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23-25. 하나님의 사랑, 임마누엘 | |
1.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세심하게 표현할 때 ‘사랑’을 서술하는 여러 말을 첨가한다. 헬라인들은 여러 가지 사랑을 각기 다른 말로 이야기한다. 우리말에서 사랑이라고 번역되었어도 어떤 때는 친구사이의 사랑을 혹은 이기적인 사랑을 또는 이타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헬라인들이 사용하는 남녀간의 이기적인 사랑을 헬라인들은 사랑(eros)’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기적인 사랑(eros)에 대하여 그레고리 나지안젠은‘뜨겁지만 지속하지 못하는 욕망’이라고 이야기했다. 인간은 원래 그 속성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의 특성을 잘 표현하는 현대인들은 에로스가 낮설지 않다. 그러나 에로스는 그 이기적인 특성으로 인해 여러 사랑의 표현들 가운데서 가장 저급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신약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헬라인들이 사랑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은 친구 사이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랑(pileo)’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을 애정에 찬 관심을 가지고 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부부나 친구사이의 우정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고, 아름다운 관계를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한 소식을 전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를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요한복음20:2)’라고 말했는데, 이 때 사용한 ‘사랑’이‘사랑(pileo)’이라는 말이다. 그뿐 아니라 필레오라는 이 사랑은 기독교적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몇 번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한복음16:27)’라는 구절에서 사용된 사랑은‘사랑(pileo)’이라는 말이다. 신약 성경에서 주로 언급되는 사랑이라는 말은‘사랑(agaphe)’이다. 이 말은 고전 헬라어에서는 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말이다. 주전 2세기 경에 쓰인 ‘아리스테아스의 편지(The Letter of Aristeas)’에서는 ‘경건은 아름다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 능력은 하나님의 선물인‘사랑(agaphe)’가운데 놓여 있다고 말한다.‘사랑(agaphe)’과‘사랑(pileo)’의 차이점은 아가페에는 필레오가 가지고 있는 온화함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가페라는 사랑은 전인격적인 역사를 전제로 하는 말일 뿐 아니라, 아가페는 정신과 그리고 의지와 관계있는 말이다. 즉, 기독교에서의 사랑인 아가페는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사려깊은 확신이고, 의지의 신중한 성취이며 승리이고 이타적이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굳이 이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2. 예수님의 사랑은 그래서 ‘아가페’이다. 이타적인 사랑이라는 말이다. 즉,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로마서5:8)’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의 이유가 ‘아직 죄인’의 상황에 있는 ‘나’를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4:25)’라고 바울은 말한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상태가 ‘아직 죄인’일지라도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나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당연히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사랑(agaphe)’에 근거한다. 더욱이 아가페는 마음의 사려깊은 확신이고, 의지의 신중한 성취이며 승리이고 이타적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오심은 아가페 그 자체이다. 바울은 그렇게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의 실제적인 모습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2:6-8)’라고 이야기한다. 이 놀라운 노래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이 지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사랑은 ‘임마누엘’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말에 집약된다. 이 임마누엘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을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로 이야기했고,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향해‘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애굽기19:4)’라고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우리들 가운데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 즉 성육신이라는 이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 그리고 우리의 역사 안에 드러나는 사건이 바로 성탄절이 된다. 따라서 성탄을 지키고, 축하하고 기뻐한다는 말은 우리의 역사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을 기뻐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왕으로 오셨다. 임마누엘의 실제적인 적용은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이다. 과거에는 좋은 왕, 특별히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왕을 만나는 것은 백성들에게는 더없이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의 백성 모두에게 공의롭고 정의로운 왕을 만난다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사랑을 드러내는 왕을 만남은 그 자체가 축복이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랑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든 이들의 왕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한복음14:26)’라고 약속하신다. 성령 하나님은 임마누엘 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매년 성탄을 맞이한다. 찬송가 가사 가운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면서 ‘저 분요하던 세상이 참 고요하도다’라는 말이 있다. 예수님의 오심은 세상을 분요하게 만들었고, 지금도 분요하기만 하다. 그럴게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기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과 다른 기쁨을 가진다.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남으로 얻을 수 있는 사랑이 성탄에 있다. 우리를 ‘사랑(agaphe)’하심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임마누엘’이 바로 그 기쁨이다. 연락처 ☎070-7817-3627, 010-8952-3627(오성환 목사) E-Mail : shsiny@hanmail.net 주소 : 광주시 서구 계수로51번길 4-4(쌍촌동 1318-1) 20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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