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트교회질서(1619년)와 한국장로교회
-돌트교회질서 400년을 기념하며-
성희찬 목사
(작은빛 교회)
1. 들어가며
올해 2019년은 종교개혁 500년을 맞은 2017년에 이어 또 하나의 중요한 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신교회의 중요한 교리를 담은 소위 칼빈주의 5대교리라 부르는 돌트신경1)이 작성된 지 400년을 맞기 때문이다. 돌트신경은 네덜란드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 1561년),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1563년)과 함께 개혁교회의 3대 신경에 속한다. 그런데 돌트신경이 작성된 돌트 총회(1618년 11월 13일-1619년 5월 29일까지 네덜란드 돌트렉흐트(Dordtrecht) 시(市)에서 열린 총회)에서 개혁교회 교회정치에 근간이 되는 돌트교회질서가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는 최근 한국교회에서 돌트신경 작성 400년을 맞아 특강이나 세미나가 열리는 소식은 접하지만, 돌트교회질서 400년을 기리는 행사는 듣지 못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개혁가들은 일찍이 중세교회와 단절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울 때 신앙고백서, 교리문답과 함께 언제나 교회질서 혹은 교회정치를 작성하였다. 칼빈과 제네바교회가 그러하였고(제네바교회정치, 1541년/1561년) 스코틀랜드교회(스코틀랜드제1/2권징서, 1560년/ 1578년), 프랑스교회(프랑스교회권징서, 1559년), 또 스코틀랜드교회와 잉글랜드교회, 아일랜드교회가 엄숙한 동맹과 언약을 통해 소집된 웨스트민스터총회(1643-1647년)에서 신앙고백서, 교리문답, 예배지침과 함께 교회정치(1645년)를 작성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개혁가들은 교회를 개혁하고 교회를 건설해 나갈 때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과 함께 교회질서(교회정치)를 반드시 있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런 차원에서 종교개혁 이후 네덜란드개혁교회에서 돌트총회를 통해 1619년에 돌트교회질서가 형성되기까지 진행된 역사는 곧 교회개혁과 교회건설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돌트교회질서는 네덜란드개혁교회를 넘어 이후 세계에 흩어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교회정치와 교회질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본 글은 올해 돌트교회질서 400년을 맞아 그 배경과 또 이를 개괄하여 소개하면서 나아가 이를 한국장로교회 교회정치의 모체가 되는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1645년)와 비교하여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보며, 마지막으로는 교회개혁과 교회건설이라는 측면에서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와 방향을 찾고자 한다.
2. 돌트교회질서의 형성역사
1619년 돌트총회에서 작성된 돌트교회질서는 거기에 참여한 총대들이 머리를 맞대고 무(無)에서 고안해 낸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긴 역사가 있었다. 무엇보다 스위스의 개혁가 칼빈과 제네바교회정치, 그리고 칼빈이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프랑스개혁교회권징서, 영국 런던 난민교회를 목회한 요한 아 라스코와 그의 교회정치(<Forma ac Ratio: 영국 런던에 소재한 피난민 교회 교회적 봉사의 전체적인 예식과 가르침>(1555년), 신앙의 박해로 해외에 흩어진 네덜란드 난민교회들이 장차 네덜란드개혁교회 총회를 구상하며 독일의 베이젤에서 회합하여 작성한 베이젤 교회법령들, 최초의 네덜란드개혁교회총회가 독일의 엠던에서 작성한 엠던교회질서, 그 이후 이어진 여러 총회에서 작성된 교회질서 등이 돌트교회질서가 형성되기까지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2)
1) 종교개혁 직후: 교회론에서 교회질서(교회정치)로 나아가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께서 루터와 칼빈 등의 개혁가들을 세워 자기 교회를 새롭게 할 때에 네덜란드(당시는 현 벨기에를 포함)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교회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당시 네덜란드 남부 지역(현재 벨기에)에 위치한 도르니크라는 지역에서 귀도 더 브레 목사가 1561년 11월 1-2일 새벽에 성(城) 안으로 그 유명한 네덜란드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를 던진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고백서는 개혁가 칼빈이 관여한 프랑스신앙고백서(1559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기에는 특히 교회정치에 대한 조항(30장), 교회의 직분에 대한 조항(31조), 교회의 질서와 권징에 대한 조항(32조)이 들어 있었다. 이는 귀도 더 브레 뿐 아니라 개혁신앙을 가진 신자들이 중세교회와 단절하면서 교회를 새롭게 건설할 때에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 즉 로마천주교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교회론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이 교회론에는 교회정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후 불어를 사용하는 네덜란드 남부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통해 생긴 개혁교회들은 1560년대에 동일한 복음을 토대로 노회로 모여 프랑스개혁교회의 <교회권징서>(1559년)를 본받아 자기들의 고유한 교회정치를 작성하게 된다. 1560년에는 Poitiers에서, 1562년에는 Orleans에서, 1563년에는 Lyon에서, 그리고 1564년에는 안트베르펜(Antwerpen)에서 각각 노회가 열려 교회정치를 작성하였다.3)
도대체 그들의 새로운 교회론이 어떤 것이기에 이들은 신앙고백작성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교회정치를 작성하였을까? 무엇보다 그들이 네덜란드신앙고백서와 함께 고백한 교회는 하나의 보편, 우주 교회였다. 이 교회는 세상의 처음부터 존재했고 마지막 날까지 있을 것인데, 어떤 특정한 장소나 어떤 사람들에게 국한되거나 제한되지 않고 전 세계에 벋어 있고 흩어져 있는, 그러나 한 분 동일한 성령 안에서 믿음의 힘에 의하여 마음과 뜻이 연결되고 연합되어 있는 교회이다(네덜란드신앙고백서 제27조). 그래서 어떠한 사람도 그의 지위나 신분을 막론하고 여기에서 물러나 혼자 있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각각 교회에 가입하고 연합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들은 이러한 교회의 연합이 어떻게 유지된다고 생각하였을까? 이들은 적어도 동일한 신앙고백과 동일한 예배, 나아가 동일한 교회질서, 동일한 교회생활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런 이유로 개혁신자들은 올바른 교회론을 고백할 뿐 아니라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교회질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네덜란드 남부지역교회들이 교회정치를 작성할 때 제일 염두에 둔 것은 지역교회의 독립성이었다. 프랑스교회의 프랑스교회권징서(1559년)가 교권주의를 경계하며 제일 먼저 규정한 “한 교회가 다른 교회 위에 군림하지 못한다”는 제1조에서 영향을 받아 이들 역시 교권주의를 경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2) 베이젤(Wezel) 법령(1568년)4)
돌트교회질서(1619년)가 완성되기까지 종교개혁 이후 이어진 네덜란드 교회역사를 보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돌트교회질서의 기초를 놓은 베이젤 회의의 법령이나 최초 네덜란드개혁교회총회인 엠던 총회에서 작성한 교회정치는 모두 네덜란드 국내가 아니라 신앙의 박해로 네덜란드 국경 밖에서 작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는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식민지로 지내는 중에 독립을 위해 저항하며 일어난 80년 전쟁(1568-1648년)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이끈 것으로 유명한 국왕 필립2세(1527-1598년)는 광적일 정도로 로마 천주교를 신봉하여 개신교를 이단으로 몰아 말살하려고 하였다. 그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인 자신의 아버지 카를 5세보다 더 강하게 식민지 네덜란드의 개신교를 탄압하였다. 특히 필립2세가 네덜란드의 개신교인을 응징하게 위해 1567년 8월에 1만의 군대를 알바 공(公)의 지휘와 함께 보내어 수천 명의 개신교인들이 종교재판소를 통해 교수형과 참수형과 화형으로 처형되었다. 이들은 자기들의 영역에 로마천주교회 외에 어떤 이단도 허용할 수 없었다. 로마천주교회와 단절한 신자들이 얼마나 거센 박해를 받았던지 당시 150만 명에서 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전체 인구 가운데 약 10만 명이 신앙의 박해로 외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주로 영국과 독일북부지역(엠던, 베이젤)이나 심지어 독일의 팔츠 지방으로 흩어졌다. 개혁신앙을 가진 자들이 그때 인구의 10%인 것을 감안할 때 상당수 신자들이 외국으로 피난을 하였으며 박해를 감수하고 국내에 남아 있던 신자들은 그렇게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자들은 국내보다 오히려 영국(런던, 노어위치, 도버, 글라우체스터, 캔터베리 등)이나 독일(엠던, 베이젤, 하이델베르크, 프랑크푸르트 등) 등에서 더욱 활약을 하게 되었다. 비록 외국이지만 난민교회들은 지속적으로 서로 교류를 하였고, 그 결과 각 교회들이 가진 규정들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네덜란드 국경 너머에 있는 베이젤(Wezel)에서 중요한 회합을 가지게 된다. 여러 곳으로 흩어진 이들이 왜 위험을 무릅쓰고 회합을 갖게 되었을까?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이 간절히 바란 것은 물론 그들의 조국이 장차 스페인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께서 복음의 문을 여실 경우”(1장 3조, 8조) 그들의 교회생활에서 동일한 교회질서를 가지고 교회들이 연합하는 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 본 최종목표였다. 바로 이 목표를 위해 조만간 네덜란드개혁교회총회가 조직되는 것을 희망하면서 그 준비 작업으로 교회법령을 만들게 되었다. 지금은 비록 박해 중에 흩어져 있는 나그네지만 그들 모두의 중심에는 조국의 독립이나 교회들의 총회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공교회를 향한 믿음, 하나의 교회질서 동일한 교회생활을 통한 교회연합이 더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베이젤 회합의 회의록을 보면 1568년 11월 3일 일자로 독일과 영국에 있는 피난민교회들과 심지어 박해 중에 있는 네덜란드개혁교회에서 온 55명이 날인하였다(후에 복사본에 추가로 날인한 9명 제외). 여기에는 목사 뿐 아니라 장로와 집사도 있었고 심지어 직분이 없는 교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교회들이 대표로 보낸 총대가 아니라 임의로 온 자들이기에 이들의 모임을 총회가 아니라 ‘회합’(Convent)으로 불리지만, 이 회합은 네덜란드개혁교회 첫 총회를 기대하고 이를 준비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이 회합의 의장은 독일의 팔츠 지방 내 프랑켄탈(Frankental)에서 피난민 교회의 목사로 있는 다테인(Petrus Datheen)이 맡았고, 서기는 영국 노어위치(Norwich)에서5) 피난민 교회의 목사로 있는 무드(Herman Moed)가 봉사하였다. 이 두 사람은 이 베이젤 회합에 조언을 구하기 위해 함께 제네바로 간 것으로 추정이 되며, 거기서 무드 목사는 제네바교회정치(1541/1561년)에 대해 지식을 가지게 되고 또 그가 영국 런던에서 네덜란드 피난민 교회 사역자 아 라스코(John a Lasco)가 만든 런던의 교회질서를 이미 알고 있은 것을 고려할 때 그가 베이젤 교회법령 작성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6)
베이젤 교회법령은 총8장 124조로 구성되어 있다. 치리회가 작성한 것이 아니기에 교회질서라 부르지 않고 베이젤 법령으로 불린다. 왜냐하면 이를 작성한 자들이 교회에서 위임을 받고 온 총대들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 법령들이 교회법에서 규정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아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젤 교회법령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베이젤에서 모인 교회들은 모든 교회들의 공통 사안에 대해 토의를 하면서 법령을 작성하였다. 목사의 시취 및 청빙(2장), 교리문답교육(3장), 장로(4장)와 집사(5장)의 선출과 직무, 세례와 성찬(6장), 결혼(7장)과 권징(8장)이다. 제1장은 당회와 노회를 다루었다. 이 점에서 내용을 따지자면 기타 교회정치의 내용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베이젤 법령은 칼빈의 교회정치인 제네바교회정치에서 여자적으로 차용한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제네바교회정치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여기에는 무드(Moed) 목사의 역할이 아주 컸다.
예들 들어서 권징을 다루는 8장은 14조, 15조에서 각각 목사의 범죄 목록을 두 부류로 나누어서 열거하고 있는데 이는 제네바교회정치(1561년)의 것과 거의 일치한다.7) 목회자들에게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범죄 목록을 첫째 부류로 규정하고 17개의 범죄를 열거한 14조, 용납은 할 수 있으나 반드시 징계해야 하는 범죄 목록을 둘째 부류로 규정하여 17개의 범죄를 열거한 15조와 제네바교회정치를 비교해보면 분류와 순서에서 거의 대동소이하다. 이는 결코 우연한 것이라 볼 수 없다. 또 제네바교회정치처럼 베이젤 법령 역시 집사를 두 부류로 나누어 한 부류는 가난한 자 구제를(5장 5조), 다른 부류는 병자를 방문하는 직무(5장 6조)를 맡긴 것에서도 두 법령 사이의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4장 7조를 보면 장로의 서약이 나오는데 이것 역시 제네바교회정치의 것과 거의 동일하다.
셋째, 제네바교회정치에서 차용된 내용이 많다고 할지라도 베이젤 법령은 여러 형태의 교권주의를 더욱 경계하였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특히 목사가 군림하는 목사정치, 당회나 노회가 군림하는 당회정치, 노회정치와도 거리를 두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예를 들면 베이젤 법령에서 앞서 언급한 목사의 범죄 목록을 열거할 때에 제네바교회정치의 목록과 차이가 나는 것이 하나 있다. 베이젤 법령 8장 15조에 두 번 째 목사의 범죄 목록 끝에 나오는 죄목은 제네바교회정치에 나오는 목록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베이젤에서 새롭게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 죄는 목사가 “공개적으로 회중과 다른 직분자에 대해 교권을 좇는 죄”(heymelyke poginge, en heerschapy sugt over de Gemeynte en syne Collegen) 이다. 로마천주교회의 교권주의는 결국 로마에 있는 한 사람의 목사가 회중과 다른 직분에 대해 교권을 좇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죄는 당시 개혁교회 안의 목사들 중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베이젤 법령은 특별히 반(反)교권주의 경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反)교권주의 성향은 교권주의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장치로서 노회와 같은 치리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데서 볼 수 있다. 8장 20조를 보면 노회는 정기적으로 모여 각 교회를 자세하게 하나씩 살피되 질서대로 교회가 운영되고 있는지, 말씀과 성례와 권징이 바르게 시행되고 있는지, 각 직분자가 선하게 또 열심을 가지고 봉사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회는 개체교회의 동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각 교회의 예배와 권리와 권위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5장 19조). 따라서 베이젤의 법령은 목사정치, 노회 혹은 총회정치에서 나타는 교권주의를 대단히 경계하고 있다고 하겠다.
3) 엠던(Emden)교회질서(1571년)
베이젤 회합이 있은 지 3년 후 1571년 10월 4일에서 13일까지 독일 북부에 위치한 엠던(Emden)에서 마침내 네덜란드개혁교회의 첫 총회가 열렸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들이 하나가 되어 함께 교회생활을 할 토대를 놓은 것이다. 이 총회를 위해 특별히 안트베르펜의 시장으로 재직 중인 마르닉스(Marnix van st. Aldegonde, 1540-1598)가 큰 공헌을 하였다. 1570년 3월 21일자로 작성하여 각 교회들에 회람한 편지에서 그는 프랑스개혁교회의 본을 따라 네덜란드개혁교회들이 하나의 몸으로 연합하여 조직되어야 할 필요를 지적하면서 총회를 제안하였던 것이다.8)
엠던은 네덜란드개혁교회들이 첫 총회로 모이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왜냐하면 1567년 기준으로 엠던에는 네덜란드 피난민들이 6천여 명이 거주한 곳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피난처”라는 별명을 얻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곳에서 유명한 폴란드 출신의 개혁가 아 라스코(a Lasco)가 수년 동안 목회하면서 개혁교회 건설을 위해 큰 영향을 끼친 곳이었기 때문이다.9)
총회에 참여한 총대는 총29명인데(목사 19명, 목사후보생 3명, 장로 5명, 은퇴목사 2명), 이들은 모두 천거서(신임장)를 받아 왔기에 이들이 모임 총회는 합법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총회가 채택한 총53조의 결정들은 합법적인 교회법령이기에 엠던교회질서로 부를 수 있다. 7년 전 안트베르펜(Antwerpen)에서 노회로 모여 작성한 교회정치처럼 엠던교회질서도 프랑스개혁교회의 교회권징서를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독특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에 프랑스교회권징서와 유사한 점이 많다.
첫째, 이미 마르닉스(Marnix)가 편지에서 프랑스개혁교회의 교회권징서를 언급할 뿐 아니라 엠던교회정치 제1조는 프랑스교회권징서의 제1조를 따라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 위에 군림하지 못하며, 어떤 목사가 다른 목사 위에, 어떤 장로도 다른 장로 위에, 어떤 집사도 다른 집사 위에 군림하거나 부당한 교권을 행사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히 교권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엠던교회질서는 여기에 다음을 덧붙임으로써 프랑스권징서보다 한 걸음 더 나갔다: “더욱이 모든 사람은 이러한 군림에 대한 모든 의심과 모든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 엠던교회질서의 제1조는 개혁주의교회법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엠던총회는 바로 이 조항으로 교회질서 작성을 시작하였다.
둘째, 제2조는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프랑스개혁교회의 형제들과 하나임을 전제하고 교리의 하나됨을 위하여 총대들 뿐 아니라 총회에 참석하지 못한 모든 목사들이 네덜란드개혁교회와 프랑스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에 서명하도록 규정하였다(제5조).
셋째, 총회-노회-당회 순서로 치리회를 다룬 프랑스권징서와 달리 엠던교회질서는 치리회 중에서 가장 먼저 당회를 언급하였다(제6조). 그런 후에 시찰회(Classis, 7장), 노회(8장), 총회(9장)을 이어서 다루었다.
넷째, 프랑스권징서처럼 목사와 장로 뿐 아니라 집사도 당회를 구성한다고 보았지만(제6조), 프랑스권징서와 달리 시찰회에 대한 규정을 두어서 분기마다 혹은 6개월에 한 번 씩 모이도록 하였다. 노회는 매년 회집하도록 하였고 총회는 2년마다 회집하도록 하였다.
그 외에 엠던교회질서는 장로와 집사는 임기 2년을 원칙으로 하되 매년 절반씩 선출하도록 하였으며 목사의 시취, 결혼, 이명증, 권징 등을 다루었다.
엠던교회질서는 2개 언어로 작성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제네바교리문답을 사용하고 있고 불어가 통용되는 교회를 위해 불어로 작성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을 사용하고 있고 네덜란드어가 통용되는 교회를 위해서 네덜란드어로 작성하였다.
엠던의 교회질서는 어떤 점에서 임시적인 성격을 가졌다. 왜냐하면 당시 네덜란드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는 중에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네덜란드개혁교회들은 회중주의와 거리를 두었다! 제일 마지막 조항인 제53조는 만장일치로 채택한 본 교회질서의 합법적인 각 조항들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수정과 확대와 축소가 가능하지만, 모든 교회들은 총회가 달리 결정하기까지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4) 1570-1580년대 교회질서
엠던 총회 이후 교회질서는 이어진 총회들 즉 1574년 돌트 총회(총91조), 1578년 돌트 총회(총102조), 1581년 미델부르흐 총회(총69조), 1586년 헤이그 총회(총79조)에서10) 일부 수정되다가 마침내 1618/1619년의 돌트 총회에서 우리가 아는 돌트교회질서로 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이루어진 몇 가지 중요한 개정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574년 돌트 총회는 신앙고백서와 교회질서에 서약하는 것을 목사 뿐 아니라 나아가 장로와 집사, 교사에게도 요구하였고(30조), 1578년 돌트 총회는 신학교 교수에게도 요구하였다(50조).
둘째, 엠던교회질서는 목사 장로 집사 세 직분을 말하였으나 1581년 미델부르흐 총회는 여기에다 박사(Het Ampt der Doctoren in de Theologie, 신학교의 교수)를 더하여 네 직분을 말하였다(13조). 박사의 직무는 성경을 해설하여 이단과 오류에 대항하여 순전한 교리를 세우는 일을 하는 것이다.
셋째, 엠던교회질서는 집사를 당회원으로 보았지만, 1574년 돌트 총회는 장로가 부족할 경우에만 집사가 당회원이 되어 당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4조).
넷째, 엠던교회질서는 장로와 집사 선출을 당회에서 하고 회중은 조용히 심사만 하도록 하였지만, 1574년 돌트 총회는 당회가 후보자 2배수만 제시하고 선출은 회중이 하도록 하였다(28조), 또 1578년 총회는 더 나아가 회중이 후보를 추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12조).
다섯째, 1574년 총회는 교회 치리회가 교회와 관련된 일만 다루도록 규정한 바가 있는데(27조), 1586년 총회는 이 조항을 그대로 두고 34조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여 정부에서 파견한 사람이 당회에 참석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즉 그가 비록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당회에 참석하여 교회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엠던교회질서는 집사의 직무를 다룰 때 그 직무의 성격 상 정부를 언급할 뿐이었지만 이후 총회는 점점 정부에 많은 권한을 주게 되었다. 이는 결국 사람들이 정부의 편에 서서 이해했다는 것을 가리키며 교회가 정부에 양보했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조짐은 이미 1574년 돌트 총회의 결정 “교회 치리회는 교회 일에 대해서만 다룬다”는 27조의 결정에 대해 특히 홀란드(Holland) 주와 제일란트(Zeeland) 주 정부가 이와 다른 교회법령을 초안한 것에서 드러났다(1576년). 즉 주 행정장관이 목사를 선출할 뿐 아니라 자기 편 사람 중에서 장로를 선출하며, 이 장로들은 목사들의 모임에 참여하여 알아야 할 것을 주 장관에게 알리도록 하였고, 권징 건은 정부의 동의를 얻도록 하였다. 당시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 7개 주가 하나의 네덜란드공화국을 형성하는 시기는 아직 국가적으로 통일을 이루어가는 과도기에 있다 보니 홀란드 주와 제일란트 주가 만든 교회법령 외에도 정부가 주도해서 만든 교회법령들이 여럿 있었다.11)
도대체 기독교 정부가 왜 교회에 대해 권한을 강화시키려고 한 것일까? 한편으로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로마 천주교회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교황주의를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목사가 작은 교황처럼 행사할 수 있는 것을 경계하였다. 스페인의 박해를 받아 외국에서 유랑한 경험을 교회들 편에서도 혹시라도 개신교인이 아닌 사람이 정부의 요직에 앉아서 교회에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여 정부의 보호를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12) 그래서 경건한 개신교 정부는 다른 나라 경우처럼 종교와 관련하여 교회법령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대제사장 아론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법령을 주신 것에 그 근거를 두면서 정부와 무관하게 교회가 목사를 선출할 경우 정부의 법이 훼손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정부가 주도해서 만든 교회법령은 모두 이러한 생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홀란드 주와 제일란트 주가 준비한 교회법령은 비록 도입되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이 강조한 요점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는 1574년, 1578년, 1581년의 교회질서는 물론 정부에 ‘새로운 양보’ 규정을 작성한 1586년의 교회질서도 채택하지 않는다. 정부와 교회 간에 팽팽한 알력에 핵심은 목사의 임직인데 1578년 교회질서를 보면 정부의 편에서 개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즉 목사는 당회에 의해 선출되고 회중의 동의가 있기 전에 정부에 설명하도록 한 것이다(제4조, ...De Dienaren aldus verkoren en beproefd zynde, sullen de Gereformeerde Overheyt aangegeven, en voorts der Gemeente den tyd van veertien dagen voorgestelt worden...").
문제는 교회에 대한 정부의 권한을 둘러싼 이 투쟁은 교리투쟁과 연계되면서 더욱 복잡한 양상을 가지게 된 것에 있었다. 왜냐하면 교회 사안에 대해 정부가 가지는 권한, 주로 정치인들이 견지하는 이 입장은 소위 항론파(Remonstranten)들13)이 지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항론파 지도자인 위텐보헤르트(Wtenbogaert)는 “교회 관련 사안에서 고위 기독정부의 직분과 권세(Tractaat van 't Ampt ende Authoriteit eener Hooger Christeijcker Overheyt in kerckelijcke Saecken)라는 논문에서 정부와 교회의 관계에서 다음의 세 경우를 분류하였다. 첫째는 교회가 모든 생활의 영역을 다스리는 경우이고, 둘째는 교회와 정부가 각각 나란히 협력하여 권위를 나누어 가지는 경우이고, 셋째는 신령한 일과 세상의 일 모두에서 정부가 최종의 권위를 가지는 경우이다. 그는 첫째 경우는 로마천주교회, 둘째 경우는 개혁교회, 셋째 경우는 항의파들인 자신들의 주장이라고 하였다. 즉 정부는 교회적 권세와 정치적 권세를 모두 시행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발뢰스(Waleus) 와 여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위 주장을 논박하였다: 시민정부와 교회정부 사이의 협력이란 있을 수 없으며, 교회 안에는 소위 교회정부라는 것이 없다. 교회에서 유일한 정부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 분이 자기의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 다만 그리스도는 자기의 사역자들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사역자들인 이들에게 말씀의 봉사를 위임하셨다. 따라서 그들의 권위는 곧 말씀의 권위 외에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교회가 가진 권위의 특성과 정부가 가진 권위의 특성은 서로 다르며, 전자가 ‘섬기는 권위’라면 후자는 ‘명령하는 권위’이다. 정부의 소명은 종교와 관련하여 네덜란드신앙고백서 36조에서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14)
5) 돌트교회질서(1619)
돌트교회질서를 확정한 돌트 총회는 교회들이 개회와 폐회를 주도한 것이 아니라, 당시 네덜란드공화국의 중앙기구로서 7개 주의 대표로 구성된 소위 국회(Staten Generaal)가 소집한 교회회의였다. 그래서 교회들이 합법적으로 파송한 총대들 뿐 아니라 이 총회에는 18명의 국회를 대신한 위원들도 참석한 자리였다.15) 국회는 특별히 당시 교회와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항론파들(Remonstrants)이 제기한 주장들 때문에 빚어진 교회 내의 교리논쟁과 교회분열을 국가 차원에서 해결하기를 원하였다.
이 시기는 네덜란드가 국제정세의 변화로(스페인의 무적함대 패배, 네덜란드의 영국과 프랑스와 동맹체결 등) 스페인과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을 끝내고 스페인과 휴전협정에 들어가 1609년부터 12년 동안 자주 독립국의 지위를 보장 받게 된 시점이었다. 또 1588년에 7개의 주가 공화국으로 형성되어 국가형태를 갖추고 각 주에서는 주 의회가 정책을 결정하고 그 대표가 국회를 결성하여 국정을 논의하는 체제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각 주는 각 주 정부가 자기 지역의 종교문제를 해결하되 만일 전국적인 종교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국회가 맡아서 처리하도록 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16)
바로 이때 항론파의 등장으로 교회와 사회갈등이 크게 격화되면서 처음에는 총회 소집이 교회연합을 이루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소극적이던 국회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총회를 소집하기로 하지만 총회 일정과 의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커서 성사가 되지 못하다가 마침내 1618년 11월 13일에 돌트렉흐트에서 총회가 모이게 되었다. 여기에는 외국교회들의 영향도 있었다. 왜냐하면 네덜란드 교회에서 항론파로 인하여 일어난 신학논쟁은 유럽에 있는 개혁교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돌트 총회가 직면한 문제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네덜란드신앙고백서(1561년)의 권위에 대한 것이었고, 둘째는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돌트 총회는 한편으로는 신학적인 교리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모였기에 교회들이 위임한 총대들(목사 37명, 장로 18명),17) 국내 5개 대학교에서 1명씩 파견한 신학교수들(5명)과18) 뿐만 아니라 해외 특히 영국, 스위스, 독일, 프랑스에서 위원들(26명)을 초청한 국제적(에큐메니컬)인 교회 총회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국회가 교리논쟁으로 빚어지는 국론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국회가 파견한 18명의 위원들이 입회한 회의이기도 하였다.19) 이 점은 돌트신경 작성이 완료되고 외국인들이 떠난 후 1619년 5월 13일에 다시 재개되어 그동안 미루어 온 교회질서 개정 작업이 착수될 때에 여실히 드러났다. 즉 총대들은 개정할 교회질서가 국회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정부의 권한을 확대하는 조항들을 일부 수정 혹은 신설하게 되었다.
1619년 5월 13일 오전 제155차 회의로 재개된 총회는 폐회하는 1619년 5월 29일 오전 제180차 회의까지 세 번의 주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9시-12시)과 오후(4시-7시)에 회의를 하여 13일 동안 총 26차 회의를 가졌고,20) 마침내 돌트교회질서를 완성하였다. 제155차 회의는 무엇보다 직전 총회인 헤이그 총회(1586년)에서 개정된 교회질서(총79조)를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하므로 새로운 교회질서 작성을 시도하지 않고 지금까지 앞선 총회에서 개정한 교회질서 위에서 작업을 착수하게 되었다. 1568년 베이젤 회합이후 1586년 헤이그 총회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들은 교권주의를 경계하면서 개혁주의 원리를 교회생활에서 실천에 옮기기 위해 교회법령들을 점차 완성시켜왔기 때문이다. 교회질서와 관련하여 다양한 안건이 제출되기는 하였지만(120개의 안건)21) 총회에서 수정하거나(4, 5, 44, 58, 67, 69조), 신설한 조항(8, 9, 28, 42, 48, 49, 59조)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모두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첫째, 제8조가 신설되었다. 이 조항은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자를 목사로 임직하는 경우를 다루고 있는데, 1574년 돌트 총회는 이런 자들이 있을 경우 비록 신학은 공부하지 않았지만 경건과 겸손, 웅변력, 분별력과 탁월한 지성의 은사가 있을 경우 설교연습을 통해 임직하도록 하였으나(21조), 1619년 돌트 총회는 나아가 더욱 까다롭게 하여 시찰회나 노회가 이 모든 것을 시취하도록 하였다.
둘째, 신설된 제9조는 신부나 수도사나 기타 다른 분파를 떠난 자들을 목사로 임직할 경우 아주 신중할 것을 강조하는 조항이다. 종교개혁 당시에 이런 자들이 교회에 많이 오게 되었으나 때로는 교회를 어렵게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돌트 총회는 이런 자들을 충분하게 감독할 것을 규정하였다.
셋째, 41조의 규정에 따라 목사 1명 장로 1명만 총대로 시찰회에 올 수 있지만, 신설된 42조는 한 교회에 목사가 2명 이상 있을 경우 총대가 아닌 목사도 시찰회에 올 수 있게 하되 언권만 가지고 결의권은 갖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왜냐하면 목사 수가 많은 교회가 다른 교회 위에 군림하는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넷째, 48조에 각 노회 간의 교류에 대한 조항이 신설되었다. 돌트 총회 이전에 이미 노회들 사이에는 다음 총회가 개회될 때까지 상호 교류가 활발하게 증가되고 있던 터였다. 1586년 헤이그 교회질서를 따르면 총회는 3년 마다 열리는 것이기에 노회 간의 교류는 실제적으로 필요하였다. 교류는 주로 노회가 열릴 때 총대들을 보내고 받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교류의 목적은 이를 통해 교회의 하나됨과 연합을 더욱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노회 간 교류는 특히 돌트 총회(1618-1619) 이후 정부의 압력으로 200년 이상 동안 총회가 열리지 못할 때 교회연합의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노회마다 직면한 수많은 사안들이 교류를 통해 해결되었고, 특히 유명한 네덜란드국가공인성경이 번역되기도 하였다(1637년). 또 노회들이 연합하여 국민생활에 해를 끼치는 잘못된 관습을 폐지하도록 정부에 촉구하기도 하였으며, 1775년에는 새로운 시편찬송가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48조 노회 간의 교류 조항은 여러모로 교회들에 큰 유익을 주었다.
다섯째, 49조 역시 신설되었는데 노회가 위원들을 선정, 파송하여 노회가 결정한 모든 것을 정부와, 노회 관할 하에 있는 각 시찰회에서 실행되도록 하고, 또 모든 시찰회의 시취를 감독하고, 시찰회에 일어나는 모든 어려운 문제에 도움을 제공하도록 한 조항이다.
여섯째, 신설된 59조는 성인으로서 세례를 받은 자에 대한 조항으로서 그가 성찬에 참여할 의무가 있음을 서술하였다. 그래서 성인 세례와 성찬을 분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일곱째, 44조는 교회시찰에 대한 조항인데 일부가 수정되었다. 이전에는 교권주의에 대한 우려 때문에 시찰회가 가끔 간과될 때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교회시찰이 모든 교회가 지켜야 할 의무가 되었고, 시찰의 직무에 대해 분명하게 서술하였다.
여덟째, 58조는 목사가 세례(유아든 성인이든) 시에 반드시 총회가 정한 세례예식서를 사용하는 것을 의무로 규정한 것으로서 수정되었다.
아홉째, 67조는 교회가 지킬 절기에 대한 조항인데 이전에는 ‘정부가 명하는 축제일’이라는 애매한 문구가 있었으나 이번에 삭제되었다. 대신 교회가 지킬 절기를 하나씩 열거하였다. 주일, 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할례일(새해 첫주일), 승천절이다.
열째, 69조는 찬송에 대한 조항인데 본래 시편 찬송만 부르도록 한 것을 6개의 찬송-주기도, 십계명, 사도신경, 마리아 찬가, 사가랴의 찬송, 시므온의 찬송도 부르도록 규정하였다.
열한 번 째, 정부의 입장을 의식하여 정부의 권위를 확대하는 조항을 수정 혹은 신설을 하게 되었다. 즉 4조, 5조를 수정하여 일부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였고, 28조는 신설하였다.
우선 목사 청빙 시에 행정관의 권한을 확대시켰다. 목사 청빙과 관련된 조항인 4조에서 목사 청빙 선출 시에 정부와 ‘좋은 교류 가운데’(in goede correspondentie) 이루어져야 한다고 첨가하였다. 물론 여기서 정부는 기독 정부를 가리킨다. 총회에 입회한 국회의원 정치인들은 기독 영주나 기독 정부와 교류 없이는 교회가 목사 청빙을 위한 선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또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목사 청빙 선출에서 특정인(후견인)이 해당 목사를 제시하는 권한을 주는 조항을 신설하였다(5조). ‘하나님의 교회와 교회정치에 손실을 끼치지 않는’ 조건으로 특정 개인에게 청빙할 목사를 제시하는 권한이 유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본래 이 권한은 ‘성직임명권’(patronaatrecht)에서 비롯된 것인데 12세기부터 내려 온 아주 오래 된 관습이었다. 즉 어떤 특정한 지역의 군주인 영주가 자기 지역에 있는 교회에 성직자를 임명권을 주는 대신 그 교회와 성직자를 후원하는 의무를 지게 하는 제도였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이 관례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분명히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주권자이기에 교회 내에서 특정 개인이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 돌트 총회 이전 총회들에서는 이 관습에 대한 해결책을 위해 질문만 제기될 뿐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돌트 총회에서는 이 문제를 광범위하게 토론하고 협의 끝에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특정 개인에게 청빙할 목사를 교회 앞에 제시하는 권한을 주는 것을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소지를 가진 4조와 5조의 개정은 결국 이후에 폐지가 되고 만다(1892년 교회질서에서).
또 28조가 신설되었다. 이 조항은 교회를 위한 정부의 소명과, 정부를 위한 교회의 소명을 각각 다루고 있는데, 한마디로 교회가 정부와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가에 대한 조항이다. 이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독정부의 직분은 거룩한 교회의 예배를 모든 면에서 증진시키고, 또 공직자들이 이에 모범을 보이도록 장려하며, 모든 곤경에 처한 목사와 장로, 집사들을 도와주고 또 선한 질서를 통해 이들을 보호하는 것에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목사와 장로와 집사는 모든 회중이 그들의 공직자들에게 순종과 사랑과 공경으로 대할 수 있도록 주입시켜야 하며 또 교회 직분자들이 먼저 선한 본을 보여 상당한 공경과 교류를 통해 정부가 교회에 호의를 베풀 수 있도록 촉구해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 모든 사람이 주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상호 의무를 다하여 모든 의심과 불신을 예방하여 교회에서 하나됨과 성숙을 보전해야 할 것이다.”
우선 이 조항 내용의 첫 부분은 교회를 향한 정부의 소명에 대한 것인데 내용으로 볼 때 네덜란드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 36조와 일치한다. 아니 오히려 이보다 더 축소하여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22) 28조는 먼저 교회를 향한 정부의 소명에 대해 설명한 후에 이제 정부를 향한 교회의 소명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첫째, 직분자들은 정부에 순종할 수 있도록 모든 회중에게 촉구하며 또 모범을 보여야 한다. 둘째, 좋은 교류를 통해 정부가 교회를 향해 호의적이 될 수 있도록 애를 써야 한다. 이 내용 자체를 두고 보면 성경의 원리에 반한다고 볼 수 없다. 정부에 대한 공경과 순종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그리스도 자신이 본을 보이셨다(마태 17:24-27, 그 외에 로마서 13장, 베드로전서 2:17, 디모데전서 2;12를 참고). 물론 이 성경의 원리를 특별한 경우에까지 적용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에 거스르는 정부에 대해 교회가 어느 정도까지 순종할 수 있는지, 언제 정부를 향한 합법적인 저항을 시작할 수 있는지 등의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28조가 교회와 정부, 모두 각각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기에 다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상호 협력을 하도록 하였지만, 오늘날 대부분 세속화된 정부를 가진 상황에서 이 조항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현재 네덜란드개혁교회에서 이 조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교단은 그렇게 많지 않다(CGK[기독개혁교회]-2010년, Gereformeerde Gemeente-2008; GKV[해방파]는 2014년 개정에서 삭제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돌트 총회는 왜, 무슨 이유로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문제의 소지가 다소 있는 조항을 개정 혹은 신설을 하였을까? 지역의 경건한 영주에게 청빙 받을 목사를 제시하는 권한을 주므로 그가 교회당 시설과 그 목사를 부양하는 장점을 충분히 이용하기 위해 그렇게 하였을까? 왜 정부에 목사 임직과 목사 이동을 승인하는 권한을 주고 또 정부가 파견하는 대표가 당회와 노회, 총회에 참석하도록 하였을까? 교회가 정부의 후원을 바라서 그런 것일까? 우리는 이들이 ‘자의로’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이러한 조항을 받아 들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국회가 소집하고 또 국회의원들이 참석한 총회이고 또 이들 정부가 불신정부가 아니라 개신교 정부였고, 나아가 개혁주의원리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상 이들의 장점을 충분히 살려 기독 정부가 건전하게 교회를 보호해주기를 원하였고, 무엇보다도 돌트교회질서가 국회의 인준을 받아야 하는 당면목표 때문에 총회가 정부의 입장을 불가피하게 충분히 고려해서 생긴 것으로 조심스럽게 판단할 수 있다. 하여간 이 점은 돌트교회질서가 가진 한계로 보인다.
6) 돌트교회질서 이후
정부를 의식한 나머지 교회 입장에서 볼 때 문제의 소지가 있는 개정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돌트교회질서는 국회에서도 공식적으로 승인 받지 못하였다. 또 각 주 의회도 다르게 결정하였다. 7개 주 가운데서 오버레이설(Overijsel)만 돌트교회질서를 승인하였고, 일부 주는 조건부로 승인하였고(Utrecht, Gelderland), 나머지는 이전의 교회질서를 채택하는 경우도 있었다(Friesland-1586년 교회질서, Zeeland-1591년 교회질서, Groningen-1595년 교회질서).23)
이와 같이 각 주마다 제 각기 다른 교회질서를 가지게 되었지만 각 주가 채택한 교회질서는 대부분 돌트교회질서와 일치하기 때문에 1816년 윌리엄스 1세 왕이 “일반 규칙”(Algemeen Reglement)24)을 제정하여 모든 교회에 강요하기 전까지는 네덜란드개혁교회는 사실 상 돌트교회질서를 따라서 동일한 교회생활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교회가 몇 가지 점에서 정부에 많은 양보를 한 점은 돌트 총회 이후 교회와 정부 사이에 갈등을 빚는 원인이 되고 만다. 어떤 방법으로든 정부는 교회 일에 관여하기를 원하였고 특히 교회가 시행하는 권징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반면 교회는 교회의 독립성과 자유를 지키려고 안간 힘을 썼다.
정부와 교회 간의 갈등 때문에 돌트 총회 이후 약 두 세기 동안 총회는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정부 편에서 볼 때 요구되는 협력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가 총회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들이 직면한 수많은 문제들은 각 주 의회의 승인 아래 열린 노회를 통해서, 또 노회 간의 상호교류를 통해서 해결되었다.
1816년에 윌리엄스 1세 왕이 강요한 새로운 교회질서로 인해 지금까지 네덜란드개혁교회들이 동일한 교회질서를 따라 생활해온 하나의 흐름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러한 중단은 국가교회에서 분리한 교회들의 첫 총회(de Afscheiden Kerken)가 1836년 암스테르담에서 개회하여 다시 돌트교회질서를 회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837년에서 1840년까지 약간의 논란이 있었으나 1840년 위트렉흐트(Utrecht)에서 총회에서 특히 헨드릭 더 콕(Hendrik de Cock) 목사의 촉구로 교회 안에서 정부의 권한을 규정한 규정을 배제한 돌트교회질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결정하게 되었고,25) 이후 돌트교회질서는 지금까지 네덜란드개혁교회 교회질서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3. 돌트교회질서(1619년) 해설
돌트교회질서를 구분하면, 제1조는 교회질서의 목적과 내용을, 제2조에서 28조까지는 직분을, 29조에서 52조까지는 치리회를, 53조에서 70조까지는 교리와 예배의 감독을, 제71조에서 86조까지는 권징을 다루고 있다.
1) 서론: 제1조는 교회정치의 목적과 내용을 밝히고 있는데, 즉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모든 것이 좋은 질서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여기서 말하는 질서는 화평을 위한 질서를 가리킨다(고전 14: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네덜란드신앙고백서 32조 역시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교회를 다스리는 자들이 몸 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질서를 세움이 유익하고 좋은 것이지만, 그들은 항상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도입되어 어떤 방식으로든 양심을 속박하고 강제하는 모든 인간적인 고안이나 규범들을 배격한다. 우리는 오직 조화와 일치를 보존하고 증진시키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나가도록 하는 것에 적합한 것만을 받아들인다. 그 목적을 위해서 권징과 출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시행되어야 한다.”
둘째, 교회질서 조항은 개정될 수 있다. 영구한 법이 아니므로 교회가 필요한 경우에는 개정할 수 있다. 제86조는 교회정치와 관련한 이 모든 조항들은 공동 합의로 제정된 것이며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지만 교회에 중요하다면 이를 수정 보완 축소할 수 있다고 하였고, 그러나 당회나 노회나 지방회가 하지 못한다. 총회에서 수정되지 않는 이상 교회정치의 조항을 열심으로 지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85조는 교회정치나 교회 행습 중 사소한 것으로 인하여 외국교회들이 정죄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2) 직분
첫째, 돌트질서는 전체적으로 직분을 통한 통치(다스림)을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네덜란드신앙고백서 30조(교회의 통치)가 적절하게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이 참 교회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방식대로 영적으로 통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를 시행하기 위해서 목사 혹은 목사들과, 목사들과 함께 치리회를 구성할 감독들과 집사들이 있어야 한다.”
둘째, 네 가지 종류의 ‘직무’(diensten)를 말하고 있다: 제2조는 네 가지의 직무 즉, 말씀의 봉사자와 박사, 장로와 집사의 직무이다. 비록 직분이 아니라 직무라고 말하고 있지만, 네 가지의 직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이전 개혁교회 선진들이 박사를 교회직분으로 여긴 칼빈의 노선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1568년의 베이젤 법령은 박사를 직분으로 말하였고, 이어진 총회 즉 엠든(1571), 1574년 돌트 총회, 1578년 돌트 총회는 박사를 직분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신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에 대해 말하였다. 돌트교회질서는 다시 박사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1586년 헤이그교회질서에서 보는 것처럼 신학교의 교수와 일치한다: “박사 혹은 신학 교수의 직분은 성경을 강해하고 이단과 오류에 대해 순전한 교훈을 변증하는 것이다.” 한편 네덜란드신앙고백서 30조는 세 직분 즉 목사 장로 집사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돌트교회질서가 넓은 의미에서 교회사역을 서술하고 있는 것에 대해 네덜란드신앙고백서는 좁은 의미에서 교회직분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박사의 직분을 교회의 직분으로 보지 않고 학교의 직분으로 본 것이다.
셋째, 목사의 직무(16조)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목사의 직무는 기도와 설교와 성례 봉사에 신실하는 것이다. 또 다른 동료 직분자들과 회중을 잘 살펴야 하며 또 장로와 함께 권징을 시행하며, 모든 것이 적당하고 질서 있게 되도록 살펴야 한다(16조).
넷째, 박사의 직무(18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경을 강해하고, 이단과 오류에 대하여 순전한 교리를 변증하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박사는 학위를 가리키지 않고 목사 후보생을 양성하는 직무를 가리킨다.
다섯째, 장로의 직무(23조)는 목사와 함께 감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직무로서 목사와 다른 장로, 집사들이 직분을 신실하게 완수하는지 감독해야 한다. 또 다른 직무는 회중을 세우기 위해 가정을 방문하는 것인데 성찬 전후로 또는 회중을 위로하고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다.
여섯째, 집사의 직무(25조/83조)는 구제금 등을 모아 필요한 자들에 나누어 주는 것이며, 곤경 가운데 있는 자들을 방문하여 위로하며 구제금이 남용되지 않도록 감독하는 것이다.
일곱째, 장로와 집사의 봉사 기간을 말하고 있다(27조). 즉 해당 교회의 상황이나 유익에 의해 다르게 요구하지 않는 이상 2년을 임기로 봉사하며, 매년 절반씩 교체하도록 하였다.
여덟째, 모든 직분자는 반드시 합법적으로 부르심을 입어야 하며, 만약 이를 어기고 여러 번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계속 고집할 경우에 시찰회는 그를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로 선언하며 어떤 식으로든 징계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제3조).
3) 목사
첫째, 돌트교회질서는 목사에 대해 많은 조항을 할애하고 있다(4-20조항까지/장로와 집사는 22-27조항까지). 그 이유는 목사의 직무가 말씀의 봉사에 대한 것으로 교회생활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의 봉사를 통해서 자기의 백성을 교회로 인도하시고 보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봉사는 회중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목사 역시 사람이기에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동시에 악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따라서 목사의 영향력이 선한 것이 되도록 교회질서가 충분히 다루고 있다.
둘째, 목사의 교육에 대해 말하고 있다. 좋은 목사가 되려면 무엇보다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트교회질서는 제2조에서 네 가지의 직무 중에서 두 번 째로 박사 혹은 신학 교수의 직무를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조는 교회들이 신학생들이 항상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필요하면 그들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8조는 신학 교육을 받지 않는 목사후보생을 말하고 있다. 즉 신학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경건, 겸손, 절제, 분별력, 언변에서 특별한 은사를 가졌다면 목사 직분에 허락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조항의 배경은 당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이 네덜란드에는 없고, 하이델베르크나 제네바, 바젤, 취리히 등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었고 반면 당시 목사의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회는 보다 짧은 과정을 밟아 목사를 세우는 길을 제시하였다.
셋째, 신학 교수와 함께 목사는 일치를 위한 세 신조에 서명해야 했다. 왜냐하면 이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를 거절하는 자는 당회와 시찰회에서 정직될 수 있었다(53조). 또 다른 교회로 청빙이 있을 경우 해당 교회의 당회에 교훈과 생활에서 선한 증거(attestation)를 제출해야 했다(5조).
넷째, 목사의 직무는 평생에 걸친 것으로 목사가 한 번 합법적으로 소명을 받는다면 평생 동안 교회 봉사에 매여 있기에 중대한 이유 없이 또 시찰회의 허락 없이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다고 하였다(12조). 목사의 소명은 다음으로 이루어진다(4조): 금식과 기도 후에 당회와 집사들에 의한 선출, 시찰회의 시취(교훈과 생활에서), 정부와 교인들의 승인, 회중 앞에서 공적인 임직(서약과 권면과 안수). 목사 부양에 대해서는 당회가 회중을 대표하여 책임을 가진다고 하였고(11조), 목사가 나이나 질병이나 혹은 다른 이유로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더라도 목사라는 직함을 유지하며, 목사가 봉사하는 교회는 그를 적절한 방법으로 부양하되 목사의 미망인과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13조). 또 당회의 조언 없이 목사를 교회에서 사면시킬 수 없다고도 하였다(14조). 또 목사가 교회에 해를 끼치고 정부에 의해 형벌 받을 수 있는 중대한 범죄를 받을 경우 당회와 회중의 판단으로 정직될 수 있으며, 면직될 경우는 시찰회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다섯째, 목사의 특별한 기능을 말하고 있다. 즉 당회와 시찰회의 의장이다. 37조는 당회가 정기적으로 목사에 의해 혹은 목사가 교대하며 주재하여 회집하며, 시찰회 역시 목사들이 교대로 모임을 주재하거나 혹은 모임에서 의장을 선출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일한 목사가 계속해서 2회 선출될 수 없다고 하였다(41조). 또 목사는 시찰의 기능을 한다. 44조는 시찰회가 나이가 있고 경험이 있고 자질을 갖춘 목사, 최소한 2명 이상에게 권한을 주어 매년 관할 지역의 모든 교회들을 방문하여 목사와 당회와 학교교사들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교리의 순전함을 지키고 모든 것에 질서가 있도록 하여 교회를 세우도록 하였다.
여섯째, 목사의 군림을 경계하였다. 84조는 한 목사가 다른 목사에 대해 군림할 수 없다고 하였을 뿐 아니라, 4조는 목사가 합법적인 소명을 받지 않고서는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15조는 목사가 당회의 동의 없이 자의로 다른 교회에서 성례를 시행하거나 설교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지역 교회의 청빙을 받지 않고서는 목사 임직을 받을 수 없으며(4조), 심지어 지역 교회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 특별한 직무(병원이나 군주 등)를 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6조). 즉 직분과 지역교회를 분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4) 교인
첫째, 교회질서는 직분, 직분의 회인 치리회 뿐 아니라, 교회 즉 직분으로 부름 받지 않은 교인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회에는 모든 것이 좋은 질서 가운데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1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체인 교인들로 구성되기에 교회질서는 교인의 지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교회는 당회의 독주를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동시에 당회가 교인이 선출된 대표로서 행세하는 일종의 민주주의도 지양한다. 교회에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통치만이 있을 뿐이다.
둘째, 교인은 직분의 소명에 기여할 수 있다. 즉 목사의 소명에 동의를 할 수 있으며(4, 5조), 또 장로와 집사의 소명에도 기여할 수 있다(22조, 24조).
셋째, 상소할 권리가 있다(31조). 어떤 사람이 소회(하회)의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과 총회의 결정에 위반된다고 판단할 때 대회(상회)에 상소할 수 있다.
5) 치리회
첫째, 4개의 치리회 즉 당회, 시찰회, 노회, 총회가 있다. 무엇보다 당회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며(37조), 장로의 수가 적은 당회의 경우는 집사가 당회에 속할 수 있다(38조). 시찰회는(41조) 인접 지역에 있는 교회들로 이루어지는데 각 교회에서 목사 1인과 장로 1인을 파송하며, 3개월에 한 번은 열려야 한다. 목사들이 교대로 그 모임을 주재하며 혹은 그 모임에서 의장을 선출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목사가 계속해서 2회 선출될 수 없다. 의장은 각 교회가 당회를 회집하고 있는지, 가난한 자들과 학교를 잘 돌보고 있는지, 시찰회의 판단과 도움이 필요한 것이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노회 직전 마지막 시찰회에서는 파송할 총대를 선출해야 한다. 노회는(47조) 인접한 4-5개의 시찰회로 구성되며, 각 시찰회는 2명의 목사와 2명의 장로를 파송한다. 노회는 긴급한 이유가 없으면 1년에 한 번 모인다. 총회는(50조) 긴급한 이유가 없으면 3년에 1회 모이며, 각 노회는 2명의 목사와 2명의 장로를 파송한다. 각 치리회 의장의 직분은 모임이 마칠 때 종결된다(35조).
둘째, 집사들은 집사의 직무를 다루기 위해 매주 회집해야 하며, 이를 위해 목사가 감독을 잘 해야 하며 필요한 경우 참석할 수 있다(40조).
셋째, 노회나 총회로 파송되는 총대들은 보내는 자들이 서명한 신임장을 지참해야 하며 이를 근거로 투표권을 가진다.
넷째, 치리회는 의장과 서기가 있어서 차례대로 또 중요한 것을 기록해야 하며(34조), 특히 의장은 안건들을 분명하게 제시하며 토론이 질서 있게 진행되도록 살펴야 한다. 사소한 것에 언쟁을 하거나 격렬한 감정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발언권을 중지하고, 그들이 듣지 않을 시에는 그들을 징계해야 한다. 그의 업무는 해 치리회가 끝마칠 때 종결된다(35조). 43조는 특히 시찰회나 기타 치리회에서 징계를 받을 일을 행한 자들이나 소회(小會)의 권면을 경멸한 자들을 권징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81조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는 서로 기독교적인 권징을 시행하고 또 직분의 봉사와 관련하여 친절하게 서로 권면해야 한다고 하였다.
다섯째, 치리회의 권한에 대해서 30조는 오직 교회적인 사안에 대해 그리고 교회적인 방법으로 다룰 것을 말하고 있다.
6) 공예배
예배와 관련하여 몇 가지 질서를 말하고 있다.
첫째, 68조는 오후설교에서 차례대로 교회가 채택한 교리문답에 나타난 기독교의 교훈의 요약을 설명하여 매년 마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현 일부 개혁교회들의 교회질서에서 규정하는 것처럼(해방파의 경우 1978년의 교회질서에서 65조) 주일에 두 번 예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는 점이 눈에 띈다.
둘째, 공예배에서 찬송은 다윗의 시편 150편과 십계명, 주기도, 사도신경, 마리아의 찬송, 사가랴의 찬송, 시므온의 찬송 외에 다른 찬송을 부르지 못하도록 하였다(69조). 엠던 총회 이후 이어진 총회는 칼빈의 노선을 따라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찾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었기에 공예배의 찬송을 두고서도 다른 찬송가를 부르기를 꺼려하였다.
셋째, 주일 외에 다음의 교회절기, 성탄절 부활절 승천일 오순절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67조). 그리고 66조는 전쟁이나 전염병, 기근, 심각한 교회 박해나 기타 큰 어려움이 있을 때에 교회는 정부를 위해 기도하며, 정부의 허락으로 공적인 금식과 기도일을 정하여 거룩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64조는 매일 저녁기도회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1581년 교회질서에서 신설된 것으로서 로마천주교회의 매일 저녁기도회(Vespers)에서 비롯된 관습이다. 64조는 시찰회의 허락 없이는 이 관습을 폐지하지 말 것을 규정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온 회중에 저녁 시간에 모이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저녁기도회가 사라지다가 한 때는 사경회(Bijbellezingen)로 모이기도 하였다. 한편 결혼식은 교회의 일이지만(70조), 장례식은 교회의 공식적인 예배로 드리는 것을 금지하였다(65조).
넷째, 기타 특별한 순서로는 세례(56-60조)가 있다. 성인 뿐 아니라 유아 세례 시에 목사는 이를 위해 채택된 예식서를 사용해야 한다(58). 성찬은 가능하면 2개월 마다 한 번씩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특별히 부활절과 오순절과 성탄절에 시행할 경우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63조). 또 신앙고백과 이와 더불어 경건한 행실에 대한 증거가 있는 자에게(다른 교회에서 온 자라 할지라도) 성찬을 허락할 것을 말하였다(61조).
다섯째, 증명서(attestation-이명증)을 강조하였다. 82조는 교인이 다른 교회로 옮길 때 당회의 조언으로 그들의 행실에 대한 증명서를 교회직인과 함께 주어야 하는데, 직인이 없을 경우 두 사람이 날인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섯째, 교회의 직분자 뿐 아니라 학교 교사들의 서명을 강조하였다(54조). 1586년 교회질서처럼 돌트 총회는 무엇보다도 돌트신경 작성의 배경이 되는 항의파(Remonstrant)의 오류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가장 분명한 조처를 찾았다. 그래서 바른 교훈들을 지키기 위해 목사와 신학교 교수 뿐 아니라 국내 공립 및 사립 중고등학교(라틴어 문법학교)의 교사들도 신앙고백서(네덜란드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 돌트신경)와 교회질서에 서명을 하도록 하였다. 총회는 누구보다도 청소년들이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으로 교육 받아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 이는 목사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문답교육과 가정에서 부모가 가르치는 교훈 외에 학교에서 교사들도 여기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점에서 학교와 가정과 교회가 함께 같은 임무를 맡았고 서로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서약하였다: “우리 교장들과 교사들은 주님 앞에서 선한 양심으로 정직하게 우리의 서명과 함께 다음을 서약합니다. 즉 우리는 네덜란드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에 있는 모든 조항과 모든 부분들과, 또 1619년 돌트 총회가 결정한 모든 교회질서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느끼고 믿습니다. 또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으며 청소년들에게 우리 직업과 우리의 지식을 따라서 점차 주입시킬 것이며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경우 면직이 되는 처벌을 받을 것을 약속합니다.”
7) 권징
첫째, 71조는 기독교 권징은 순전히 영적이며, 어떤 사람도 국가의 재판이나 형벌에서 자유 할 수 없고 교회적인 권징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는 범죄한 자가 교회와 그의 이웃과 화해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로부터 그 죄가 제거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둘째, 드러나지 않은 죄와 드러난 죄를 구별하고 있다. 72-74조는 드러나지 않은 죄를 말하고 있는데, 만약 범죄한 사람이 개인적인 형제의 권면이나 혹은 한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의 권면이 있은 후에 회개를 보일 경우 그 드러나지 않은 죄는 당회에 보고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마태복음 18장을 따라서 드러나지 않은 죄에 대해서 권면을 받고도 이 권면을 따르지 않거나 혹은 드러난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 이는 당회에 보고되어야 한다(74조). 75조는 드러난 죄를 지은 자는 당회의 조언을 따라 화해가 공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76조는 당회의 권면을 거절하거나 혹은 드러나거나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을 주의 상에 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 직분자에 대한 권징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79-81조). 특히 43조는 치리회가 마칠 때 불손하게 행동한 자에게 징계를 하도록 하였고, 81조는 평소에 당회에서 직분자들이 서로 형제의 사랑으로 각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상호 권면하는 권징을 하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직분자가 먼저 권징에 모범을 보이지 않을 경우 교인에 대한 권징을 정당하게 시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8) 이제 종합적으로 돌트교회질서의 중요한 특징을 몇 가지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각 조항들이 여자적으로 성경에서 직접 인용된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그 토대였으며 또 신앙고백에 기반을 둔 교회질서라 할 수 있다. Van Harten-Tip은 최근 논문에서 돌트교회질서의 각 조항이 어떻게 네덜란드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과 또 돌트신경과 연결되는지를 연구하였다. 이 연구에 따르면 86조항 중에서 어느 한 조항도 이것들과 연결되지 않는 조항이 없다.26) 다만, 집사의 지위에 대해 네덜란드신앙고백서는 치리회 회원으로 고백하지만(제30조),27) 돌트교회질서는 칼빈과 제네바 교회의 노선을 따라 그리고 당시 집사의 일이 정부의 일과 혼동된 역사적인 배경에서 집사를 당회에서 배제하였다(제37조). 물론 치리회의 규모가 작을 경우에는 집사가 당회에 참석할 수 있는 예외조항이 있고, 집사회에 목사가 참석하도록 하여 당회와의 연결을 놓치지 않은 점은 있다. 그럼에도 적어도 집사의 지위를 두고 양 자 사이에 약간의 모순이 보인다,
둘째, 반(反)교권주의의 성향이 뚜렷하다. 그래서 지역교회의 독립을 강조하고 있다. 지역교회는 그 자체로 장로의 회에 다스림을 받는 온전한 교회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되시며 어떤 직분도 다른 직분 위에,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 위에, 어떤 치리회도 다른 치리회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셋째, 그럼에도 돌트교회질서는 교회들의 연대를 무시하지 않으며 장로회의 정치원리를 존중하여 지역교회에서 할 수 없는 것을 시찰회와 노회, 총회와 같은 치리회가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점에서 돌트교회질서는 교회들의 연대를 중시하지 않는 회중주의와 달리 반(反)회중주의의 특징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성경의 정신을 따라 정부를 하나님의 사자로 보고, 교회와 관련하여 정부에 특정한 지위와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럼에도 정부가 교회 사안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한 당시 항론파들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4. 돌트교회질서와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1645년)28)
지금까지 돌트교회질서의 배경과 내용을 살폈다. 이제 이를 우리 한국장로교회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1645년)와 비교해보자.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년)는 무려 5년 7개월에 걸쳐 1163회를 모인 회의였다. 처음에는 목사가 121명, 상원의원이 10명, 하원의원이 20명으로 총 151명이었으나 첫 모임을 끝낸 한 달 후인 8월 17일에 믿음의 통일을 위해 스코틀랜드와 맺은 ‘엄숙한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으로 인하여 스코틀랜드 목사 5명(알렉산더 헨더슨, 로버트 베일리, 사무엘 루더포드, 조지 길레스피, 로버트 더글라스)과 장로 3명이 파송되므로 회원이 159명으로 늘어났다. 웨스트민스터총회는 법률적으로 잉글랜드 의회에 종속된 회의였다. 총회의 소집과 해산 뿐 아니라 총회의 구성과 회의 진행 등 모든 면에서 의회가 결정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잉글랜드 교회가 국가에 종속된 국교회였고 왕과 의회의 지배아래 있었기에 총회는 단지 의회에 조언을 해주는 기구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총회와 달리 웨스트민스터총회는 잉글랜드 의회에 의해 소집된 종교회의였다. 바로 이 총회에서 장로회 교회정치형태가 마련되었다. 당시 총회에는 감독주의자 회중주의자 등도 있었으나 마침내 장로회 정치형태가 확정 되었다. 물론 총회의 구성원이 다양하였기 때문에 교회정치를 확정하기까지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는 다음과 같은 항목을 다루고 있다: 첫째,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즉 하나의 보편적인 가시 교회가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에 신약의 직분과 말씀과 규례를 주셔서 재림까지 교회를 모으고 온전케 하셨다. 둘째는 통상적이고 영구한 네 직분을 말하였다: 목사, 교사와 장로와 집사이다. 셋째, 개 교회의 규례를 말하였다. 즉 개 교회의 규례는 기도, 감사, 시편찬송, 성경봉독, 말씀의 해설과 적용, 교리문답교육, 성례의 시행, 가난한 자를 위한 연보, 축복하며 회중을 해산하는 것 등이다. 넷째, 교회정치와 그 일을 위한 여러 회집에 관하여 말하였다. 즉 당회, 노회, 대회(지역적, 국가적, 공교회적 등의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다)의 순서로 열거하였다. 다섯째, 목사의 임직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임직의 교리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정당한 소명이 없이는 아무도 말씀의 사역자 직분을 스스로 취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임직은 교회 안에서 항상 계속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임직의 권한은 노회에 있다고 하였고, 임직의 규칙과 시취의 규칙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돌트교회질서를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와 비교할 때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차이점을 지적할 수 있다.29)
첫째, 보편적 교회와 개교회의 관계 설명에서 양자의 차이를 우선 볼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는 교회를 가리켜서 “하나의 보편적인 가시적 교회가 있으며, 신약에서 그렇게 제시하고 있다”고 하고 나서 이어서 “보편적인 교회의 지체들인 가시적인 개교회들이 또한 신약에 제시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돌트교회질서는 지역교회에서 시작하여 단계별로 노회와 총회와의 관계를 제시하였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를 따르는 교회는 개혁주의교회들보다 약간 더 교권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도 당회와 노회와 대회의 순서로 열거하고 있기는 하다. 이 양자의 차이는 영국의 경우 위에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이 주어진데서 찾을 수 있다. 즉 영국교회는 종교개혁이 총회 차원에서 먼저 시작되고 나중에 지역교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둘째,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는 직분과 치리회를 중심으로 규정하면서 돌트교회질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교리와 성례에 대한 규정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목사의 시취와 임직에 관해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시취과정에서 후보생은 “섬길 교회로 파송될 것이고, 거기에서 세 날에 설교하고 교인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교인들을 세우기 위한 그의 은사를 시험하고 그의 삶과 행실에 대해 묻고 더 잘 알게 되는 시간과 기회를 가질 것이다”고 함으로써 후보생의 개인적인 은사가 섬길 교회에 적합해야 하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는 아마도 총회에서 장로회주의자들과 회중주의자들이 함께 교회구조와 질서를 찾는 중에 타협한 점으로 보인다.
셋째,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는 목사의 경우 “주께서는 말씀의 사역에 있어서 각종 은사들을 주셨고 이 은사들에 따라서 다양한 사역들이 있게 하셨다. 비록 이 다양한 은사들이 동일한 한 사역자에게 주어져서 행사되지만, 그러나 한 교회에 여러 목사들이 있는 경우에는 각각이 가장 뛰어난 다양한 은사에 따라서 몇몇 직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보다 성경의 주해와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는 일 그리고 거슬러 말하는 자를 설득시키는 일에 있어서 뛰어난 자가 그 은사에 따라 그러한 지위에 있을 때 그를 교사 혹은 박사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점은 돌트교회질서 17조에서 목사 간의 동등성에 대해 말한 조항과 비교할 수 있다. 목사 간의 동등성이란 여러 목사가 한 지역교회에 있을 때 목사들이 공평하게 직무를 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모든 목사가 설교와 교리문답, 심방을 모두 골고루 돌아가면서 공평하게 직무를 수행하도록 한 것을 말한다.
넷째, 돌트교회질서가 다루고 있지만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에서 다루지 않는 예배와 성례는 웨스트민스터예배지침에서 다루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이와 같이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가 돌트교회질서와 약간 상이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나타난 교회질서의 중요한 원리는 두 곳에서 충분히 볼 수 있다.
첫째,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의 조항을 보면 각각 성경의 증거를 제시함으로 성경에서 교회법이 출발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과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가 결국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30장(교회권징), 31장(대회와 공의회)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할 때 비록 돌트교교회질서의 조항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는 할지라도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 역시 성경과 신조에서 비롯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째,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 역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요 왕으로 고백하는 기독론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정권을 세우시고 교회적인 치리자를 두셨으며, 그 목적을 위하여 사도들은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손으로부터 열쇠를 받았고, 그것을 세계의 모든 교회들 안에서 모든 경우에 사용하고 행사하였다.”
셋째, 직분의 필연과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교회건설에서 이들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가 교회에서 어떤 사람에게 다스리는 은사를 주시고 그 일로 부르심을 받아 직분자로 봉사할 때 천국열쇠를 사용하도록 하셨고.” 특히 목사의 시취와 임직을 통해 교회건설에서 목사의 생활과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넷째, 치리회와 그 권세를 규정하였고, 또 이러한 치리회의 권세는 곧 천국열쇠를 사용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교회의 거룩과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거룩한 고백을 지키게 함으로써 교회건설에서 권징의 중요성과 치리회의 권세를 드러내었다.
5. 나오며: 돌트교회질서가 한국교회에 주는 의의
한국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에서 비롯되어 미국장로교회를 거쳐 시대상황에 의해, 그리고 교단의 형편에 따라 개정된 교회정치를 가지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돌트교회질서에 비추어 한국장로교회의 교회정치 뿐만 아니라 교회들이 직면한 교회정치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을지를 다루고자 한다.
첫째, 베이젤 법령에서부터 돌트교회질서에 이르기까지 온갖 좋지 못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교회질서를 작성하기 위해 분투한 그들의 믿음에서 우선 본받을 점이 있다. 그들이 동일한 교회질서를 가지려고 한 것은 오로지 이를 통해 하나의 공교회,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을 고백하며 교회들 간의 진정한 연합을 추구하고 동일한 교회생활을 하려는 것에 있었다. 이는 오늘날 개교회주의에 빠져 있고, 또 교회정치의 조항들과 총회의 결정을 예사로 경시하는 우리 교회들이 직면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과연 우리는 하나의 질서와 동일한 교회생활을 통해 진정한 교회연합을 추구하고 있는가?
둘째, 돌트교회질서는 무엇보다도 온갖 형태의 교권주의를 경계하였다. 한 교회가 다른 교회 위에 군림하는 것 뿐 아니라, 한 목사가 다른 목사 위에 군림하고 한 장로가 다른 장로 위에 군림하는 것을 경계하였다(84조). 또 17조는 직분의 동등성을 고백하였다. 그래서 시찰회나 치리회에서 의장의 직무를 차례대로 하도록 할 뿐 아니라 연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그 모임이 마치면 그 의장의 직무도 함께 마치도록 하였다. 목사의 독주는 물론 당회의 독주도 경계하였고, 특정한 한 사람이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대단히 우려하였다. 그런데 우리 교회정치현실을 보면 교권주의가 여러 형태로 교묘하게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은 각각 당회 노회 총회의 의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어느새 그 치리회를 대표하는 자가 되어 버렸고, 치리회가 마친 뒤에도 그 지위를 이용하여 교회들 위에 군림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었다. 비록 우리가 교황이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실제로는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몰려 있다면 이미 우리는 감독정치체제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국이 이러하다보니 노회장 총회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얼마나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며 혈안이 되어 있는지!
셋째,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돌트교회질서는 어떤 형태의 교권주의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 중에 하나는 장로와 집사의 시무를 종신으로 하지 않고 임기제로 한 것이었다(27조). 장로와 집사의 직무는 목사의 직무와 다른 것이기에 이와 다른 기준을 정하였다. 이는 이미 개혁가 칼빈이 제네바에서 도입한 것인데, 칼빈은 이를 통해 무엇보다 온갖 독재가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교권주의를 예방하며, 임기제를 시행하므로 회중의 영향을 보다 더 강화시키려고 하였고 가능하면 교회 안에서 다양한 은사와 재능들이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27조는 장로와 집사의 임기를 2년으로 하고 매년 1/2의 수를 교체하였다. 오늘날 장로의 시무를 만70세까지 보장하므로 교회에 미치는 유익도 적지 않지만, 그에 못지않게 폐해도 상당히 크다. 칼빈이 우려한 대로 장로들의 군림과 독재가 곳곳에서 보이고, 많은 교회에서 회중의 영향력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교회 안에서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활동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넷째, 6, 7조를 보면 목사는 반드시 지역교회에 매여야 하며, 어떤 직분이든 지역교회 회중과 결코 분리할 수 없다고 하였다. 병원이나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직무를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군목, 선교사 등) 지역교회에 소속하여 그 지역교회로부터 임무와 파송을 받아서 그 일을 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소명을 그 지역교회에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그런데 한국장로교회의 현실은 이 원리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군목과 선교사는 논외로 하더라도 기관목사라는 이름으로 지역교회에 속하지 않은 목사들이 많이 있고, 더구나 목사라는 직함만 가지고 있을 뿐 지역교회의 회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임목사도 허다하다. 지역교회의 회중과 관련 없이 장로와 집사 행세를 하는 자들도 볼 수 있다. 직분은 오직 지역교회 안에서 지역교회를 위한 것이며, 직분과 지역교회는 결코 분리할 수 없다. 돌트교회질서는 이러한 바른 교회질서를 일찍이 우리에게 가르쳤다.
다섯째, 13조는 목사가 질병이나 나이로 인해 은퇴할 경우 이후 이들 가족에 대한 부양을 말하고 있다. 목사는 평생 동안 말씀의 봉사를 위해 시간과 은사를 자기 인격을 헌신한 직무이기에 연령 뿐 아니라 부득이하게 질병으로 도중에 그 직무를 행할 수 없어서 은퇴한다고 할지라도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도록 할 뿐 아니라 그와 그 가족을 부양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목사가 사망할 시에도 그 가족을 부양하도록 하였다. 돌트교회질서는 은퇴목사와 그 가족, 사망한 목사의 가족 부양을 구제 차원에서 말하지 않고, 교회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와 법의 문제로 말하고 있다. 이 조항의 원리는 성경 디모데전서 5:18과 고린도전서 9:4에서 나왔다.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떤가? 어떤 이유로든 목사와 지역교회 회중과의 관계가 좋지 못하여 은퇴목사의 경제적인 부양을 두고 어려움을 겪는 교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이 문제로 곤란을 겪는 교회들도 많이 있다. 이 문제는 노회와 총회에서 법과 제도를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인다.
여섯째, 3조는 모든 직분이 반드시 합법적인 소명(부르심)을 통해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성경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이 원리에 의해 직분을 취하였고 히브리서 5장 4절에서는 아론 역시 스스로 존귀를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신앙고백서 31조도 “허용되지 않은 방법으로 취임하는 것을 적절하게 감시해야 하며, 또 자기의 부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이를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소명은 내적인 소명에서 더 나아가 외적 소명을 말하고 있다. 이 외적 소명은 무엇보다도 회중을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되므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조항은 회중의 선출을 통한 합법적인 소명과 무관하게 스스로 직분을 취하는 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장로교회의 교회정치에서 모든 직분이 회중을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를 하나님의 소명과 관련시키고 있지는 않다. 회중의 합법적인 선출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는다는 것은 직분자가 자기의 직무를 통해 교회를 봉사할 때는 물론이고 교인이 직분자를 대하는 자세에서도 가져야 할 중요한 원리이다. 오늘날 직분자의 봉사를 둘러싸고 하나님의 소명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교회를 해치는 심각한 세속화라고 할 수 있다. 교인의 대표라고만 생각하면 회중의 선출을 통해 부르신 주님과 주님의 집에 결코 신실하게 충성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 돌트교회질서는 전체 86조 중에서 71조에서 81조까지 11조항에 걸쳐 권징을 다루고 있다. 그만큼 권징이 교회질서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네덜란드신앙고백서 29조 역시 참 교회의 표지로서 정당하게 권징을 시행하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물론 한국장로교회는 미국장로교회의 영향으로 교회정치와 별도로 상당한 페이지를 가진 권징조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만 놓고 보면 한국장로교회는 교회가 가져야 할 어떤 표지보다도 권징을 중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한국장로교회가 권징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권징의 원리 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처럼 율법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 교회 법 조항을 세상 법 조항처럼 생각하고 있다. 법 조항을 상세하게 많이 만들면 법을 잘 지키고 권징을 잘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마치 법을 위해 법이 있고 질서를 위한 질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교회질서는 본래 성경에 입각해서 중요한 원리만을 제시하고 치리회는 성경의 원리를 잘 드러내기 위해 응용하면 될 것이다. 한국장로교회가 그렇게 두꺼운 권징조례를 갖고 있어도 돌트교회질서 43조와 81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치리회와 당회에서 직분자들이 상호 간에 가져야 할 권징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43조와 81조는 각 치리회에서 마칠 때에 해당 치리회가 모이는 동안 질서를 지키지 못한 자를 징계하도록 하였고, 당회는 평소에 목사 장로 집사가 형제와 같은 심정으로 각자 직분의 직무를 잘 완수하기 위해 서로를 권면하며 서로를 징계하도록 하였다. 권징을 책임 진 치리회가 먼저 이 권징에서 모범을 보이도록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72-74조는 아직 회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죄에 대한 권징에 대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고 있는 과정을 따라서 차례대로 서술하고 있다. 즉 성경의 교훈을 거스르거나 경건한 행실에서 벗어난 자가 있으면 당회에 가져오기 전에 먼저 한 사람이 혹은 두 세 사람이 회개를 촉구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이것 역시 성경에서 말하는 중요한 권징의 원리이다. 두 세 사람의 회개 촉구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 그때 그 사람의 죄를 비로소 당회에 말하라고 있다(74조), 오늘날 두꺼운 권징조례를 가지고 있고 자세하게 권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성경 특히 마태복음 18장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치리회에 말하기 앞서 교인들이 사랑의 교제를 통해 먼저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구하는 이 권징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한국장로교회에는 무수한 법조항은 있지만 교인들 사이에 있어야 할 권징의 교제과 직분자 사이에 있을 권징의 교제를 통해 참다운 성도의 교제는 실종되고 없고 복음은 사라지고 없는, 바리새인들의 교회가 되고 있지 않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여덟째, 44조는 교회시찰을 규정하고 있다. 교회시찰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원리이고(사도행전 9:32, 15:41) 개혁가들과 그들의 교회들이 신실하게 수행한 것이었다. 교회시찰을 위해 있는 것이 바로 ‘시찰’회이다. 시찰회는 연륜이 있고 경험이 있는 목사 2인 이상으로 구성하여 매년마다 1회씩 교회를 시찰하여 목사를 포함하여 모든 직분자들이 자기의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지, 그래서 온 회중이 바른 교훈 가운데 머물러 있고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질서 있게 되어 가면서 교회가 잘 세워지고 있는지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한국장로교회 역시 교회정치를 보면 시찰회가 있고 시찰회의 중요한 직무인 시찰에 대해 규정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매년 1회씩 온 교회를 시찰하도록 법을 통해 규정을 시키지 못하였고, 과거에 교회정치의 부록으로 첨부된 ‘교회 시찰 시 사용할 문답’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그러다보니 교회들 간에 동일한 교회질서를 따름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연합은 먼 현실이 되고 어느 새 개교회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실정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상당수의 시찰회는 한낱 노회에 제출하는 행정서류를 경유하여 처리하는 정류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성도의 바른 교훈과 바른 행실을 감독하는 당회, 각 교회가 바른 교훈 가운데 있고 올바른 질서 가운데 있도록 감독하는 시찰회로 회복되어야 한다.
아홉째, 68조는 목사가 주일 오후에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을 차례대로 설교하거나 가르치도록 하였다. 교리문답은 성경의 교리(교훈)를 요약한 것이기에 순서대로 설교를 해서 연말에 다 마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돌트교회질서가 교리문답을 중시했다는 것을 말한다. 돌트 총회 시에 정죄 받은 항의파들은 교리문답을 성경과 나란히 할 수 없는 ‘사람의 책’으로 불렀다. 한국교회는 지난 짧은 역사에서 이단과 사이비 등 잘못된 교훈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배경에서 돌트교회질서가 교리문답설교를 매 주일마다 설교하거나 가르치도록 한 것에서 배울 점이 많다.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고 교회가 믿음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동일한 교훈과 동일한 예배와 동일한 교회질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열 째, 돌트교회질서는 총 86조항에 불과하여 매우 간단하지만 교회질서, 예배와 권징 모두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원리만을 제시하고 상세한 적용은 지역교회의 치리회와 직분자의 판단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장로교회는 헌법(관리표준)이라는 이름으로 예배지침과 교회정치, 권징조례가 각각 있고, 게다가 헌법적 규칙도 있을 뿐 아니라 각 조항 수를 보면 엄청나다. 예장고신의 경우 예배지침은 41조항, 교회정치는 183조항, 권징조례는 178조항을 가지고 있다. 조항을 많이 늘여 상세하게 적용하여 모든 분야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면 교회생활에 문제의 소지가 전혀 없을 것 같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이로 인하여 성경의 원리를 떠날 경향이 농후하고, 일단 성경의 원리를 떠나면 그렇게 상세하게 보여서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법조항의 촘촘한 그물도 여유 있게 피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노력할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직원을 선출할 때 돌트교회질서가 말하는 것처럼 합법적인 소명 등의 중요한 원리는 제시하지 않고, 직원선출지침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규정한 우리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본래는 투표를 한 차례만 하도록 하였으나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1차 투표결과가 산표로 인하여 당선자 선출이 어려울 경우가 많아서 2차 투표를 허용하여 투표 시에 득표 순으로 적당한 인원의 후보자를 선정하여 투표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2차 투표 시에 찬반으로 투표할 수 없다고 적시하였다. 이렇게 한 것은 직원선출이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합법적인 소명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정 상 2차 투표는 허용하지만, 찬반 투표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디. 그런데 최근 몇몇 교회들이 직원선출에서 성경적인 원리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다보니 기발한 생각으로 2차 투표 때에 찬반을 금했지만 1차 투표 시에는 찬반투표가 허용된 것으로 간주하고 시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경의 원리를 떠나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부패한 우리는 복잡한 법 조항의 그물을 피해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할 것이다. 따라서 이후 헌법개정이 이루질 경우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조항을 늘여서 무조건 상세하게 규정하는 것보다 각 조항마다 성경의 원리와 또 이에 부합하는 바른 교리를 적시하고 이를 부각시키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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