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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신사도개혁운동 3

신사도운동

by 김경호 진실 2020. 1. 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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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는 많은 신학적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신사도운동이다. 이에 대해 개혁주의 관점에서 이 사상을 비평하는 것은 교회의 신앙과 신학에 매우 유익한 것으로 보아진다. 이 논문은 2014년 개혁신학회 봄 학술대회에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양현표 박사가 발표한 논문으로 요약 소개한다.

 

 

4. 신사도개혁운동의 주장에 대한 개혁주의의 비판

지금까지 신사도개혁운동이 주장하는 주요 주장들을 살펴보았다. 사실 이들의 모든 주장은 개혁주의에서는 받아들일 수 허무맹랑한 이야기이다.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풀이한 결과이다. 신사도개혁운동은 그들의 모든 주장을 펼칠 때 진리의 원천인 성경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그들이 경험하고 관찰한 현상으로부터 그들의 논거를 시작한다. 성경은 단지 그들의 그 현상을 추인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 사용하는 대부분의 성경 구절들(엡4:11-13; 엡2:20; 고전12:28; 마6:9-13; 행3:21; 고전15:24-25; 롬8:19; 단10:13,20)은 그들의 경험과 관찰된 현상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렇기에 성경 해석과 적용이 바르지 않고 단편적이다.

필자는 제한된 여건상 신사도개혁운동의 모든 주장을 비판하려고 하지 않는다. 필자는 그들의 주장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며, 신사도개혁 운동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 할 수 있는 한 가지, 이것만 무너지면 신사도개혁운동의 신학적 사상적 구조 전체가 무너지는 그 한 가지, 즉 “사도직과 사도은사의 복원”에 관해서만 비판하려고 한다. 이 일을 함에 있어서 필자는 세 가지 방향에서 접근하려고 한다. 첫째는 성경에 나타난 사도의 자격을 규명하는 관점에서, 둘째는 사도와 관련된 본문 해석학적 관점에서, 마지막으로 성경의 속성과 관련된 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한다.

 

1) 성경에 기록된 사도의 자격과 용례

“사도”(“Apostolos”)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내보내다”라는 의미의 “apostello”로부터 비롯되었다. 키텔(Gerhard Kittle)은 말하기를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권위를 갖고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라는 신학적 토대 위에서 사용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apostolos”라는 단어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의 권위와 함께 보냄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사도직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전파할 권세를 주어 12명의 제자들을 파송했을 때 처음 시작되었다. 즉, 사도직은 12명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라는 호칭이 반드시 12명의 제자들에게만 적용된 것은 아니다. 이 호칭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성경을 보면, “사도”라는 호칭이 적어도 네 가지 용례가 나타나 있다.

첫째로, 이 호칭은 예수님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히3:1,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요17:3, “그가 보내신바 예수 그리스도”). 이러한 용례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보내신 분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심을 받은 자로 묘사하기 위해서이다.

“사도”라는 단어의 두 번째 용례는 12명의 제자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사도”라는 호칭은 이 경우에 해당된다. 이들은 예수님에 의해 선택되었고, 예수님에 의해 개인적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예수님에 의해 보냄을 받아 신약교회가 세워지는 기반이 되었다.

“사도”라는 단어의 세 번째 용례는 바울에게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자이다(고전15:8).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딤후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이방 세계로 보냄을 받아 이방 지역의 교회가 세워지는 기반이 되었다(롬1:1: 고전1:1). “사도”라는 호칭의 마지막 용례는 바울 서신서에 나타난다. 12명의 제자들 외에 바울에 의해 사도라고 불린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나바(행14:4,14), 실라와 디모데(살전1:1; 2:6-7),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등이다. 사실 이 마지막 용례가 신사도개혁운동이 주장하는 사도의 지속성의 근거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사도로 호칭된 이들이 누구인가? 과연 이들 역시 12명의 제자와 동등한 권위와 은사를 가진 동일한 반열의 사도로 간주될 수 있는가? 아니다. 이들이 누구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바나바를 보자.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보살피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았다. 그리고 바울과 함께 최초의 선교사로 떠났다. 또한 바나바는 바울이 고후8:32에서 말한 “여러 교회의 사자(‘Apostolos’)들” 중의 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사자들”이 원문에는 “사도”이다. 그러나 여러 번역본에서는 “대표자” “파송자” “사자”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라는 선지자이었다(행15: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그리고 바울의 두 번째 전도 여행의 동행자였다(행15:36-41). 그는 데살로니가서를 바울과 함께 기록했다(살전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편지하노니”; 살전2:6-7, “우리는”). 그는 또한 베드로를 위한 대필자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벧전5;12,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디모데는 바울의 영적 아들이었다. 바울과 동행한 선교사요, 에베소 교회 목회자였다. 바울은 그에게 에베소 교회의 질서를 세우고 장로를 임명할 권한을 주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바나바, 실라, 그리고 디모데의 공통점은 사도 바울의 직접적 감독을 받고 있는 자들이며, 바울의(사도의)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들이란 사실이다. 또한 이들은 초대 교회의 선교와 목회에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한 자들이다. 바울은 분명 그들이 바울 자신의 권위를 위임받아 목회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사도로 언급하였을 것이다.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 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하나는 그들이 사도라는 해석과 다른 하나는 그들이 사도들의 존중을 받았다는 해석이다(롬16:7, 한글 성경,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영어 성경, “They are outstanding among the Apostles”). 따라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의 경우는 해석상의 난제로 인해 사도로 분류되었는지조차도 불분명하다. 필자는 한글 성경의 번역이 보다 타당하다고 본다. 그럴 경우 이들 역시 사도의 인정을 받은, 사도의 직접적 권한을 위임받은 교회의 신실한 일꾼이다.

따라서 사도라고 불린 이 사람들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들은 12명의 사도들과 동일한 반열의 사도라기보다는 사도의 직접적인 관리 하에 사도의 권위를 위임받아 복음을 전하고, 사도의 권위를 위임받아 목회를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역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와그너는 단순히 이러한 사람들이 사도로 불렸다는 이유만으로 사도의 지속성을 주장하지만 이들이 당시의 사도들과 동등한 권위와 능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없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도들은 누구인가? 진정한 사도는 열 두 제자와 바울뿐이다. 진정한 사도가 될 자격 요소가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는 예수님에 의해 직접 지명되어야 하고(마10:1-4; 눅6:12-16), 둘째는 예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해야만 하며(행1:21-22; 고전9:1; 15:7-8), 셋째는 신적인 표적이 따라야 하며(고후12:12, “표적과 기사와 능력”), 넷째로 신적인 권위를 가진 계시를 받아야 하며(유1:17), 마지막으로 신약 교회의 기반(엡2:20)이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다 갖추어야 진정한 사도이다. 그리고 이 모든 조건을 갖춘 자들은 오직 열 두 제자와 바울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사도는 성경 시대에만 존재했을 뿐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고, 또 누군가가 대신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성경 시대의 사도들 외에 어느 누구도 성경에 기록된 사도의 자격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는 여러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는바, 맥아더(John MacAthur)는 참된 사도는 맛디아를 포함한 12명의 제자와 바울뿐이라고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사도직과 사도은사는 특정한 기간에 신약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 주어진 직책과 은사이다. 사도직의 지속성 혹은 복원에 대한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그토록 강하게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사도직이 숫자나 시대의 제한을 받았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 사도와 관련된 성경구절의 잘못된 해석

신사도개혁운동은 고전12:28과 엡4:11을 통해서 사도직의 지속성과 사도은사를 주장한다. 즉, 고전12:28과 엡4:11의 말씀을 성령의 은사로 간주하고, 사도은사가 계속 존재하며, 당연히 그 은사를 소유한 사도들이 현시대 교회에도 존재해야만 한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과연 이 말씀들이 은사를 의미하는 구절들인가?

먼저 고전12:28을 보자.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은사오용에 관한 내용을 전해 듣고 이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한 편지이다. 그 중에 고전 12장은 은사의 바른 사용에 관한 내용이다. 바울은 “몸”이라는 은유를 통해 교회를 설명하는 중에 28절에 이르러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charismata’)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우리말 성경 번역은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기에 한계가 있다. 헬라어 원문의 의미 그대로 번역한 영어성경(KJV)을 보면, 본문의 후반부를 “…then gifts (‘charismata’) of healings, helps, governments, diversities of tongues”로 번역하고 있다.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하는 자까지는 독립된 직책으로 나열되어 있고, 병 고침과 돕는 것과 다스림과 방언은 “은사”라는 단어에 종속되어 있다. 이것이 원문의 정확한 의미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나 능력 행하는 자를 은사로 보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즉 본문의 “사도”는 “사도은사”를 가리키지 않는다.

나아가 본문의 “세우셨으니”의 헬라어 “etheto”는 영어로 “appointed”로 번역되며, 이것은 어떤 장소에 무엇을 위치하게 하거나 아니면 어떤 직책에 누군가를 공식적으로 임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28절 전반부는 직책을 의미하고, 후반부는 영적 은사를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피(Gordon Fee)는 이러한 결론을 지지하고 있다. 그는 “바울이 성령과 사도직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부분은 없다. 바울의 사도직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리스도로부터 받았다. 그는 결코 그의 사도직이 비록 성령께서 선물(‘gift’)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령의 은사(‘charism’)라고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엡 4:11에서도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에베소서 4장의 중심주제는 교회의 통일성(“하나 됨”)이다. 바울은 교회가 하나 되는 조건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이 사실은 4:7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으니”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Charis”)가 교회에 주어짐으로 교회가 하나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바울은 11절에서 밝히고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삼으셨으니”라고 했다. “삼으셨으니”는 원문대로 번역하면 “주었다”(gave)이다.

정리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 여러 직분을 가진 사람을 교회에 선물(gift)로 주셨다고 말한다. 만약 바울이 이곳의 직책을 은사로 여겼다면, 일반적으로 은사를 가리키는 “charismata”라는 단어를 사용했어야만 한다. 이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은 엡4:11이 은사 목록이 아님을 자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겠다. 결론적으로, 엡4:11의 직책들은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즉 하나님은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 말씀의 사역자들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다. 본문의 “사도”가 결코 “사도은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엡4:11과 고전12:28의 “사도”(apostolos)는 “사도은사”로 해석될 수 없다. 사도와 사도은사는 초대교회의 진정한 12사도와 바울에게만 적용되고 그들에게만 주어진 은사이다.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오늘날 성령의 은사로서의 사도은사의 존재를 주장하고, 그 은사의 활용으로 인한 계시와 기사와 이적과 능력을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3) 성경의 권위 부정

사도의 직분이 아직도 존재하고 더불어서 사도은사가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신사도개혁운동은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주장하는 개혁주의와 정면으로 대치된다. 신사도개혁운동은 성경시대에 존재했던 사도직과 사도은사가 복원됨으로 인해 그들을 통해 성경 외의 새로운 계시가 주어지며, 성경 시대 사도들이 행했던 것과 동일하거나 그 이상의 기사와 이적과 표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필요성, 권위성, 명료성, 그리고 충족성을 주장하는 개혁주의 성경관에 맞지 않다.

특별히 현시대 사도들을 통한 추가적인 계시의 가능성과 당연성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충족성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성경 전체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이단적 주장이라 하겠다. 박영돈 교수는 성령은 “성경이 알려주지 않는 것을 계시하지 않는다”라고 단호히 말한다. 개혁주의는 사도직과 사도가 보였던 이적과 기사와 표적은 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의 한시적이었던 직분과 은사로 간주한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는 성경이 사도들을 대신하여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고 믿는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것이 완성된 성경이다.”(계속)

 

 

http://www.reformednews.co.kr/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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