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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에서 배운 신앙이 왜 실천되지 못할까?|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2. 1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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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의 개신교 현실에 있어서 가장 시급하게 대두되어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신앙과 삶의 괴리일 것이다. 예배당에서 아무리 복음의 진리를 가르쳐도, 신자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더욱이 신앙의 실천현장에서는 도무지 복음의 진리가 실천되지를 않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현실은 비단 대한민국의 개신교에 있어서의 문제만이 아닌데, 특히 유럽에 비해 기독교 문화가 비교적 현저한 북미대륙에서도 신앙과 삶의 괴리로 말미암은 신자들의 무능력의 문제가 이미 수면으로 떠올라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왜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예배당에서 함께 모여 배운 진리에를 따라 삶으로 실천하지 못할까? 왜 예배당에서의 신자들의 문화와 주중의 삶에서의 신자들의 문화가 전혀 별개인 이중적 구조 가운데 처하게 되는가? 이러한 현실적 물음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지식 일변도의 스콜라 신학(Scholastic Theology)을 답습한 폐단이라고 말하면서, 신앙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음을 강조하곤 하는데, 그러한 입장은 이미 18세기에 영국에서 웨슬레 형제(찰스와 존)에 의해 성공회에서 분리한 감리교(Methodism)가 시작되게 한 견해다.

 

그러나 감리교단이 현제 어떤 모습인지를 생각한다면, 실천의 문제는 결코 신자 개개인의 의지와 결단에 맡겨진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이를 수가 있을 것이다.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여 인간의 의지에 대해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의 입장에 근접하는 완전주의”(perfectionism)를 표방하던 감리교회조차도 부패하고 무능한 개신교 신자들의 대세에서 분리되지 못하고 있으니, 그처럼 인간의 의지와 실천을 강조하는 입장이 결코 대안이 되지 못함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을 촉구하는 그러한 대안모색은 또 다른 형태로 변모하여 여전히 주장되곤 하는데, 가장 최근에는 영국 성공회 주교 겸 기독교 신약학자인 톰 라이트(N.T Wright, 1948-) 주교를 대표로 전통적인 칭의론(Justification by Faith)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행함(실천)에 의한 칭의의 최종적 완성을 주장하는 형태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일련의 비판과 대안들도 사실은 예배당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의 문화라는 일종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는 못한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웨슬레의 감리교와 새관점 학파(the New Perspective of Paul) 모두 기본적으로 개인의 신앙과 결단을 강조하지만, 사실상 신자 개인의 구체적인 신앙과 실천의 틀에 정확하게 집중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예배당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 문화의 폐단 가운데서 다만 새로운 동인들(알미니우스의 사상과 바울에 대한 새관점)만을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구약시대에서부터 신앙은 공동체적인 배경과 함께 개인적인 바탕 가운데서도 제시되어 있었는데, 특히 각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의 틀은 구약의 족장들과 신약의 전도자들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그러므로 구약의 의식법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폐기하고 도덕법에 속하는 항구적인 율법을 계승한 신약교회가 제정한 교회의 직원선출의 조건이 바로 자기 집(가정)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딤전 4:4, 12)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은 신약교회가 얼마나 공동체로서의 신앙뿐 아니라 개인과 가정에서의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했었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사실 구약과 신약은 공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3:15)이라는 말씀을 따라, 모든 세대의 신앙이 일치하는 한 신앙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할례 받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광야 교회)과 마음에 할례를 받은 신약의 성도들(신약 교회) 모두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의 가솔(one's family), 이삭과 그의 가솔, 뿐만 아니라 신약의 모든 신자들과 그들의 가솔들에게 같은 하나님을 아는 신앙을 제시하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에 할례 받은 자이며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이기도 한 사도 바울은,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고 했을 뿐 아니라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가솔들에게) ”(32)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참된 신앙은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가정, 그리고 개인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이고도 유기적으로 제시되었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를 지체(body)로 언급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과 가정, 그리고 신앙 공동체 모두가 총체적이고도 유기적으로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을 간과한 것이 무교회주의(Non-church movement)로써, 그 기원은 이미 재세례파에게서, 그리고 그 이전 초대 이단들에게서도 발견되는 뿌리 깊고 치명적인 오류다. 개인과 가정을 등한히 하는 교회공동체 중심의 신앙 패턴도 문제지만, 가정 혹은 개인만을 강조하는 신앙 패턴 또한 문제임을 역사 가운데서 이미 충분히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가정예배모범(The Directory for Family Worship, 1647), 결코 가정예배에 관한 모범만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와, 심지어는 국가 전체에까지 확장되는 의미에서의 예배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스코틀랜드 가정예배모범은, 예배당에서 배운 신앙을 가지고서 사회에 실천하는 방식이 아니라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를 가정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드리도록 하는 방식으로 확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예배모범의 실천은, 단순히 윤리·도덕적인 행동강령들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삶 자체를 강조하는 성격이다.

 

무엇보다 이 같은 스코틀랜드 가정예배모범의 성격은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 제1문에서 말하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 그리고 제네바 교리문답 제1문에서 언급한 목적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추구할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그것은 또한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즐거움이다)인데, 그러한 영광돌림의 본질이 바로 제네바 교리문답 제1문이 말하는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4)고 한 말씀이 가르쳐주듯,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서의 진리 가운데 드리는 영적 예배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의 크고 제일되는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예배당에서 배운 신앙이 왜 실천되지 못할까?’라고 하는 물음에는 바로 그러한 목적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다. 우리가 예배드림 가운데 삶(생활)에서 신앙을 실천할 어떤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배드리도록(영광돌리도록) 삶이 있는 것이다. 바로 그처럼 예배드리기 위하여 있는 삶이 모두 신앙의 실천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기초적인 진리를 대부분의 신자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그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배 때 얻은 신앙의 유익을 가지고서 삶에 실천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참된 신앙은 그와는 정반대로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교회 가운데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을 추구하는 삶 자체다. 그 자체로 신앙이요 실천이지, 그것 외에 별도로 실천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것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고 하신 주님의 가르침이다. 그 외에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은, 그에 더하시는 은총(은혜)에 다름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써 아는 영과 진리의 예배 가운데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즉 이 같은 진리를 힘써 알자! 영과 진리의 예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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