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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은혜”인가?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2. 25.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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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신학대학원 학생 시절에 목회 현장에서 사역하시는 교단파송 교수로부터 성도들은 목사의 넥타이 색깔로도 은혜를 받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얼핏 그 발언은 은혜에 대한 비유적인 수사(a figure of speech)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부연설명을 통해 그 교수는 목사의 사소한 행동이나 심지어 옷매무세까지도 성도들에게 은혜로 작용할 수 있다고 강의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접하곤 하는 은혜는 찬양 가운데서 복받쳐 오르는 뭉클한 그 무엇일 것이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치는 가운데 가사 한 소절 한 소절이 생생히 마음에 와 닿을 때에, 흔히 은혜 받았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조직신학 서적들과 교리서들에서 다루고 있는 신앙의 체계는 그 시작에서부터 계시”(revelation)를 다루면서 은혜 언약”(the Covenant of Grace)이라는 용어로 은혜를 다루고 있다. 아울러 계시에 대한 정의와 설명들, 그리고 은혜 언약에 대한 정의와 설명 사이에는 인간의 전적 타락자유 의지에 관한 설명들이 선행되어 있어서, 은혜 언약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의 의지나 참여가 전혀 배제되는 의미의 언약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순서에 있어서는 정통적인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이나 교리문답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대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을 보면 제1장에서 성경에 대하여다룬 뒤, 6장에서 인간의 타락, , 그리고 그에 대한 형벌에 대하여언급한 다음에 제7장에서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다룬 이후, 8장에서는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하여다루고 있으니, 타락한 인간이 오직 중보자 그리스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성경의 계시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러한 전제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제18장에서야 비로소 은혜와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언급함으로써 은혜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성경이 계시하는 은혜,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속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확신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 정통신학에서의 은혜의 언급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을 따르는 거의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은혜론은 펠라기우스주의의 사상에 대한 반론 가운데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의 역사로서 은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도르트 신조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 미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타락 후 선택혹은 타락이 고려된 선택으로서의 예정개념을 가장 원초적인 대지로 삼은 가운데서, 17세기 계몽주의의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신학의 변질 가운데서, 18세기 이후의 경건주의나 부흥주의의 신학풍토 가운데서, 은혜는 점차 인간에게 촉구되거나 취해지는 인식 혹은 의지의 문제로 뚜렷하게 변화하고 말았다.

 

따라서 18세기 이후,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보편적이 된 은혜의 이해는, 얼마든지 찬양 가운데서 복받쳐 오르는 뭉클한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것이며, 특히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의 신학이론을 배경으로 하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거의 모든 감정들과 인식들이 모두 은혜로 이해될 수가 있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광범위한 은혜의 이해 가운데서 일반 은혜”(common grace)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 변혁의 타당성까지도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잘 아는 것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에서 성경에 대하여다룰 때에 기본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일반(자연) 계시의 완전함과 타락으로 말미암은 불충분성, 그리고 특별계시의 필연성이다.

 

마찬가지로 은혜에 있어서 일반 은혜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있을 만큼 완전하지 못하며, 오직 특별 은혜인 일련의 성령의 내적 사역 가운데서의 참된 지식(성경의 진리)만이 구원을 확신케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도 달리 이해하자면, 제네바 교리문답 제1문이 언급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비로소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출처가 어디인가? 바로 그 특별한 은혜의 출처를 이해한다면 비로소 우리들이 왜 시편 찬송을 합당한 예배송으로 규정하는지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인데, 한마디로 그 모든 거룩함과 은혜의 출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외에 다른 곳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의 출처이며,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려지는 시편송이야말로 예배에 합당한 은혜의 수단이니, 말씀과 성례, 그리고 시편을 노래하는 것과 기도로서 이뤄지는 개혁된 교회인 장로교회의 예배형식은 바로 그러한 은혜의 이해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16: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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