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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주차. <사마리아여행> 천국 부자가 사는 법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6. 5.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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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주차. <사마리아여행> 천국 부자가 사는 법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12:22-34)



1. 염려함



세상에서 누가 가장 염려가 많은 사람입니까? 여러 관점에서 논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마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보다 훨씬 더 염려를 많이 하고 살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20 주차 설교를 통해 재물이 많은 부자가 자신의 소유를 쌓아둘 곳을 염려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결국 그 부자의 염려는 늘어난 재물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 만사에서 소유가 염려를 낳습니다. 특히 귀한 것을 소유한 경우 그만큼 염려가 늘어납니다. 집안에 보물을 쌓아두고 사는 사람은 그만큼 보물로 인해 온 신경을 쓰며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을 만큼 염려로 시간을 보냅니다. 늦은 나이에 자식을 본 부모들은 대개 자식이 혹시 사고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합니다. 혹시 잃어버릴까 자나 깨나 안심하지 못하고 지냅니다. 요즘엔 외아들이 군대에 가면 군대 앞에다 하숙집을 얻어놓고 매일 아들을 면회하고 밥을 챙겨준다고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염려는 필요를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욕구불만에서 기인한다고 합니다. 물론 인간의 삶에는 필요물이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주에 있어서 반드시 기본적인 필요가 요구되고 충족되어야 인간은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탐욕적인 인간은 끊임없이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더 채우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욕구에는 그 한계선과 정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을 음식의 양은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정도면 충분하게 먹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자각할 수 있도록 적절한 신호시스템을 달아 두셨습니다. 충분히 배가 채워지면 뇌에서 이제 그만 먹으라고 명령합니다. 이를 위반하면 배탈이 나도록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생에 있어서 불행의 씨앗은 과욕에서 비롯됩니다. 사자성어로 과욕불급(過慾不及)’이라 했습니다. ‘너무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는 말입니다. 사회심리학에선 한때 성공이 오만을 낳고 오만이 과욕을 낳고 과욕이 파멸을 부른다고 진단합니다.

** 그리스신화에서 권력을 잡은 제우스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와 결합합니다. 이유는 그녀는 강직하고 무서운 자신의 이미지를 유연하고 질서잡힌 것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새로운 신이 천문을 주관하는 우라니아입니다. 그녀는 지상 최고의 뮤지션이었습니다. 하늘의 아름다운 선율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신입니다. 그녀의 이런 매력에 아폴론이 반해서 둘은 연인이 됩니다. 그리고 이 사이에서 음악의 신으로 추앙받는 아들 리노스가 탄생합니다. 그는 음악의 대가가 되어 리듬과 멜로디를 최초로 발명하고 모든 애정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어느 날 또 다른 아들이자 무예에 뛰어난 헤라클레스가 가족 모임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준은 거의 음치에 가까웠습니다. 이를 본 리노스는 헤라클레스를 놀렸습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자신이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기를 넘보았습니다. 그러나 화가 난 헤라클레스는 리노스를 즉시 지팡이로 때려 죽였다 합니다. 그래서 리노스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훗날 탐욕과 교만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합니다.



우리 인생의 길에서도 이런 과욕이 늘 나타납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은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많이 즐기려 하고 더 많이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하고 뽐내려 합니다. 이것이 과욕이고 바로 이 과욕 때문에 괜한 걱정과 염려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염려 없이 살 수는 없을까요? 오늘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2. 본문 해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늘 본문이 산상수훈의 기사 중 마 6:25-34의 기록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주님이 이 설교를 하는 동안 하늘에서 까마귀가 날고 있었을 것이고 눈앞에는 백합화가 핀 들판이 펼쳐져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누가복음의 이 설교는 내용만 같은 것일 뿐 시간과 장소와 설교를 듣는 청중이 다른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선적으로 산상수훈은 갈릴리 사역 초기에 갈릴리 호숫가의 어느 들판에서 행한 것인데 비해 누가복음의 설교는 사마리아 여행 중에 탐욕에 빠진 한 부자를 만난 뒤 제자들에게 욕심이 곧 염려를 낳는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행한 설교입니다. 한 마디로 오늘 설교의 핵심은 몸보다 목숨이 더 중하므로 몸의 것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실상, 우리 자신들을 되돌아 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쓸데없는 일에 대해 염려하고 과욕을 부리며 살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 상상하고 근심과 염려로 세월을 보낸다 합니다. 고대 희랍의 한 철학자는 하늘이 언제 무너질까 염려되어 늘 하늘만 쳐다보며 걸어가다가 낭떠러지인 줄 모르고 헛발을 디디어 떨어져 죽었다 합니다.



이제 본문을 보십시오. 주님은 인간의 어리석은 염려에 대해 교훈하기 위해 가장 흔한 대상들로부터 가장 쉬운 교훈들을 이끌어 내십니다.



먼저 24절입니다.

~ 여기서 까마귀라는 새가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에선 그냥 공중의 새로 나타나지만 누가복음의 현장에선 까마귀로 나타납니다. 11:15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가증이 여기는 새들은 거의 20여 종 이상 나타납니다. 이들 모두 죽은 시체를 먹는다는 이유로 부정한 새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마저 돌봐 주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까마귀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동굴 속에 은신하던 엘리야에게 먹이를 날라주던 새였습니다.(왕상17:1). 이렇게 하찮은 새까지도 하나님이 돌보시고 사용하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돌보시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침 하늘을 날아가는 까마귀를 바라보시면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십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참으로 이 한 마디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합니다. 살아오면서 제자들은 수없이 까마귀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이 떨어지자 제자들의 눈에는 까마귀의 비행마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존재하거나 운행하거나 보존되지 않습니다. 코로 숨을 쉬면서 이렇게 숨을 쉬는 것이 하나님 덕분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따뜻한 햇빛과 바다와 강물과 온갖 생명체들이 그냥 태어나고 존재하고 활동하는 줄 압니다. 그들 중 어떤 것들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돌보시지 않으면 한 순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시며 애지중지 하시는데 정작 그 사랑을 의식하지 못하고 제 마음대로 살다가 제 인생을 허무하게 끝내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이러한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까마귀를 쳐다 보시면서 너희가 까마귀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라고 강조하십니다. 사람이 보기에 저렇게 부정한 동물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돌보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는 사람을 어찌 하나님이 함부로 다루시고 방치하시고 버리시겠느냐는 반문을 통해 우리는 지극한 주님의 사랑하심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크신 감동하심을 온몸으로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진정된 마음가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한 마디입니다.



도무지 염려하지 말라“ Don’t worry at all.



그것이 25절과 26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압축한 것입니다. 도무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염려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염려한다고 키가 자라지 않는다는 비유를 통해 주님은 염려의 무용함을 교훈합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염려하는 그 시간에 염려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돈을 빌려 동업을 한 두 사람이 장사가 여의치 않아서 제때 돈을 갚지 못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은 온갖 근심 걱정을 하며 술독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채주가 무서워 늘 피해 다녔습니다. 집에 찾아오면 없다고 거짓말했습니다. 어느새 아버지 시키는 대로 행한 그 집 아이들은 거짓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빚쟁이는 채주에게 찾아갔습니다. 사정을 설명하면서 3년만 기간을 연장해 주면 반드시 빚을 갚겠노라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채주는 대신에 자식을 자기에게 보내어 하인으로 살게 하면서 빚을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빚쟁이는 집으로 돌아와 근심에 빠졌습니다. 아들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들은 되레 아버지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자기가 하인이 되겠다고 하고선 꼬박 채주 집에서 3년을 품삯없이 종 노릇을 했습니다. 드디어 채주가 빚을 청산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채주는 도망만 치던 첫 번째 사람은 모든 가산과 처와 자식까지 모조리 팔아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을 때까지 종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살았다 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빚쟁이에 대해선 채주는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채주에겐 후사가 없었습니다. 3년 동안 채주는 빚쟁이 아들을 유심히 쳐다보았습니다. 모든 성실함과 정직함을 본 채주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그 하인이었던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염려하고 한숨지으며 술 바다에 빠져 신세타령한다고 해결책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무책임하고 비겁하고 유불리에 따라 언제든지 배신하는 기회주의자들입니다.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무슨 일이 터지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염려하며 술로 풀거나 회피하고 도망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나서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혹 생명이 걸린 문제라 해도 목숨을 내어 놓겠다며 당당하게 책임을 지겠다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쉬운 일들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사람들은 불리한 여건과 문제가 발생하면 일단 회피하고 봅니다. 그리고 근심 걱정과 염려로 한숨을 내 쉬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샙니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염려하지 말라고 해도 염려하는 마음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십니다.



이번엔 조금 떨어진 들판으로 눈길을 줍니다. 아마 유월절(우리로 치면 3-4월 경의 따뜻한 봄날)이 가까운 무렵이라서 들녘에 봄을 알리는 파란 새싹들과 온갖 색상의 꽃들이 만개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저 들판에 핀 모든 꽃들, 백합화를 보라고 가리키셨습니다. 흔히 백합화라 하니 하얀 꽃을 연상하지만 이는 오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백합화의 자는 백이 아니라 모두백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느 특정한 색상의 꽃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들판에 핀 모든 꽃들을 가리키고 계신 것입니다. 예쁘고 젊은 여인을 두고 아가서는 백합화를 뜯어 먹는 노루 새끼들“(2:1-2, 4-5)이라 하는데 이때도 모든 들판에 핀 꽃들을 가리킵니다. 물론 유대인사회에서 하얀 백합화도 등장하고 이 꽃은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백합화 모양의 조각은 솔로몬 성전의 낭실 기둥들 꼭대기(왕상7:19), 성전 마당에 있던 놋바다 둘레에 새겨졌습니다(대하4:5). 또 백합화는 언약이나 증거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 꽃 중의 꽃이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었을까요? 온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은 마치 잔칫상을 차린 것처럼 풍성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편하며, 자유로우며, 화려한지! 얼마나 빛나는가! 이런 하나님의 작품들에 대해 과연 어떤 인조제품이 비견할 수 있습니까? 제아무리 솔로몬 왕을 위해 지어 만든 옷이라 해도 하나님이 만든 작품에 비하면 그것은 하나의 모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연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조화도 생화의 아름다움을 추월할 수 없습니다. 산책 중에 북한산에 피는 꽃들의 색깔들에 몰입할 때가 있습니다. 하양, 노랑, 빨강, 자주색과기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색깔의 꽃잎을 마주할 때 그저 할 말을 잃고 세상에서 어떤 물감으로 이 색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감탄합니다.



아마 지금 주님의 손길을 따라 백합화를 바라보는 제자들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에 제자들의 마음이 일순간 환하게 밝아졌을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시청각교육을 통해 모든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돌보시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꽃들은 봄에 만발하지만 곧 시들어 버립니다. 28절을 보세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이라 했습니다. 이 꽃들은 오늘을 생기있게 피어있고 들을 아름답게 장식하지만 내일에는 이 들풀들은 어느 지역에선 가정의 부뚜막에서 불을 피우는 연료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들에 비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말해줍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찮은 꽃들마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심겨지고 자라나 꽃으로 피웠다가 다시 시드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귀하디 귀한 인생들의 길흉화복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어찌 믿지 못하고 염려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렇다면 이런 염려를 사람들은 왜 하는 것입니까? 드디어 주님의 고성이 터집니다. 28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주님은 모든 염려의 원인을 믿음이 적은 것에서 찾고 계십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주님을 동행하면서 숱한 위기의 상황에서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날 때 제자들이 무서워하자 주님은 믿음이 작은 자들아하고 꾸짖었습니다(8:23-27). 배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며 물에 빠져가자 주님은 그를 향해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였습니다(14:25-31). 오병이어의 이적을 체험하고서도 떡이 없음을 걱정하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고 하시면서 왜 지난 날의 이적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셨습니다(16:8, 10).



이 구절들을 근거로 볼 때 모든 두려움에 빠진 자들은 그리스도의 현존과 약속과 능력을 불신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위로가 충분히 모든 위기에서 나를 구할 수 있다는 강력한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염려와 세상적인 근심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주권과 섭리를 불신하는 데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믿음이 적다고 단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유념하고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점은 우리의 믿음의 상태, 정도, 가치 등은 정말로 확고하고 불변하는 절대적인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제자들의 믿음도 이럴진대 우리 믿음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 믿음은 무용지물은 아닐까요? 29-30절에 따르면 근심과 염려는 불신자들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다고 하는 우리도 근심과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가 불신자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따른 자들인데, 그렇게 알고 믿고 순종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왜 우리에게서 근심과 염려가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믿음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염려를 없애기 위한 최선의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보통 우리는 비상한 처방을 기대할 것입니다. 염려가 사라지는 신비한 약초를 기대할지도 모릅니다. 옛날 키가 크지 않았을 때 마음속에 소원은 키 크는 약이 개발되기를 바랐습니다. 시험 때엔 머리가 갑자기 좋아지는 약이 있었으면 하였습니다. 옛날 세상에 있을 때엔 돈 벼락을 맞아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어떤 때엔 기적을 행사하는 능력을 가지기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헛된 망상에 빠집니다. 헛된 꿈과 소원을 가지고 엉뚱한 기적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해결책은 너무나 엉뚱하십니다. 29절에서 주님은 한 마디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정리하면, 어떻게 하면 염려하지 않을까요? 라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염려하지 말라입니다. 여기까지면 참 어안이 벙벙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30절 마지막 구절을 보세요.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아버지께서 다 아신다(oiden, know)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대답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내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나의 속마음과 생각과 소원과 바램과 목표를 처음부터 알고 있으며 심지어 내가 모르는 나의 미래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바로 이 분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 분이 지금도 나를 돌보시고 나를 이끄시며 내가 위험의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지키시고 곤란의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우리 사랑,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염려해야 합니까?



4. 결어- 우리의 할 일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결론이 31-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에서는 명령과 약속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약속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31)이고 다른 하나는 무서워 말라”(32)입니다. 그리고 약속은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 나라(말쿠트 야훼/바시레이아 투 데우)나라왕국의 개념입니다. 왕국이란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이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하나님 나라는 중심 테마였습니다. 이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정치적으로 신정정치를 실시하는 국가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이고 영적인 실제를 의미하며, 세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으 이름 아래 전적으로 복종하며 자신을 헌신하는 개인들을 의미합니다. 특히 다른 복음서에서는 주로 하늘 나라’(바실레이아 투 우라논)로 표기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무려 22회에 걸쳐 하나님 나라로 표기하는데 이는 누가가 가지고 있는 특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적극적인 실제에 대한 소망을 피력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앉으나 서나, 사나 죽으나 오직 하나님나라를 바라고 그 나라가 이 지상에서도 완전히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법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자신을 복종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오직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은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구함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일을 어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을 구해도 즉시로 주시는 분이시거늘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에겐 하나님 나라를 통째로 주실 것입니다.

~ 한 가지 첨언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 비결입니다. 그것을 주님은 겨자씨의 비유나 밭에 뿌려진 씨앗의 비유(13)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나라는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하며 조금씩 과정과 단계를 거쳐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참뜻은 하나님나라는 하나님만이 단독적으로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특별히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적인 소망과 간구와 헌신의 씨앗으로 출발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는 이를 구하는 자 안에 먼저 건설되었다가(이것은 씨앗의 뿌려짐과 같은 것입니다) 점점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듯이 그리스도의 교회로 발전하고 그 교회가 하나의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겨자씨나무로 비유되는 하나님나라의 총체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우리는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자식이 예쁘고 귀하지만 자식 잘 되라고 기도한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기 보다 개인의 안위와 복락을 먼저 구하는 자일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복락도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하고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법칙 중에 늘 유념해야 할 것은 우선순위의 법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먼저 하나님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사도 바울이 증언한대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14:17-입니다.

~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삶이 좀 고단하고 힘들다 해도 결코 무서워하거나 불평하거나 힘들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인생에도 하나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주어집니다. 한 마디로 육적인 평안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복은 심적, 정신적 영적인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도둑놈이 제아무리 재산을 훔쳐 잘 먹고 잘 산다 해도 그는 늘 불안속에 사는 자입니다. 그러나 보리밥에 김치 하나 먹어도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꿀잠을 자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십시오. 나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복이 주어지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내 논을 팔아 사촌을 먼저 먹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시장 바닥에 앉아 시금치 상추 파는 할머니의 값을 깍지 마시고, 종이 주워 하루살이 하시는 노인네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아픈 이웃을 외면하지 마시고, 때꺼리를 겆정하는 분에게 슬며시 다가가 위로하고 얼마 되지는 않지만 손에 용돈을 슬며시 쥐어주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신다면 그 사람으로 세워지는 하나님나라는 얼마나 아름답고 건강한 나라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염려하고 간구하세요. 이런 자가 가장 건강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32절의 서두를 보세요. 주님은 분명하게 적은 무리여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는 많은 무리와 함께 건설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 땅에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극히 드뭅니다. 하나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위해 헌신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드물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나라가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 그루터기들, 남은 자들(램넌트), 택함을 입은 자들, 영생을 받기로 작정을 입은 자들에 이해 세워지고 성장하고 완성됩니다. 당신은 과연 이 소수에 해당하는 사람입니까?

둘째 명령은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33)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약속은 낡아지지 않는 배낭과 다함이 없는 보물”(33)입니다.

~ 먼저, 32절과 33절 상반절은 마태복음에는 없는 부분입니다. 물론 산상설교의 정신에서 이런 내용이 삭제된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구절 즉 마19:21(10:21)에 나오는 부자 청년에 대한 예수님의 명령의 이야기에서 이 구제 정신은 재등장합니다.

~ 그런데 이 구절의 의미는 매우 조심성 있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역사상에서 이 구절을 그대로 믿고 따랐던 왈도(P. Waldo)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이 구절을 통해 크게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전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이후 전 지역으로 순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을 선포하는 사역을 하다가 카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고 화형당하신 분입니다. 이분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분들을 우리는 왈도파라 부르는데 바로 이분들이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 됩니다.

~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특별한 경우입니다. 이 구절을 전 성도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사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십니다. 각자에게 분깃을 정하시고 배분하시고 경영토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는 말씀은 첫째,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말라는 뜻이며 둘째, 과도한 욕심으로 얻은 재산에 미련을 두거나 집착하지 말라는 경고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바로 앞 구절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신 것입니다. 이 부자는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가족만 배부르고 따뜻하게 먹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졸부요 자린고비같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이 천국에 가장 들어가기 어려운 자들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어리석은 부자들이 손에 쥐고 있는 재물들, 결코 의롭지 못한 재물들을 포함하여 부자의 불의한 재물들을 경고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34절을 통해 우리는 보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항상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집에 돈을 쌓아두려고 하지 마시고 믿음을 쌓아두려고 해야 합니다.

~ 그렇다면 우리의 재물관은 무엇입니까? 33절을 보세요. 한 마디로 세상 은행에 저축하려 들지 말고 천국 은행에 저축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은행은 부도가 날 수 있지만 천국 은행은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처럼 안전하고 부패되지 않는 영원한 보관처라는 것입니다. 세상 은행의 저축금은 꺼내 쓰면 줄어들고 사라지지만 천국 은행의 것은 영원히 줄어들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하나님 자녀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은행에 저축한 것을 기준으로 상급심판을 단행하실 것입니다.

~ 핸드릭슨은 이 은행의 주요 저축목록을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천국 부자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이 될 것입니다.

결코 움직일 수 없는 신실함(그러니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89:33)

결코 끝이 없는 생명(성숙한 믿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결코 목 마르지 아니하는 솟아나는 샘물(늘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4:14)

결코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약속(늘 아버지를 위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6:37)

결코 사람들이 떼어놓지 못하는 사랑(항상 낮은 자리에서 가난한 자를 섬기는 사랑을 기억하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여기에 저는 다음의 세 가지를 추가하고자 합니다.

항상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언 제어디서든지 특히 혼자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겨야 합니다. 기독교는 절대적으로 이타적인 신앙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2:3)

결코 남을 미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미움은 천국 은행의 저축대상이 아닙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



이런 저축을 많이 하시어서 천국 부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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