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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고난”(crucifixion)을 기념하기를 원하셨는가?|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3. 15.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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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예언을 친히 성취하셨을 뿐 아니라, 구약의 예표(antitype) 된 바를 완성하신 점에서 메시아(messiah)이심이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그런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일반 계시로서의 예수 체험이 아니라 특별 계시로서의 성경 계시로서만 비로소 파악될 수 있으며, 그 조차도 오직 성령께서 지도하시는 만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성격이다.

 

그러나 성자 예수께서 이 땅 가운데 그리스도로 오셨을 때에, 그는 친히 구약의 예언과 예표들을 성취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기념하도록 당부하시기도 하셨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찬”(the Lord's Supper)이다. 22:14-20절에서 예수께서는 친히 만찬을 배설하시어 성찬을 제정하시며 이르시기를,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do this in the remembrance of me)고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기념하기를 원하신 것은 친히 세례자 요한을 통해 제정하신 세례와 더불어 성찬이 유일하다.

 

그런데 세례는 신자가 단 한 번 경험하게 되는 성례(sacrament)인데 반해 성찬은 빈번하게 반복되어 경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신자들이 유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념이다. 따라서 장로교회에서는 예수께서 친히 세례자 요한을 통해 제정하신 세례(3:15)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시어 제정하신 성찬(22:19) 외에 특별히 기념할 것(ceremony)은 없다. 바로 이러한 원리에 따라 구약의 모든 절기들과 기념일 뿐 아니라, 신약 시대 이후의 모든 절기들(부활절, 성탄절, 사순절 따위의 소위 교회력에 따른 모든 절기들과 기념일)을 거부하는 것이 장로교회 신앙의 본론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개신교, 그 가운데서 장로교회들조차 성탄절과 부활절, 심지어 사순절을 제외하고 목회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어떤 식으로든 기념이라도 해야 뒤탈이 없지, 아예 그런 것들을 지키거나 시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분명히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성찬 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여 기념하도록 하신 것은 없다. 그 때문에 히 6:1-2절에서 사도는 이르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또는 말씀)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성경의 교훈)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고 말하여, 다시 구약의 예법들을 따라 경험하는 종교(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는 자들을 책망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외에 다른 것들도 더하여 따르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것(adiaphora)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6:6)는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6장에서 사도가 말한 욕되게 함(make a mock)을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로마 가톨릭의 미사”(missa)와 더불어, 지금도 개신교 내에서 당연하게 행하고 있는 사순절”(Lent)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기념)하는 절기들이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어 감당하신 고난을 전혀 기념할 것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부활하신 뒤에도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어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을 알아보도록 하셨으니(24:30), 성찬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함께하심)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 외에 그가 겪으신 고난에 관해 기억하기를 원하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사순절의 기간이라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살펴보며 기억하여 특별한 기도의 기간까지 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거기에 약간의 예(ceremony)를 더함으로, 얼마든지 변형된 미사를 행할 수 있는 위험만 있을 뿐이지 않는가!

 

단언컨대 신자가 항상 행하여 기억(기념)할 것은, 단 한 번 시행한 세례와 더불어 빈번하게 자주 실시할 수 있는 성찬뿐이다. 바로 그러한 은혜의 성례 위에서 우리들은 실제적인 예배 가운데 참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분명 성찬은 완전한 성례다. 그것 외에 새 언약”(22:20)이라고 하신 것이 없으니, 그것으로 완전한 것이다. 만일 그것 외에 더하여 기념하려 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례를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다!

 

안타깝게도 그토록 완전하고 중요한 은혜의 성례인 성찬조차도 사실상 속이 텅 빈 공갈빵에, 뜻과 의미를 알 수 없는 희석된 포도즙으로 시행하는 것이 작금 우리들의 성례다. 사실상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나 루터 교회의 공재설(consubstantiation)에 가까울지언정,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시며 새 언약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만찬에 참여하게 되는 것(Sursum Corda)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무지한 채로 대부분의 성찬이 그저 시행되기만 할 뿐이니, 은혜에 동참하는지 죄에 동참하는지 분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장로교회에서는 성찬이 시행되기 8일 전에 미리 성찬 시행을 공지하고, 성찬에 참여하게 될 신자들의 명단을 게시할 뿐 아니라, 성찬 전에 장로들이 친히 성찬 대상자들의 가정을 돌아보아 적격여부를 살피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하여 목사에 의해 성찬에 관한 설교와 문답을 통해, 그 의미와 내용을 되뇌어 그야말로 기억하도록 했다. 그렇게 하여 신앙의 지식과 실천이 온전히 하나님께 들려지도록 했었던 것이다.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리신 고난을 기억하기를 원하는 교회들에서는, 사순절의 마지막을 성찬으로 마무리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합당한 것도 아니며, 심지어 성찬에 임하는 합당한 모습조차 되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분명히 이르시기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28:19)라고 하셨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분부한 대로)을 가르쳐 지키게(그대로 행하게) 하라”(28:20)고 하시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음을 기억하여, 오직 분부하신 대로만 그대로 행하도록 해야 마땅한 것이다.




장대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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