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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주차. <사마리아여행> 두 종의 이야기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6. 1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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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주차. <사마리아여행> 두 종의 이야기




“(35)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이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어찌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12:35~48)




1. 깨어 준비하라




본문에는 두 종류의 종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깨어 있는 종이고 다른 하나는 게으른 종입니다. 앞의 종은 시실한 청지기로 소개되고 뒤의 종은 신실하지 못한 종으로 소개됩니다.




먼저 깨어 있는 신실한 청지기에 대한 이야기로 35~40절에 있습니다.

~ 여러분은 이미 앞의 12:13-21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어 22-34에서 세상적인 염려가 얼마나 어리석고 쓸데 없는 일인가를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설교 도중에 하늘의 까마귀를 예로 드셨고, 들판의 백화화들을 가리키면서 저런 피조물들도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시고 키우시고 돌보시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이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시면서 삶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를 다 내려놓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은 앞의 어리석은 자와 대비되는 매우 신실한 사람을 모본으로 제시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1)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있으라(35).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36)

~ ‘허리에 띠를 띠라는 것은 종의 길고 늘어진 겉옷은 일하기에 거추장스러운 것입니다. 평소에는 햇빛을 가리고, 밤에 추울 때에 몸을 가리기 위해 유대인들은 평소 길게 늘어진 옷을 입습니다. 그러나 일할 때엔 허리 띠로 옷을 여미어 허리에 단단히 묶습니다. 등불을 켜라는 말은 불시에 찾아오시는 주인님을 언제라도 맞이하기 위해 그러한 것입니다.

~ 한편으로 본문의 비유는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비유(25:1-13)의 교훈돠 동일한 것입니다.

~ 한편 36절에서 종은 주인이 귀가할 때까지 잠을 자면 안됩니다. 만약 주인보다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면 그는 당장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종관계는 냉혹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비유는 주인의 냉혹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된 자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각인시키는 말씀입니다.

~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문을 두드리면 곧 문을 열어준다는 언급입니다. ‘즉시’(유쎄오스, Immidiately)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즉각적인 순종의 반응의 용례로 쓰였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4:20에서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을 때 그는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어 야고보와 요한도 즉시 주님을 따랐습니다(22). 그뿐입니까? 구약 시대의 이사야는 하나님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시니 이사야가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6:8).

~ 35절과 36절의 비유를 영적인 교훈으로 본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영광의 결혼잔치에 신랑의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다시 오실 주님을 언제라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여기서 준비한다’(헤토이모이, prepare, be ready)는 용어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를 한 마디로 압축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결혼잔치를 주관하고 책임지실 분은 주님이시만 결혼식에 필요한 일들(자리를 마련하고, 실내 장식을 꾸미고, 음식을 장만하고, 초청장을 보내고, 음악을 준비하는 일 등)을 사전에 준비하고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가 살피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라는 것입니다. 특히 준비한다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항상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불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처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에 있어서 가장 준비를 잘하는 민족으로 일본인들을 꼽습니다.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호나경속에서 살다보니 그들은 언제든지 피난갈수 있는 준비를 늘 집안에 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무슨 일이 터지면 훈련이 안되어 있어서 아마 우왕좌왕 하고 무슨 물건부터 챙겨야 하는지 갈팡지팡 할 것입니다. 이 모두 생활의 게으름 때문입니다.

~ 게으른 사람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첫째, 신체적 요인으로 늘 피곤해 하고 졸린 상태로 지냅니다. 특수하게 신체적인 질병에 의해 졸립고 피곤할 수 있지만 대부분 어릴 때부터 잠 자기를 좋아하는 습관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정해진 시간없이 잠을 청하게 됩니다. 이렇게 잘못된 습관 하나를 고치기 위해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가령, 잠자는 시간과 기상 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습관으로 바꾸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 가급적 육식보다는 채식 위주로 식단을 바꾸도록 권합니다. 특별히 규칙적인 운동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정해진 시간에 소리내어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을 읽는 습관으로 게으름이라는 질병을 고쳐야 합니다. 둘째, 정신적인 요인으로 무사태평주의에서 게으름이 기인합니다. 말이 태평이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책임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자신이 책임을 지는 일에는 가담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힘든 상황이 발생하면 슬그머니 꼬리를 뺍니다. 셋째, 심리적인 요인으로 매우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의 유익에는 굉장히 빠르게 반응하지만 다른 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남이야 어찌되든 말든 자기만 편하고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입니다. 특히 누군가 자신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침범하기라도 하면 악을 쓰고 저항합니다. 언제든지 내것을 먼저 챙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는 정말 미련하고 게으른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게으른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천국문은 순식간에 닫히기 때문입니다.




2)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37) 주인이 혹 이경이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38)

~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은 참 이상한 주인입니다. 보통 주인들은 종들을 지시하고 명령하고 부려먹는 사람이지만 37절의 주인은 충성된 종들을 오히려 섬기는 주인으로 등장합니다. 신실한 종들을 기뻐하며 되레 주인이 허리에 띠를 띠고 종들을 자리에 앉힌 다음 종들을 수종든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적으로,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바로 그런 주인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모든 주권을 가지신 성자 하나님이면서도 군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22: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주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자녁 식사를 하다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를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13:4-5).

~ 그러니 주인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는 종이야말로 가장 복을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므로 38절의 언급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나아가 주님의 이 섬김은 그냥 가볍게 말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언급을 하신 다음에 하신 말씀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모본을 따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 특별히 38절에서 이경 혹은 삼경이라는 시간이 언급됩니다. 당시 유대의 시간법과 로마의 시간법이 다릅니다. 로마는 밤 시간을 네 개로 구분하지만 유대인들은 세 개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이경과 삼경은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주인이 늦게 오면 종들은 밤을 꼬박 샌다는 것입니다. 그런 충성된 종에게 우리 주님이 베푸실 복락이 얼마나 큰 것인지 기대하고 상상해야 합니다. 우리 찬송가에 충성하라 죽도록이라 하지 않습니까?




3) 너희도 아는 바니 집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39)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40)

~ 여기선 종의 가장 큰 임무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도둑의 침입을 막는 일입니다. 아마 주인은 집을 떠나면 자신의 종들이 집을 잘 지키는 신실한 청지기일 것인지 관심을 둘 것입니다. 만약 경계를 게을리 하면 분명히 도둑이 급시에 쳐들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종들은 도둑이 들지 든다면 언제 올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마지막 때에 인자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잠들어 잇는 사람은 주님의 재림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늘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보지 못하고 천국에서 낙오하고 말 것입니다.

~ 가장 슬픈 인생이 무엇입니까? 가장 불행한 인생이 무엇입니까? 살면서 몸이 앞아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불행을 당하고 슬픔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가족이 길바닥에 주저앉을 때, 자식을 먼저 보낼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나쁜 사람으로 오해받을 때, 병들어 시름시름 앓아 누울 때, 불화로 이혼하거나 가족이 헤어지거나 배신을 당할 때 등 수도 없는 불행과 고통들이 인생을 괴롭힙니다. 이런 불행들은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막거나 대처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헝가리까지 여행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다뉴브 강에서 횡사할 줄 누가 알아겠습니까? 사람 목숨은 오직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사의 불행이 제아무리 크다 해도 가장 큰 불행은 천국에 가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이 보다 더 슬픈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왜 이 땅에서 지진이 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지옥에 간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 복음을 믿지 못하고 거부한 결과 지옥에 갔다는 사실을 두고 원통하고 원통하여 밤낮으로 땅 바닥을 치느라 땅이 울려서 그런 거라 답할 것입니다

 



2. 두 종




이제 41절부터 48절까지는 신실한 청지기와 신실치 못한 청지기를 비교 설명합니다.




1) 그런데 41절에서 여기서 갑자기 베드로가 끼어 듭니다. “이 비유를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하고 베드로가 묻습니다.

~ 숨은 배경으로 보아서 베드로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서 자신을 비롯한 제자들에 대해 주님이 신실한 청지기로 여기시는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은신지 속내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베드로는 이 질문을 통해 자신이 신실하지 못한 종이자 청지기일 수 있다는 일말의 근심도 함께 읽을 수 잇는 대목입니다. 그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면 이런 질문을 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주님이 노리는 의도이십니다. 이런 의문을 통해 주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점거하는 계기로 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을 심리학에선 자극이라 합니다. 약간의 경계심과 경쟁심을 야기시키면 인간은 열심을 낸다는 것입니다

   



2) 이제 42~44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42)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변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43)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44)”

~ 베드로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주님의 대답은 원론적입니다. 주님은 너희들이 신실하다 아니다 하고 판정내리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저 누가 신실한 청지기인지, 아닌지를 다시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마 24:45-51과 병행구절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것을 보면 주인이 집을 떠날 때에 신실한 청지기에게 또 다른 종들(혹은 노비들)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실한 청지기는 다른 종들의 일들을 감독할 뿐 아니라 특별히 종들에게 필요한 것을 잘 공급하는 일도 포함되었습니다.

~ 이런 신실한 청지기에 대해 주님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신실한 종은 주인의 모든 소유를 물려받는 복을 누립니다. 망약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실한 청지기가 되도록 노력하세요. 그렇다면 당신은 이 땅에서 모든 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우선순위를 착각하여 복된 인생을 살기 위해 먼저 주의 일에 충성하려고 하지 않고 돈을 먼저 벌어서 행복해지려고 시도합니다. 일단 돈을 먼저 마련해 놓고 그 다음에 여유가 있으면 주의 일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인생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 지금 즉시가 아니라 나중에가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누가 안 한다고 했어요? 나중에 한다고 하잖아요.”

~ 예수님은 특별히 사명자라고 생각하는 그의 제자들, 나아가서는 앞으로 임명될 모든 교회의 사역자들과 목회자들을 염두하시고 신실한 청지기의 비유를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실성의 의무는 목회자들뿐 아니라 모든 교회의 직분자들레게 해당합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 궁핍한 자들을 돕는 일은 모든 사역자들에게 주어진 책무요 과업입니다.

~ 특별히 여기서 우리는 서머나 교인들의 신실성을 떠올리게 됩니다(2:8-11). 이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지나치게 열광적인 태도도 아니요,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미온적인 상태도 아닙니다. 이들의 신실함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든 소유를 맡기십니다. 인간들도 믿을만한 사람에게 재산을 맡기고 관리토록 하는 것을 본다면 주님이시라면 오죽하겠습니까?




3) 신실치 못한 종(45~46)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45)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46)”



~ 이제 신실하지 못한 종에 대한 이여기입니다. 그런데 이신실하지 못한 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앞의 신실한 그 종으로 지칭합니다. 45절의 그 종이라 하였으니, 우리는 여기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하고 급변하는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앞에서 신실한 그 종이 매우 급격히 변하여 전혀 다른 청지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그 종이 마음에, 즉 즈기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잇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렇게 독백하는 것은 때로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위인도 그러하다”(23:7)고 하였는데 이렇게 사람의 본심을 숨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거룩하고 엄숙해 보여도 속으로는 온갖 탐심과 정욕과 미움을 품고 있을지 모릅니다.

~ 주님이 여기서 비유로 들고 있는 그 종이 그런 사람입니다. 주인이 보는 곳에선 매우 신실하지만 주인이 없는 곳에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인이 돌아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동안에 나는 재미있게 놀자하고 나아가 그것만으로는 심심하고 재미가 없을 것 같으니까 노비들을 데리고 놀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간신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앞에서는 온갖 충성을 가장하고 뒤에서는 온갖 모함과 비방과 이간질과 폄하를 서슴치 않은 승냥이족이 수두룩합니다. 온 세상에 가득한 족속들이 이리와 늑대요, 여우요, 박쥐들입니다.

~ 그런데 갑자기 주인이 돌아옵니다. 주인은 자신의 신임을 배반한 이 고약한 자를 그만두지 않습니다. 주인은 이 종을 엄히 때립니다. 이런 사례는 성경과 인류 역사상에서 숱하게 발견됩니다. 모세를 반역한 고라 일당을 보세요. 조금전까지만 해도 모세앞에서 굽신거리던 그들이 모세가 바리를 비우자 사람들을 선동하고 이간질하여 반역을 일으키게 미혹하였습니다(16).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정한 베드로의 얄팍한 입술, 사도 요한을 괴롭힌 디로드레베(요삼9), 바울과 바나바를 갈라서게 만들었던 마가의 배신 등은 정말로 가슴을 아프게 하는 배신들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6:17-18)




3. 결어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47)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48)



~ 이제 모든 비유는 끝났습니다. 주님은 이제 결론을 내립니다. 그것이 47-48절에 담긴 내용입니다.

~ 먼저 주인이 돌아왔을 때 형벌을 받는 자는 그가 주인의 뜻을 알고서도 뜻대로 행치 않았기 때문이라 말합니다(47). 여기서 형벌의 차이가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은 모진 형벌을 받고, 어떤 사람은 가병운 벌을 받습니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광의 등급이 있을 뿐 아니라(고전15:41-42), 또한 지옥에서 당하는 형벌에도 등급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 다음으로 책임을 묻는 것에도 차등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과 기호에 비례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선물, 즉 지식과 지혜의 은사를 비롯한 특출한 재능들을 받은 자들이 게으르게 받은 선물들을 활요치 않는다면 그는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그 책임을 심문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 충분히 신앙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에 빠져 진보를 이루지 못한 것에도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자기만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라야 합니다. 만약에 자기를 우선시하는 인생이엇다면 그것도 주님이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신실한 주의 종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신실한 청지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입니다.

~ 그래서 말씀을 충분히 알고 해독하고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토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하고 착한 일을 하고 남을 돕는 다 해도 말씀과 상관없이 행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결과르 빚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직 말씀 안에 거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오직 복음을 전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 오늘 본문의 신실한 종은 자신의 수하들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좋은 양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돈과 음식과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는 것도 훌륭하지만 가장 최우선적인 일은 나와 가장 가가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실한 청지기는 겸손히 남을 섬기는 자여야 합니다.

~ 다른 사람에게 일만 시키고 지시하고 명령내리기를 좋아한다면 그는 악한 청지기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간혹 담임목사의 횡포로 인해 부목사들이 갖은 갖은 고생을 한다는 풍문이 들립니다. 마치 자기 종처럼 부목사들을 부리고 행세하는 자들이야 갑질하는 자들이며 주님으로부터 받은 위임권을 남용하는 자들입니다. 섬기는 자는 자신이 먼저 나서 일하는 자입니다. 섬기는 자는 조용히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받드는 사람입니다. 섬기는 자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자입니다. 그런 청지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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