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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차. <사마리아여행>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5.19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5. 2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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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차. <사마리아여행>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5.19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들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12:13~21)



세속주의



유명한 변증학자인 코넬리우스 반틸의 훌륭한 제자이자 계승자인 존 프레임은 성경의 권위를 배척하면 사회는 세속화되기 마련이다“‘세속적이라는 용어는 구속력 있는 유신론적 권위나 신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했습니다. 다시 맣해 한 사회가 진보적인 방향으로 진행될수록 구속력 있는 권위가 사라지고 개인의 자유가 활개를 친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언한대로 오늘날 서구사회 뿐 아니라 한국사회도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권위는 구 시대적이고 낡은 사고의 결과물이라 치부하고 맙니다.



특히 다원주의사회의 영향으로 각 개인은 모든 권위와 권리의 주체이자 자유로운 영혼들로서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어떤 시도들도 용인하지 않고 이런 시도들을 자유의 침해라고 규정하고 반항합니다. 그리하여 요즘의 시대를 자아발출을 넘어 자아과잉시대혹은 자아절대권위의 시대라고 부릅니다.(참고로 저는 자아발광의 시대라 부릅니다) 특히 한국사회는 극심한 자아중심의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자아중심은 모든 하나님중심을 극혐하고 거부하고 항거합니다.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고 자기 진리를 주장합니다. 이른바 종교다원주의의 사상을 주입받아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진리와 권위를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권위의 문제와 신앙의 문제는 매우 관련이 깊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권위에 굴복하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이를 부인하고 불순종하는 사단의 부류로 나누어져 투쟁해 왔습니다.



사단의 영은 세상으로 하여금 끊엄없이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와 권위와 문화들을 말살하려 합니다.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다양한 전술전략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사단의 종교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악한 영에 속하도록 만듭니다. 그중 사람들을 가장 손쉽게 미혹하는 일은 바로 세속주의에 물들게 하는 일입니다. <세속주의>의 저자인 칼 헨리는 세속주의는 모든 신앙을 타락하는 주범이라 말합니다. 그는 계몽주의를 기준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 가지 시대상황을 거쳤는데 먼저 계몽주의 이전에는 불신앙이 불가능한 시대였고, 계몽주의 이후에는 불신앙이 가능한 시대였으며, 지금은(현대말) ‘신앙이 불가능한 시대로 보았습니다. 그만큼 세속주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자체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 세상은 철저하게 세속화되었습니다. 주로 세속화는 세 가지 흐름으로 나타납니다.



1)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흐름으로 당연히 이 결과로 불신앙이 발생합니다.

~ 미국 내 대학교에서 종신교수로 임명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그런 신앙을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을 임명한다면 차별금지법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2) 물질숭배주의와 계량주의로 흐릅니다.

~ 모든 것은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 됩니다. 모든 가치는 돈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판단에 의해 결정됩니다. 모든 물건에는 값이 매겨지고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합니다. 심지어 사람도 연봉의 액수로 높낮이가 결정됩니다. 운동선수를 비롯한 인기 연에인들과 스타들은 모두 몸값이 매겨집니다. 이런 가치관에 기독교의 가치관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심지어 아이들도 아파트 평수로 가치를 따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돈의 노예들입니다.

3) 현세주의 흐름입니다.

~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사후세계는 더더욱 존재치 않습니다. 그래서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슨은 하나님은 없다. 인생을 즐겨라고 소리칩니다. 이것이 극대화되니 이제는 자식에게도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 풍토가 생겼습니다. 내가 번 돈은 내가 마음껏 쓰고 한없이 즐기다 죽는다는 현세주의 사상이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의 핵심은 현대인들이 구속력있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돈을 숭배하는 세속주의에 물든 것으로 세상은 갈수록 부패하고 타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이러니한 것은 신의 권위를 배제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종교적인 경험을 추구하려는 심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극심한 혼돈(카오스)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에 대해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역사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는 창1:2의 표현을 빌어 다시 세상은 혼돈과 공허함과 흑암의 세계로 진입했다고 봅니다. 이것은 정말로 이 세상이 말세의 끝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벼랑 끝에 선 이 세상의 종말을 드디어 우리가 목격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이러한 때 오늘 주님은 본문 말씀을 통해 탐욕이 빚어내는 멸망의 결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떠한 내용인지 본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2. 유업을 나누려 하는 자



무리 중 한 사람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오직 상속 그 하나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형에게 속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아마 그는 상속분배를 규정한 구약 율법을 찾아보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관련 구절 하나를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21:15-17)



이에 따르면 장자의 몫은 다른 아들의 두 배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형은 장자로서 두 몫 이상을 가져갔거나 아니면 동생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고 다 가져갔거나 둘 중 하나로 보입니다. 그래서 동생이 예수님께 찾아와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왜 이 사람은 다른 랍비를 찾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 왔느냐 하는 점입니다. 핸드릭슨은 아마 이 사람이 예수님을 랍비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설합니다. 그러나 저는 랍비를 통한 해결방식을 이 사람이 신뢰하지 않았을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그렇듯이 사법적인 해결에는 반드시 비용이 들고 절차가 까다로우며 뇌물을 통한 불공평한 재판의 결과가 비일비재한 것을 미루어 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현재 가장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주목을 받는 예수님의 영향력을 이용해 보려는 의도가 깔렸을 것으로 봅니다.



이에 예수님의 반응이 사뭇 놀랍습니다. 아마 이런 반응은 벌써 예수님은 이 사람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4절에서 주님은 이 요청을 수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핸드릭슨은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하나는 그와 같은 권세는 자신이 아니라 당국에게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현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더 숭고한 사명, 즉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하는 일(19:10)을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요청을 거부한 이유는 15절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람이 이 요청을 한 배경에는 그의 세속적인 가치관 즉 탐욕이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무리를 향해 다음과 같이 소리칩니다. 함께 15절을 읽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탐심은 무언가를 탐하는 마음입니다. 탐한다는 것은 내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탐심 혹은 탐욕은 내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욕심을 말합니다. 특히 탐욕은 세상의 재물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욕심입니다. 이 탐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식탐으로 이것은 주로 greed로 표기하고 다른 하나는 물질에 대한 것으로 이는 covetousness로 표기합니다. 본문의 탐욕은 후자의 것으로 이는 주로 에 대한 탐욕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것으로 헬라어로는 프레오네키아스입니다. 이 말의 참뜻은 원래보다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려는 탐리를 뜻합니다. 한 마디로 지나친 욕심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10:4에서 기자는 이렇게 탐리하는 자를 경고했습니다.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10:3)



결국 탐심은 멸망을 낳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탐심을 버리라고 충고합니다. 왜냐하면 그 결말이 결코 아름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언서의 교훈들을 찾아봅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5:15)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동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10:2)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11:4)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11:25)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13:11)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14:24)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15:27)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16:8)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베푸느니라“(21:25)



사도 바울도 탐심에 대해 여러 경고를 하였습니다. 먼저 그는 탐욕을 부리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6:10).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였습니다(5:24). 성도는 오직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4:28). 그리고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경고했습니다(3:5)



지금 현대인들은 탐심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인지도 모릅니다. 일부 하나님의 자녀들을 제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돈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돈이 있고 없음에 따라 인생의 질과 내용과 방향이 달라지고 돈의 유무에 따라 한 사람의 인격이 결정되고 지위가 결정되고 권위가 결정되고 가치가 결정되는 세상입니다. 돈 만 있으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실제로도 그런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돈을 손에 쥐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대입니다. 아이들의 꿈도 돈을 많이 버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순수한 동심의 세계에 돈이라는 악마가 기어들어와서는 아이들의 선량한 마음까지 다 빼앗다 가버린 것입니다. 현대는 돈에 미친 사회입니다. 돈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부모를 버릴 수 있습니다. 부모를 살해하기도 합니다. 부부간의 인연을 도려낼 수 있고 언제든지 친구를 배신할 수 있습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어 돈을 사로 가지려고 발버둥칩니다. 이것이야말로 악마의 세상입니다.



3. 어리석은 부자



이런 세상의 어리석음에 대해 오늘 주님은 한 비유를 들어 깨우치시려 하십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운좋게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돈 버는 재주가 좋은 사람인 모양입니다. 간혹 우리 주변에도 돈을 잘 버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정말 부러운 사람들입니다. 정말 재물의 기술과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회의 재벌들을 보세요. 여러 비판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아무나 그런 재벌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돈 버는 기술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죽어라고 일해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열심히 땀을 흘림에도 손에 쥐어지는 것은 딱 한 달 쓰고 나면 없어지고 마는 봉급 뿐입니다. 그래도 이런 봉급쟁이들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보다는 낫습니다. 일용직들은 또 일자리를 찾지 못해 정말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는 백성들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것은 그 자체로 복입니다. 물론 불의한 재물을 칭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정도 수준으로 살면서도 잘 사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부자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이 부자는 재신이 늘어나자 재산을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요즘도 돈 많은 사람들은 집에다 금고를 두고 그 속에 현금 다발을 넣어두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물이 늘어나자 부자는 더 큰 창고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당연히 재산이 늘어나면 늘어나는대로 재물을 관리해애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19절이 이를 증명합니다. 부자는 자신의 재산의 기능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 부자는 돈의 위력을 영혼에까지 확대시킵니다. 돈만 있으면 자신의 영혼이 안락해 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질병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암에 걸리면 죽을 확률이 높지만 부자들은 많은 비용을 들여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 그룹의 회장님은 지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았지만 5년째 병상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합니다. 부자들은 암에 걸려도 NK주사를 맞으면 암을 완치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주사 한 대 값이 1,200만원이라 합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은 주사 맞고 싶어도 꿈도 꾸지 못할 현실입니다. 그래서 돈, 돈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부자가 오해하는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혼은 돈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영혼은 돈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영혼제작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생명의 창조주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숨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이 숨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숨을 도로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죽는다는 것은 숨이 멎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바로 이 상식적인 문제를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탐심에다가 교만한 마음까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자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판정을 내리십니다. 20절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참으로 이 부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자신이 모은 재물이 영원히 자기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에게 알맞도록 각자의 분깃을 측정하시고 그것대로 할당해 주셨습니다. 부자는 부자의 분깃이 있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로서의 분깃이 있습니다. 대신에 공평하신 하나님은 부자는 이 땅에서 복락을 누리지만 천국에 갈 확률이 매우 낮고 가난한 사람은 이 땅에서 고난당하지만 천국 갈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부자는 이 땅에 살면서 천국에 가기 위해 돈을 잘 사용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은 이 땅에서 고난을 오히려 천국 가는 티켓으로 여기고 가난에 대해 슬퍼하거나 위축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은 천국에 가기 위해 과연 어떤 저축을 하느냐입니다. 그것을 주님은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다시 말해 지금 당신은 어떤 저축을 하고 계십니까? 세상은행에 돈을 저축하십니까, 아니면 천국은행에 저축하고 게십니까? 그 결과는 분명합니다. 세상은행의 돈은 당신의 육체의 문제는 해결하지만 영혼의 문제를 치료하거나 해결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천국은행의 저축은 당신의 영혼의 문제를 구원하고 영생토록 하는 실질적인 위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4. 결어



오늘 말씀을 통해 세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 나에게 주어진 것 이상을 넘보지 말아야 합니다.

~ 이것을 넘보는 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이 탐욕입니다. 탐심은 탐욕이고 탐욕은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되므로 도둑질입니다. 적어도 도둑질은 하지 않고 살아야 경건한 자손입니다.



둘째,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잘 분리하고 구별해야 합니다.

~ 주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성속의 구별이요, 내것과 하나님의 것의 구별이며, 나아가 하나님나라의 기초를 세우고 확장하는 일에 쓰임받는 일입니다.



셋째, 가정에서부터 아이들에게 돈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 돈을 버는 것보다 실상은 돈을 잘 쓰는 법이 더 중요합니다. 돈을 아끼는 것이 모두 절약이 아닙니다. 돈을 무조건 아끼는 것은 인색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절약은 해야지만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은 가난한 이웃을 도우라고 내게 주어인 것입니다. 돈을 이웃을 위해, 가난한 사람을 위해 구제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잘 벌고 잘 쓰는 성도들이 되시고 가급적 세상 은행이 아니라 천국은행에 저축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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