 뿐 아니라 개신교 전체에 있어서, 모든 이단(heresy)과 사이비(pseudo)들이 바로 신비주의에 가까운 은사주의를 추구하는 가운데서 생겨났다. ‘백백교’나 ‘천부교’와 같은 이단과 사이비들이 그들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근거가 항상 이적과 표적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현대의 구원파나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적인 이단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신앙고백서 제1장은 1항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방식들은 이제 종결되었다.”고 명백히 계시의 종결을 말하고 있고, 7항에서는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인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 “평범한 수단”(ordinary means)을 적절히 사용함으로 충분히 가능함을 명시하고 있다.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가장 먼저(기초이자 기본으로) 강조하는 것이 특별하고 비상적인 계시들의 종결과 오직 성경에 착념하는 것으로서의 신앙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심지어 은사주의나 신비주의와 같은 이적이나 표적의 현상들은 취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오직 성경에 착념하는 일반적이고 평범한(ordinary) 장로교회의 신앙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같은 경우는 또 하나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교회의 직원들과 그 직원들에 의해 운용되는 장로교회의 정치가 무엇인지를 다루는 정치모범에서도 2조에서 “교회 직원에 관하여” 명시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시려고 임명하신 직원 중에 사도, 복음 전하는 자, 선지자와 같은 (특별하고) 임시적인 직원(혹은 ‘비상직원’)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제 중지되었다.”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반면에 “목사, 교사, 교회를 다스리는 다른 자들(혹은 ‘치리장로’), 그리고 집사와 같은 일반적(통상적)이고 항존하는 직원들”만이 항상 교회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장로교회의 직원들 중 누구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는다거나, 이적 혹은 방언을 하는 등의 특별하고 임시적이었던 이적이나 표적을 행하지 않으며, 오직 성경에 착념하여 그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일(마 28:20)에 전념할 뿐이다. 단언컨대 이에 지나쳐 직통계시나 이적을 추구하는 자들은 결코 장로교회의 통상직원이자 항존하는 직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미 안목의 정욕에 가까운 보고 체험하는 것에 오래도록 노출되어 왔다. 그러므로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기적이 상식이 되는” 희한한 논리를 앞세운다. 하지만 우리가 그 동안 보아왔던 체험적인 은사주의 신앙이 얼마나 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의 포자를 퍼뜨렸는가! 마 18:9절 말씀에서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제라도 눈으로 보고 만져 체험하는 것을 더욱 신뢰하는 은사주의적인 종교심을 빼어 내버리고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던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신 29:29)는 일에 착념하는 본래의 장로교회의 신앙으로 속히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그것이야말로 “나타난 일”이니,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바로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는 가장 표준이며 기본이 되는 장로교회 신앙의 모범인 것이다!
장대선 목사 (가마산장로교회 담임, 교회를 위한 개혁주의연구회 회원) |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967&msection=3&ssection=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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