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목사 특강(5월14일)
아래 내용은 2012년 5월 14일 총회목사장로수양회의 특강을 요약, 발췌한 것으로 강의의 상당부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단지 박 목사님의 강의 취지만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에 혹 미흡한 면이 있어도 양해를 구합니다. <발췌 / 송영찬 국장>
제목 : 산 제사로 살아가는 목사(장로)의 삶
본문 : 빌립보서 3장 17-21절
빌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나를 본 받으라’ 간단히 이해할 정도의 이야기기 아니다. 18-19절에서 밝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와 예수께서 보이신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 롬 12:1-2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 = 삶으로 드리는 제물 – 이것은 죽은 제물과 비교된다.
바울의 생애는 결과적으로 믿음의 업적으로 보이지만 본인은 훌륭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순종했을 뿐이다. 삶을 종교화하지 않았다. 신앙과 생활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 올바른 신앙은 훌륭한 삶과는 다른 것이다. 혼인을 하는 것도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가정을 세우고 자녀를 기르는 것도 구체적인 삶이다. 세상의 영웅주의에 빠져 살기 쉽다. 모든 것을 명분을 가지고 상대방을 누르며 살려고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말씀은 = ‘나를 본받으라’와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목사는 장로와 모든 성도들과 그 가족들까지 감수하는 것이다. 억울해 할 필요 없다. 그러나 무책임하면 안 된다. 자식들 가운데서는 내 마음에 합당하지 않은 자식도 나오기 마련이다.
생활의 최전선에는 여성들이 서 있다. 남자들 군대생활은 비교도 할 수 없다. 여자들은 공주로 태어나 엄마로 바뀐다. 옛날 처녀시절 사진보고 희희낙락거릴 여유가 없다. 아기에게 하나라도 더 먹여야 할 만큼 처절하게 살아간다. 그만큼 엄마는 전사와 같다.
목사는 최전선에 서 있는 지휘자와 같다. 후방에서 책을 쓰고 유명세를 타는 교수가 아니다. 때문에 목사는 정치가처럼 되면 안 된다. 세상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 필요가 없다. 나에게 주어진 싸움만 할 뿐이다. 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 별 짓 다하는 엄마처럼 교회를 위해 별짓 다하는 것이 목사와 장로이다. 그럴 때 욕을 먹게 되어 있다. 그것도 감수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후서에서 사도권 변호에 심혈을 기울인다. 바울이 이 변명을 자신의 서신서들에서도 거의 반절을 할애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한 모든 사람들을 항복시키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바울은 자신을 질그릇으로 비유하고 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보배는 앞 절의 “고후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에 나와 있다.
여기에서 질그릇은 우리 육체를 말한다. 동시에 우리들의 일상생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일상생활은 ‘산 제사를 드리라’와 일치한다.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한다. 힘든 일도 그냥 넘어가는 것이 전부이지 능력이 있어 넘어간 것은 아니다. 때문에 고후 4:7은 ‘우리는 욕설과 분노로 견뎌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무에게도 내 짐을 넘길 수 없어서 내가 당해야 했다는 것이다. 으스스한 삶을 살아가는 거다.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을 가는 거다. 허망하기도 하고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목사가 현실에서 떠나 있다면 목사가 아니다.
우리는 목사다. 우리는 장로이다. 다른 무엇으로 우리 책임을 핑계할 수 없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고후 11: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11:18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11: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11:20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11:21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11: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11: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이론이 아니라 ‘내 발로 그렇게 살았다’라고 말한다. 잘하고 못하고는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이다는 의미이다.
11: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나에게는 염려와 고민만 가득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삶이었다. 내 인생은 나 밖에 책임질 사람이 없다. 그 길을 내가 아니면 누가 가겠는가? 모든 고생을 죽도록 했다. 산제사로 바쳤다.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다.
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11: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11:33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이 말의 의미는 “죽으면 죽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한다. 매일 벌어지는 일에 충성하자. 오늘 나에게 주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고는 예고 없어 터지는 것이다. 오늘은 무슨 위협과 시험과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안 되면 우는 것이다. 운다고 하나님께서 면제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그냥 견디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다. 이것도 믿음의 한 행위이다. 때문에 누구를 원망해서 자기 책임을 벗어나려 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할 줄 아는 것을 하라. 할 줄 모르는 것을 하면 비난 받는다. 우리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믿어라.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을 다른 사람에게 내던지지 말라.
오직 죄인들을 구원하시며 연약한 자를 들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만 의지할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시험에 들지 말자.
기독교개혁신보
권징 할 용기 (1) (0) | 2019.03.06 |
---|---|
교회 전통 회복 힘쓰자 공동체가 밝아졌다 (0) | 2019.02.12 |
누가 교회의 사역자가 될 수 있는가? (0) | 2018.12.18 |
불편한 진실 (0) | 2018.12.12 |
목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0) | 2018.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