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트 신경과 그 역사적 배경1)
글: 카린 막 (Dr. Karin Maag)2)
번역: 김재한 (칼빈신학교 박사과정)
비록 도르트 신경은 CRC (Christian Reformed Church) 교단의 세 가지 핵심 고백 문서 중 하나지만,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왜 이 문서가 작성되었고 어떻게 그것이 개혁파 전통, 특히 네덜란드에 뿌리를 두고 있던 교회들에 규범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기껏해야 흐릿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신경이 왜 그렇게 중요한 문서가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의 네덜란드 정치, 종교적 상황을 다시 한 번 떠올릴 필요가 있다. 도르트 신경은 400년 전인 1618-19년에 열린 도르트 회의 대표자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도르트 신경을 탄생시키게 된 갈등의 뿌리를 보기 위해서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6세기의 마지막 사 반세기 동안 네덜란드 공화국(오늘날의 네덜란드)을 이루고 있던 7개의 지방은 어떤 중요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1579년 이 7개의 지방은 함께 모여서 로마가톨릭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스페인의 압력에 대항하여 군사적으로 자신들을 보호할 것을 엄숙하게 결의하였다(the Union of Utrecht, 우트레히트 연합). 1581년 이 7개 지방은 스페인의 필립 2세를 자신들의 군주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폐위시켰다. 그런 후에 오렌지 공 윌리엄의 지도력 아래 느슨한 형태의 동맹을 맺고 함께 그들의 과제들을 처리해 나갔는데 1584년 윌리엄이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나소의 마우리스(Maurice of Nassau)와 네덜란드 의회 지도자였던 요한 반 올덴바네벨트(Johan van Oldenbarnevelt)는 비록 비공식적인 형태였지만 권력을 서로 나눠 가진 채로 네덜란드를 이끌게 되었다. 나소의 마우리스가 주로 군사력 부분에서 지도력을 발휘했다면, 반 올덴바네벨트는 매일 매일의 정치 업무에 집중했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잘 유지되던 관계는 젊은 마우리스가 반 올덴바네벨트에게 점점 더 많이 화를 냄으로써 깨어졌는데, 그는 늙은 올덴바네벨트가 네덜란드 공화국의 최대의 적이었던 스페인과 연장된 휴전 협정을 맺으려고 한다는 의심을 하였다. 이런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만 같던 둘 사이의 긴장은 그 당시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 안에 있었던 두 당파 사이의 점점 신랄해져만 갔던 논쟁과 얽힘으로써 더욱 악화되어 갔다.
스페인에 반기를 든 네덜란드는 비록 로마 가톨릭주의와 결별하고 칼빈주의를 네덜란드 공화국의 공식적인 신앙으로 삼았지만, 이런 결정이 공화국 내의 종교적인 문제들을 다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급격히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신학적이고 교회적인 갈등의 뿌리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교회에 대한 시각이 놓여 있었다. 정통파 혹은 강경파 칼빈주의자들에게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명확했다: 보이는 교회는 모든 사람(마태복음 13장에 나온 예수님의 비유에서처럼 알곡과 가라지 모두를)을 포함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분 자신의 것인 택함 받은 자들을 알고 계셨는데, 이는 그들의 위대한 믿음이나 경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정통파 칼빈주의자들은 개혁 도시 제네바의 본을 따라서 네덜란드 사회도 자신들의 비전인 보다 잘 훈련되고 경건한 신앙을 가진 공동체로 변화되기 원했다. 따라서 이들은 목사와 장로들에 의해 시행되는 교회 치리(권징)의 합법성을 열렬하게 주장했다. 그들은 시민 권력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결정들을 지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또한 목사나 장로, 혹은 학교 교사를 선출하는 문제들과 같은 교회 일들에 정부가 간섭하는 것을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이 그룹에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여러 목사와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레이든 대학과 흐로닝언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프란시스 고마루스 (Franciscus Gomarus)와 프레네커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시브란두스 루베르투스 (Sibbrandus Lubbertus)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대로, 온건파 혹은 자유주의 칼빈주의자들은 동일한 문제에 대해 전혀 다른 견해를 주장했다. 그들은 목사, 장로, 학교 교사를 임명할 수 있는 시민 권력의 권리를 광범위하게 지지하였는데, 특히 정부가 목사와 교사의 월급을 지불한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그들은 공적인 종교적 관용 정책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고, 교회는 정부의 개입과 감독 없이 치리를 독립적으로 시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신학적으로 볼 때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제안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고 구원받은 이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 제안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확실하게 응답한 이들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의 지자자들로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여러 목사와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이로는 1603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609년까지 레이든 대학에서 신학 교수를 역임했던 야곱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가 있었다. 그의 사후 그의 지지자들은 1610년에 ‘항론’(the Remonstrance)이라고 알려진 한 문서를 출간했는데, 이는 자신들의 사상을 다섯 가지 주요 요점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이 무리들은 따라서 그 문서의 제목에서 그 별칭(항론파)을 얻게 되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들의 반대파들은 반-항론 (the Counter-Remonstrance)이라고 알려진 문서를 1611년에 출간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은 또한 나소의 마우리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는 것인데, 마우리스는 네덜란드 개혁 교회 안에서 온건파를 지지하고 있던 반 올렌바네벨트를 견제하기 위해서 신학적으로는 전통주의자들이었던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따라서 17세기의 첫 20년 동안 네덜란드 공화국의 개혁파 공동체 내부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1618년 8월, 반 올렌바네벨트가 표면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은 네덜란드 개혁 교회 안의 온건파를 보호하기 위해서 네덜란드의 한 지방의 도시를 군사로 무장시키자, 마우리스는 그를 반역죄로 체포했다. 한편, 네덜란드 개혁 교회 안에 있던 강경파들은 교리적이고 교회적인 갈등을 끝낼 유일한 길은 총회를 소집하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과 정부는 이 총회의 결정에 더 큰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 유럽 전역에 걸쳐 있는 다른 개혁파 교회들에서 많은 수의 대표단들을 초청함으로써 국제적인 총회를 열기로 했다.
도르트 총회는 1618년 11월에 거의 백 명에 가까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었는데 여기에는 제네바, 영국, 스코틀랜드, 그리고 독일 지방에서 온 대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표단들 사이의 모국어 분포를 고려하여 각 회의는 교육받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공용어, 즉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네 명의 프랑스 위그노 대표단도 초대를 받았지만 참석은 하지 못했는데 이는 프랑스 왕 루이 8세가 이들의 참석을 불허했기 때문이었다. 대표단들은 교회 안에 있는 여러 문제, 즉, 성경을 원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서 네덜란드어로 번역하는 일을 위임하는 문제 (the Statenvertaling, 첫 네덜란드 원어 번역 성경), 교회 질서 개정, 교리 교육 점검과 목회자 훈련 점검 등에 대해 의견을 진술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된 초점은 선택 교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항론파의 입장을 대변할 13명의 목사와 교수들이 총회 모임에 참석하도록 소환되었다. 이 무리는 그 수에 있어서 전통적인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에 비해 매우 적었다. 그러나 이미 일의 처음부터 양측은 이 총회 자체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참석하고 있었다. 항론파들은 그들이 그 문제에 있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협의회 내지는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파들은 항론파가 동료들 앞에서 자신들의 신학적 견해를 시험받고 있다고 믿었다. 반-항론파 진영의 숫자가 가진 의미를 고려해볼 때 이는 의심의 여자가 없었다. 1619년 1월 항론파 대표단은 총회에서 쫓겨났고, 1619년 5월 6일 이들의 반대파(전통주의자들)는 이중 예정과 선택에 대한 항론파의 견해를 반박하고 반-항론파 입장을 지지하기 위한 도르트 신경을 작성하고 수정했다. 총회에 참석한 국제 대표단들은 도르트 신경이 개혁파 신학을 참되게 진술하고 있다는 데 투표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공화국을 제외하고 이 신경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유일한 교회는 이 총회에 대표단이 참석조차 하지 않았던 프랑스의 위그노 교회뿐이었다.
도르트 총회에서 강경파들이 승리했다는 사실은 나소의 마우리스와 그의 동료들이 반 올렌바네벨트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해 승리했음을 의미했다. 1619년 5월 반 올덴바네벨트는 공개 재판 이후에 공개적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그의 편에 속했던 다른 이들은 투옥 혹은 추방형을 받았다. 반면 네덜란드 공화국 교회들은 재빨리 신경을 사용함으로써 칼빈주의적 정통주의가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강화되도록 했다. 모든 목사, 교수, 그리고 학교 교사들은 그 신경의 가르침을 지지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문서에 서명해야 했다. 이를 거절한 이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결국 200명의 목사가 해임되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또한 네덜란드 공화국의 영토에서 추방되었다가 1625년 마우리스가 죽은 이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도르트 신경의 역사적인 배경을 아는 것은 오늘날 교회 회원들이 이 신경의 지속적인 가치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먼저, 어떤 신학적인 논쟁도 진공 상태에서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도르트 신경은 예정과 선택 교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를 놓고 네덜란드 공화국 기독교 내부에서 벌어졌던 매우 구체적인 갈등에 대한 응답으로 써졌다. 이러한 배경을 머릿속에 기억하는 것은 현대 기독교인들이 이 문서의 매우 논쟁적인 어조를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둘째, 17세기에 있었던 논쟁의 핵심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도 여전한 울림을 주는 주제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제안에 대해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하는 과정 중에서 우리의 응답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만약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면, 하나님도 우리에게서 멀어지시는가? 도르트 신경은 이러한 큰 주제들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그것들을 함께 다루고 있는 풍성하고 지속적인 자원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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