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말하는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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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두 권의 예배에 관한 모범들(가정예배모범과 예배모범)을 살피고 해설하는 과정을 통해, 그것이 바로 장로교회의 중요한 목회지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유익을 얻었다. 즉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의해 산출된 가정예배모범(The Directory for Family Worship)과 예배모범(the Directory for the Publick Worship of God)은 각각 가정에서의 목회지침과 교회에서의 목회지침이라는 것이다.
사실 가정예배모범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채택하여 발표했다는 점에서 ‘스코틀랜드 가정예배모범’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한 가정의 목회자인 가장(Head of family)이 어떻게 가정에서 목회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다. 반면에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교회의 공적인 예배모범이자 목회지침으로서, 일반적으로 목회자가 어떻게 교회에서 목회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다. 그러므로 장로교회로서의 지교회는 공적인 사역자인 목사와 동역하는 각 가정의 가장들이 목회하는 형태인 것이다.
그처럼 가장으로서 자신의 가정에서 소규모의 목회사역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은, 교회에도 실제적인 유익을 끼친다. 특별히 가정예배의 중요성 가운데서 우리들은 전통적으로 장로교회의 신자들, 특히 가장들이 목사와 공감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한 가지 힌트(hint)를 얻을 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한 가정 안에서 가장이 실제적인 목회사역을 행함으로써 공적인 사역자인 목사가 감당할 역할과 부담을 실감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처럼 가정 안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가족들 가운데서 목회를 감당하는 것은, 교회의 질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훈련장이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의 질서를 강조하는데, 특별히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움 것이라.”(고전 14:33-35)고 하여, 가정의 가장인 남편의 가르침에 여자가 복속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현대의 페미니즘(feminism)적 신학의 기류에 편승하여 사도 바울의 그러한 언급을 당시 사회의 가부장적인 특수성에 기인하는 일시적인 것일 뿐, 항구적인 원리(Canon)가 될 수는 없다고 해석하지만, 사도는 분명 그것을 창 3:16절의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말씀(본문은 이를 더욱 율법이라고 했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특수성을 띤 교훈으로 말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분명 그 구절들 가운데서 교회의 질서가 가정에서의 질서를 기초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창 3:16절에서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러한 남녀 간의 질서는 창 2:18절에서 나타내는바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는 말씀에까지 소급되며, 그러한 질서는 타락으로 말미암은 부패의 결과가 아니라 애초부터 부여된 창조질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고전 14:33-35절 말씀을 거스르는 것은 창조질서에까지 역행하는 부끄러운 일이 분명하다.
한편, 그러한 가정의 질서는 또한 교회의 질서와도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즉 가정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하는 가장들은, 그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교회에서의 목회적인 질서를 채득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한 가정의 가장으로 목회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런 가정들이 모인 한 교회의 목사로서 목회하는 일은 여간 사람의 능력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한 경험 가운데서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교회에서의 목회라는 것은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에야 목회라는 것이 고수익을 보장하고 편안한 노후와 자손들의 생활기반까지 제공해주는 희한한 직업군이 되어버리기도 했지만, 참된 목회는 결코 사람의 능력과 의지로 감당할 수 없는 두려운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정 4:20)는 사도 바울의 말은, 그 자신도 결코 지혜 있는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서만 감당한 것이 목회사역임을 증언하는 것이다. 즉 사도는 복음에 관해(about Gospel) 말하는 사역을 한 것이 아니라, 복음(by the Gospel)의 사역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 가운데서 교만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가 행한 것은 전부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것(능력)들일 뿐이니 말이다.
그러나 소위 ‘평신도 신학’(theology of the laity)이라는 것이 주창되면서 ‘평신도 사역’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어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개혁과 회복을 주장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진영 가운데서도 그런 맥락의 현상이 동일한 맥락으로 이뤄지고 있으니, 목회의 직분을 감당하지 않는 자가 목회에 관해 강연을 한다거나 하는 일들이 자꾸 일어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직분이 교회에서 공적인 가르치는 직분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가 아무리 교회와 목회에 관련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바른 행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가르친 것 자체가 고전 4:20절에서 사도가 말한 “말”(사람의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날에는 신학을 가르치는 전반이 모두 뒤엉켜버려서 사실상 학위를 지니지 않은 목사가 목회에 대해 신학교에서 가르칠 수가 없고, 학위를 지닌 목사 아닌 자가 목회에 대해 신학교에서 가르칠 수는 있는 희한한 형국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교회에서의 공적인 직분에는 크게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여러 교회들을 다니며 가르치는 일을 감당하기에 바쁜 자들이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다. 직분은 감당하지 않으면서 직분에 대해 가르치는가 하면, 목회는 하지 않으면서 목회에 대해 훈수를 두는 무질서한 일이 개혁진영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현상들은 모두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권면한 무질서한 모습에 불과하다. 복음에 관해 말하는 것이 복음사역이 아니고, 복음을 말하는 것이 복음사역임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질서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질서 있는 사역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 가운데 있는 것이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바로 그것이 고전 4:20절에서 사도가 말하는바, 곧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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