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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사상 개관(2) 2

아브라함 카이퍼

by 김경호 진실 2020. 2. 7.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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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상웅 교수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화란의 칼빈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의 1강연부터 6강연까지의 내용을 분석하고 고찰하였다.

3. 제2강연: 칼빈주의와 종교(Het calvinisme en de religie)

카이퍼는 두번째 강연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종교 영역에서 칼빈주의가 차지하는 두드러진 위치를 설명하고자 한다. 카이퍼는 ‘종교 자체,’ ‘교회 생활,’ ‘실제 생활에서 종교의 열매(도덕)’ 등 세 측면으로 나누어 차례로 답하겠다고 말한다.

3.1 종교

카이퍼에 따르면 종교는 네 가지 문제에 대하여 대답하여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카이퍼의 질문과 답을 차례대로 살펴 보도록 하겠다. 첫째. “종교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아니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가”에 대해 칼빈주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에, 종교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제시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계를 위하여 존재하시는 게 아니라 피조물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둘째. “종교는 직접적으로 작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매개적으로 작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칼빈주의는 종교는 피조물의 중재가 전혀 없이(nullis mediis interpositis) 하나님과 인간 마음의 직접적 교통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소개한다. 물론 타락한 사람에게 중보자가 필요하지만, 그 중보자는 오직 하나님이어야 하고, 사람이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에 의해 확증될 수 있다는 것이 칼빈주의의 답이다.

셋째. “종교는 우리 개인 존재와 실존의 일부분에서 작용하고 마는가 아니면 전체에서 작용할 수 있는가” 대해서 칼빈주의는 종교가 가지는 ‘보편적인 특성과 적용’을 옹호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 따라서 “사람은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의 제단에 제물로 올려놓아야 한다.” 또한 칼빈주의는 감정이나 의지에 국한된 종교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의 이성적 의식(사람 안에 있는 로고스) 즉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비추는 사유의 빛’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칼빈주의에 의하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 서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는 종교를 단일한 단체나 사람들 가운데 몇몇 집단에 국한시킬 수 없고, 인류 전체와 관계있다고 본다.

넷째. “종교는 인간을 정상적으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비정상적으로 봐야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칼빈주의는 ‘비정상적’(abnormaal)이다고 대답한다. 칼빈주의는 불완전한 종교 형식을 창조의 결과로 보지 않고 타락의 결과로 설명한다. 최초의 사람은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에서, 순수하고 참된 종교에 의하여 고취된 상태로 지음 받았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이것을 깨닫고 죄 의식을 느끼며 한탄스러운 타락을 이해한다. 이것에 대한 회복은 오직 구원론적 방법으로만 가능한데, 이 결론에 따라 칼빈주의는 참된 실존을 위한 중생의 필요에 대한 근거와 분명한 의식을 위한 계시의 필요에 대한 근거를 발견했다.

3.2. 그리스도 교회의 본질과 현현과 목적

‘종교 자체’를 다룬 후에 카이퍼는 “조직된 형식 혹은 종교의 현상적 양상으로서 교회”에 대해 강연하는데로 나아간다. 화란국교회 신학자였던 우쁘끄 노르트만스(Oepke Noordmans)가 “카이퍼와 교회는 거의 서로 연결되어 있다”라고 논평했듯이, 카이퍼의 사상 중 교회론은 그의 사상의 정수에 해당하기 때문에 많은 논의들이 그간에 이루어져왔다. 뿐만 아니라 카이퍼는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자랐으며, 박사논문 주제가 교회론에 대한 것이었고, 그 후에 교회론과 관련된 여러 저술들을 출간하였다. 우리는 방대한 논의로 인하여 고통 받는 대신에, 제2강연에서 카이퍼의 교회론이 어떤 내용인지를 확인해 볼 수 있게 된다.

3.2.1. 영적 유기체로서 교회

카이퍼에 의하면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영적 유기체이지만 현재 그 중심과 행동의 출발점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중생은 몇몇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라는 유기체를 구원한다”는 특이한 표현을 그는 사용한다. 그리하여 “이 중생한 인간들이 하나의 유기적인 몸을 형성하는데, 그리스도가 그 몸의 머리가 되시며 그 몸의 지체는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으로 하나가 된다.” 이것이 바로 카이퍼가 말하는 교회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유기체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야 우주의 중심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에, “현재 이 유기체는 이 땅에서 흐릿하게 분간할 수 있는 실루엣과 같을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참된 성소는 하늘에 있으며, 그곳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유일한 제사장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말한다.

카이퍼에 의하면 칼빈주의는 “원칙적으로 제사장직이나 제단, 성소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칼빈주의가 반대하며 맞서 싸운 것은 “유일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가리우고, 참된 제단과 참된 성소를 볼 수 없도록 만드는 사제주의(sacerdotalism)”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상적 제사장을 교직제의 형식으로 보존했던 감독파, 그리고 군주를 최고 감독으로 교회 위에 세웠던 루터파와는 달리 “칼빈주의는 교회 봉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절대적으로 동등하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3.2.2. 땅 위의 교회

카이퍼는 이 땅위에서 나타난 교회 현현 형식에 대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규례에 순종하면서 교회적 연합 가운데 사는 여러 신자의 지역적 회중, 신앙고백자의 집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칼빈은 교회를 ‘신앙을 고백하는 개인’ 가운데서 발견하였다. “이 개인들이 성경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의 규례를 따라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여 왕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며 함께 사는 일에 노력하는데, 이것이 바로 땅의 교회”라고 본 것이다. 신자들에게 더이상게 마술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물이나 기관이나 영적 단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 땅의 교회에서 “보편적 제사장직” 즉, 만인 사제직(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카이퍼는 말한다.

카이퍼는 “참된 하늘에 있는 불가시적 교회는 지상의 교회 안에 모습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참된 본질적 교회는 중생한 사람이 지체로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이 땅의 교회 역시 그리스도께 연합되고 그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 땅의 교회는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하고, 권징을 행하여 모든 일에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한다.”고 카이퍼는 주장한다.

카이퍼는 “이 땅 위의 교회가 가지는 정치적 형식”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자기 교회를 가장 효과적으로 통치하신다. 성령으로 각 지체 가운데 역사하시므로, 신자간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교회 내에는 오직 섬기고 이끌고 규제하는 사역자만 있을 뿐이다. 장로교의 정치 형식은 이중적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절대 군주제이지만, 실제 교회 정치는 민주적이다.” 카이퍼는 “교회의 권력은 그리스도로부터 회중에게 직접 내려”오고, 또한 이 권력은 “사역자 안에 집중되며, 이 사역자에 의하여 형제들에게 시행된다.”고 본다. 따라서 모든 신자와 회중은 “서로에게 아무런 통치권을 발휘할 수 없고, 모든 지역 교회가 평등하므로, 하나의 몸의 현현으로서 교회 회의를 통해서만 즉 연합을 통해서만 연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카이퍼는 역사적으로 나타난 “교단의 다양성”(소위 교회의 다형성 pluriformiteit van de kerk)에 대해서도 논급한다. “교회가 신자의 회중으로, 즉 신앙을 고백하는 개개인들의 연합으로 나타나고, 그리스도로부터 교회의 권력이 회중에게 직접 내려온다면, 역사와 지역 등의 차이로 인하여 다양한 교회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불가시적 교회)는 필연적으로 다양한 모습(교단)으로 현현되어 가시적 교회(지상 교회)를 비추게”된다고 말한다. 즉, 교단의 다양성에 대한 그의 평가는 비판적이지 않고 긍정적이다. 칼빈주의는 3세기 동안의 체험을 통해 다양성이 “강제적 단일성 보다 종교 생활의 성장과 번영”에 훨씬 더 기여한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3.2.3. 교회가 땅에 나타난 목적

카이퍼는 이 땅 위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중생은 선택받은 사람이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확신하게 하는데 충분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 하기 때문에 중생 다음에는 회심(conversion)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하여 교회는 말씀을 선포하여야 한다.

중생한 사람에게서도 불꽃이 빛나지만, 회심한 사람에게서 비로소 타오르는 불이 된다. 회심과 선한 행위로 타오르게 된 불은 이렇게 교회로부터 세상에 비친다. 그렇지만 우리는 구원의 보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회심과 성화를 드러낸다.

카이퍼가 말하는 바 교회의 다른 목적은 “성도의 교제와 성례를 통하여 이 작은 불꽃들을 하나로 모아 더욱 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순전한 경배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적 예배,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신성함을 보존하고 이를 외부세계에 지속적으로 새겨두기 위한 ‘교회 권징’도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집사 제도를 통해서 ‘박애(philanthropy)의 봉사’를 해야한다. 집사 제도는 구제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의 마음을 관대하게 하시는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위임하는 것은 그분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로서 단순히 그리스도께 돌려드리는 것일 뿐이다.

3.3. 실제 생활에서 종교의 열매(도덕)

흔히 칼빈주의는 도덕적 자극의 칼날을 무디게 하고 위험천만한 도덕적 방종을 만들어낸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이것은 실제 생활에서 맺는 종교의 열매로서 칼빈주의를 생각할 때 줄곧 지적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 교리가 부주의하고 불경건한 생활을 낳고 있다는 이러한 비난에 대하여, 카이퍼는 먼저 참된 칼빈주의자의 전형을 소개한다.

그 영혼에서 개인적으로 전능자의 위엄에 놀라고 그 영원한 사랑의 강력한 능력에 복종하여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따라서 영원히 하나님께만 감사할 것을 개인적으로 확신하고서 이 위엄에 찬 사랑을 사탄과 세상의 자기 마음의 세속적 태도에 맞서서 선포하는 그 사람 만이 참된 칼빈주의자이며, 칼빈주의의 기치를 높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에서 지킬 하나님의 최고 행동 원리로 받아들이는 결과로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 앞에 떨지 않을 수 없다.

카이퍼에 따르면 칼빈주의는 율법주의를 표방하지 않는다. 모든 구원의 공로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대속 열매로만 돌리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는 “모든 윤리적 연구를 시내산의 율법에 기초”한다. 이는 “모든 사람의 심비에 거룩한 뜻을 심어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참된 요약으로서 시내산의 율법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가 “하나님의 규례를 믿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삶이 창조에서 실현되기 전에 하나님 안에 먼저 있었다는 확신에 의한다. 따라서 모든 피조된 세계는 필연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법칙을 가지고 있다.”

칼빈주의자는 ‘자연의 법칙’이나 ‘일반 도덕 규례’, 그리고 좀 더 특별한 ‘기독교적 계명’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불변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도덕적 세계 질서 말고는 다른 것을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카이퍼는 “우리가 가진 양심 안에 종교와 윤리의 두 가지 실체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모든 것을 두는 것”이며,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경외는 하나의 현실로서 모든 생활에, 즉 가정에, 사회에, 학문과 예술에, 개인 생활에, 정치 활동에 덧붙여진다”고 설명한다.

카이퍼에 의하면 “나쁜 세계”와 “좋은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로 고통 받고 타락 이후로 일반 은혜에 의하여 보전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되어 심판의 공포를 지나 영광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의 동일한 세계”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는 “교회에 갇혀서 세상을 그 운명에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는 이 세상의 발전을 훨씬 높은 단계로 밀고 올라가되,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올라가며 좋은 소식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지탱하려고 한다. 이러한 불굴의 힘으로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 스며들어, 상업과 무역, 수공예와 산업, 농업과 원예, 기술과 학문에까지 새로운 추진력을 갖게 한다고 카이퍼는 주장한다.

4. 제3강연: 칼빈주의와 정치

세 번째 강연에서 카이퍼는 종교의 영역을 떠나서 인간 생활의 다른 영역에 대해서 다루기 시작하는데, 그 첫 번째 영역이 바로 정치 영역이다. 그는 정치 발달에 미친 칼빈주의의 영향력을 보이기 위해 “(가시적이거나 불가시적인)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하나님의 주권’은 국가, 사회, 그리고 교회에 나타나는 주권으로 인류에게 부여되는 근본적인 주권이 된다.

4.1. 국가라고 규정되는 정치 영역에 나타난 주권

카이퍼에 의하면 국가를 형성하려는 충동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서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개별적으로 만드시지 않으시고, ‘출생’이라는 과정을 통해 전체 인류와 유기적으로 연합하도록 하신 것에 기인한다. 우리는 모두 한 인류이고, 한 피를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 전체는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카이퍼는 만일 죄가 없었다면 국가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죄 없는 세상에서는 커다란 유기적 공동체가 있을지언정, 인간들에게 필요한 법령이라든가 통제, 규율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국가 제도는 이를테면 “부러진 다리에 필요한 목발”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국가 형성, 행정관의 권력, 질서를 강제하는 모든 기계적 수단 등은 언제나 자연스럽지 못하다.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이 죄 때문에 행정관을 세우셨다”고 주장한다. 국가와 행정관 제도를 하나님께서 주신 ‘보조 수단’으로 받아야하는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국가 권력에 숨어있는 위험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카이퍼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칼빈주의적 고백은 모든 세상에 타당하며 모든 국가에 참되며 사람이 사람에게 발휘하는 모든 권위에 유효하다”고 말한 후에, 정치적 신앙을 세 가지로 요약 제시한다.

1. 하나님만이 국가의 운명에 관하여 주권적 권리를 갖고 계시며 어떤 피조물이라도 이런 권리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나라들을 만드셨고 그 전능한 능력으로 그들을 보존하며 그 규례로 그들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2, 죄는 정치 영역에서 하나님의 친정을 파괴했다. 그러므로 권위의 행사는 통치의 목적상 기계적 치료책으로 사람에게 입혀졌다.

3. 이 권위가 어떤 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엄위로부터 그에게 내려오는 권위에 의하지 않고는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동료 인간에 대한 권세를 결코 갖지 못한다.

4.2 사회 영역에서의 주권

칼빈주의에서는 국가와 별개로 존재하며 국가의 우월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신만의 권위를 갖는 가족, 사업, 과학, 예술 등을 “사회적 영역”이라고 이해한다. 이 사회를 응집체로 파악하지 않고 각각의 독립적 특성을 존중할 때, 우리는 “국가와 사회의 대립”을 말할 수 있다. “이 대립은 국가가 이 사회 영역의 우위에 있지 않으며 함부로 이 영역을 침입할 수 없음을 뜻한다.” 카이퍼에 의하면 “사회는 유기적이며, 국가는 기계적이다.” 사회 영역은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유지된다. 사회 영역의 이런 특징은 인간 활동이 자연을 다스리는 창조의 규례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형성되는 것이다.

반면에 국가는 창조의 규례로부터 유기적으로 자라난 권위가 아니라 죄로 인해 왜곡된 인간 생활을 위한 단순한 치료책에 불과하다. 카이퍼는 “국가의 권위 못지않게 하나님께서 창조의 규례에 따라 사회 영역에 심어 놓으신 주권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 권위라는 기계적 영역과 다른 한편 사회 영역의 권위라는 유기적 영역은 주권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 외에 자신보다 더 높은 것을 두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칼빈주의의 주장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 가운데 모든 권위의 원천으로 주장하기 때문에, 현존하는 법률을 넘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권세의 원천을 보게 하기 때문에 법률의 불의성에 쉬지 않고 항거하도록 해 준다고 말한다(111).

카이퍼에 의하면 “유기적인 사회적 권위는 각각의 영역에서 천재, 대가, 거장 등의 주권적 능력으로 나타난다.” 학문영역에서는 천재들이 그 시대를 지배하며 학파를 형성한다.

예술 영역에서는 대가들이 그 권위를 발휘하여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모든 자를 다스린다. 인격의 주권적 능력은 모든 개인 생활에서 자신의 영역을 다스린다. 대학은 학문적 지배권을 발휘하며, 예술원은 예술의 힘을 소유하고, 길드는 기술적 지배력을 발휘하고, 노동조합은 노동을 지배한다. 또한 가정 영역에서는 혼인, 교육, 소유 등에 대한 권리가 자생한다. 그리고 생활의 필요에 따른 지역 단위의 생존 영역이 형성된다.

카이퍼는 이 모든 사회 영역에서의 주권은 하나님께서 직접 부여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국가는 이 영역들에 대하여 법률을 강요할 수 없고 각 영역에 내재하고 있는 법칙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에게는 이 자율적인 영역에 대해서도 “강제할 수 있는 세 가지 권리와 의무”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1. 상이한 영역이 충돌할 때마다 각 영역의 경계에 관하여 서로 존중하도록 강제하는 권리와 의무. 2. 이들 영역에서 개인과 약한 자를 나머지 사람의 남용된 권력에서 보호하는 것. 3. 모든 사람이 국가의 자연적 통일성을 유지하도록 개인적 그리고 재정적 부담을 담당하도록 강제하는 것.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은 행정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법에 달려있다. 법이 각자의 권리를 표시하고, 국가의 권력 남용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국가의 주권과 사회 영역의 주권이 협력할 수 있는 출발점이 생긴다. “어떤 형식이나 방법으로든지 모든 계급과 지위에서, 모든 집단과 영역에서 건전한 민주주의적 의미의 법률 제정과 정부에 대한 합법적이고 질서정연한 영향력을 보장하는 것은 칼빈주의의 계획이었다”고 카이퍼는 말한다. 칼빈주의에 의하면 “서로 다른 영역을 침범하거나 그러한 것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를 위한 투쟁은 각자의 영역에서 개인의 의무가 된다.

4.3. 국가에서 교회의 주권

‘자유로운 국가 안에서 자유로운 교회’(Vrije kerk in de vrije land)는 카이퍼의 주간지 전면에 게시된 모토였다. 하지만 칼빈주의는 세르베투스 화형 사건 때문에 종교의 자유를 핍박해온 것처럼 비난받아 왔는데, 이러한 역사적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카이퍼는 “하나의 새로운 체계는 기존 체계와의 공통점에서 인식되지 않고 다른 점에서 구별된다.”라는 원칙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온갖 우상숭배와 거짓종교를 근절하는 정부의 의무는 칼빈주의의 발견물이 아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교 황제들로부터 당했던 종교적 핍박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던 것이고, 로마교회를 비롯한 모든 기독교 황제가 옹호했던 것이다. 로마교회나 루터교와 달리 칼빈주의의 숨결이 닿은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의 나라에서는 자유 교회들이 발전되었고, 그런 나라에서는 유대인이나 루터교도나 로마교도들도 자유롭게 그 신앙을 간직할 수 있었다. 칼빈주의가 가시적 교회의 모든 절대적 특성을 거부하는 이유는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카이퍼에 의하면 “칼빈은 비록 여전히 진리의 고백과 절대 진리를 동일시하였지만, 칼빈주의는 개인의 확신이 참된 가운데서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카이퍼는 이어서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행정관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행정관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백성을 다스려야 하며, 하나님의 위엄을 모욕하는 모든 의도를 억제해야 하며, 그에 근거하여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가시적인 교회들에 대해서는 “각 교회(교단)들에 대하여 개별적 판단을 내리지 않고 교회들의 개별 영역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이는 정부가 진리에 대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정부에게 진리를 판단하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모든 행정관의 판단이 교회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고, “참된 교회로서 자신의 특성을 결정하고 자신의 신앙고백을 진리의 신앙고백으로 선언하는 것은 교회의 특권이지 국가의 특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국가 안의 자유로운 교회”만이 칼빈주의 관점이다. 국가의 주권과 교회의 주권은 서로 나란히 존재하며 서로 제한한다.

또한 개인의 신앙에 관해 정부는 “개인적 영역에서 갖는 주권적 양심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카이퍼는 말한다. 이는 “양심은 결코 사람에게 종속되지 않고 언제나 계속 전능하신 하나님께 종속”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심이 바로 “각 사람의 개인적 영역의 주권”이다. 카이퍼는 그리스도인들이 프랑스 혁명을 통해 “믿지 않는 다수와 동의해야 하는 시민적 자유”를 얻게 된 반면에 칼빈주의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마음의 확신과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는 양심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역설한다.

5. 제4강연: 칼빈주의와 학문(Het calvinisme en de wetenschap)

네 번째 강연을 통해 카이퍼는 칼빈주의의 학문관을 소개한다. 여기서 카이퍼가 말하는 학문이란 개별과학을 가리키지 아니하고 독일어로 Wissenschaft 그리고 화란어로 wetenschap이라고 칭하는 넓은 의미에서 학문을 말하는 것이다. 카이퍼는 네 가지의 요점을 사려 깊게 고찰해 보자고 말한다.

5.1 칼빈주의가 학문에 대한 사랑을 촉진하고 장려했다.

학문에 관련하여 카이퍼가 제시하는 첫 번째 요점은 “칼빈주의가 학문을 촉진하고 그 원칙이 학문적 정신을 요구한다는 것은 엄정한 사실이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나라 역사 가운데 감동적인 사실 하나를 소개함으로 시작한다. 화란의 레이든 시가 스페인과 독립 전쟁을 치름에 있어서 견인불굴의 용맹으로 끝까지 버텨내고 승전한 후에 시민들은 황금이나 작위가 아니라 대학교 설립을 요청하였다는 것은 칼빈주의 네덜란드가 학문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려했다는 증거라고 소개한 것이다.

또한 카이퍼에 의하면 칼빈주의적인 예정론이야말로 “학문의 계발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전체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서 통일성을 추구하는 학문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칼빈주의적 신념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모든 사물, 즉 전체 우주의 존재와 과정이 변덕과 우연의 노리개가 아니라 법칙과 질서에 순종하여 자연과 역사에 그 계획을 이행하는 굳은 의지가 있다는 것말고 무엇을 뜻하는가? 이제 여러분은 이것이 우리의 지성에 하나의 전포괄적인 통일성이라는 확고한 개념을 심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 나와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가?

카이퍼는 현대 철학자들뿐 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학문 전체 발전이 굳건한 질서에 따라 “하나의 고정된 계획을 지향하며, 하나의 원리에서 존재하고 발전하는 우주를 가정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본다.

카이퍼에 의하면 “칼빈주의는 조롱과 모욕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전체 생활이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통일성과 안정성과 질서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굳건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칼빈주의가 자신의 세계관에서 우리 가운데 심지어 일반 사람의 광범위한 집단에서도 장려되는 “통찰의 통일성, 지식의 확고함, 질서”를 요구한다는 점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백한 필요 때문에 지식에 대한 갈구가 되살아났으며, 이 갈구가 칼빈주의 나라보다 더 풍부하게 채워진 곳은 없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 가능한 일이다고 본다.

5.2. 칼빈주의는 학문을 제 영역에 회복시켰다.

카이퍼는 두 번째 요점으로 “중세 때 도외시되었던 우주론을 칼빈주의가 회복시킴으로서 학문을 제 영역에 회복시켰다”고 말한다. 칼빈주의만이 “우리를 계속 십자가에서 창조로 돌아가도록 장려하는 자신의 지배적인 원리와 그에 못지않은 일반은총(gratia communis) 교리와 이제 성경이 그 안에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숨겨 있다고 하는 저 의의 태양에 의하여 조명된 우주의 광대한 영역을 학문에 다시 활짝 열었다”고 카이퍼는 단언하고 주장한다.

5.2.1. 칼빈주의의 일반적 원리

모든 사람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구원론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형태의 이원론(dualism)도 제시하지 않는다”고 카이퍼는 말한다. 성경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창조의 중보자로 제시하고 있으며, ‘영혼의 중생’만 아니라 ‘우주의 새롭게 됨’도 말해준다(마 19:28).

또한 미래의 최종적인 산물은 구원받은 영혼들의 영적 존재뿐만 아니라 전체 우주의 회복이다. 회복은 첫 창조의 구원이며, 계속 구원이 될 것이며, 우리 하나님이 원래 손으로 지으신 것에 대한 신정론이 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훨씬 큰 중요하다.

이와 같이 “복음의 광범위하고 포괄적이고 우주적인 의미(de brede, alomvattende, kosmologische betekenis van het evangelie)를 다시금 파악하고 되살려낸 이는 칼빈”이라고 카이퍼는 밝혀준다. 칼빈주의는 중세에 유행했던 “세상에 대한 경멸과 현세적인 것에 대한 무시와 우주적인 사물에 대한 평가”를 단번에 종식시켜 버렸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두 방도로 성경과 자연을 제시했고, 또한 성경을 ‘안경’으로 비유하여 이 안경으로 우리가 자연의 책에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다시 해독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5.2.2. 일반은총론

그러나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죄로 인한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by sin) 교리는 우리의 생활 경험과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는 점을 카이퍼는 인정한다. 우리는 불신자들 가운데서 “탁월한 문학 작품이나 천재의 불꽃이나 재능의 광채”를 발견하곤 하고, “아름다운 성품과 열정과 헌신과 사랑과 솔직함, 신실함 그리고 성실감과 같은 소위 이교도의 덕”을 명백하게 목도하곤 하기 때문이다. 카이퍼는 여기서 인간 본성이 선하다거나, 타락후 덧붙여진 은사는 빼앗겼어도 자연적 은사는 남아 있다는 식의 설명을 거부하고, “한편으로는 가장 절대적 의미에서 우리의 죄 개념을 택함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은총 교의로 타락한 사람 안에 있는 선한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 칼빈주의적 방식임을 소개한다. 하나님은 일반은총으로 “사람 안에서 죄의 활동을 억제하되, 부분적으로는 그 세력을 부수심으로서, 부분적으로는 사람의 악한 영을 길들임으로써 그의 나라와 가정을 교화시키심으로써 억제하신다.” 물론 중생하지 못한 자의 매력은 사람의 방식을 따른 것이다. 하지만 죄의 방식은 예전처럼 해롭다. 일반 은혜는 “죄의 핵심을 죽이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지 않고, 죄의 완전한 실현을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을 억제하신다. 그리고 악에서 선을 내는 것은 하나님이시라”고 카이퍼는 말한다.

그러므로 카이퍼에 의하면 “칼빈주의자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비난하는 일에 태만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이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함께 살 수 있게 하시고, 개인적으로 두려운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불신자들 가운데 나타나는 온갖 보화들과 선의 출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우리는 “교회 뿐만 아니라 세상도 하나님께 속하며 이 둘에서 최고의 경영자와 건축가의 걸작을 탐구”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게 된다. 하늘에 속한 것 뿐 아니라 이 땅위에 속한 여러 분야에 대해서도 연구하고자 하는 신성한 의무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진영에서 가장 심오한 탐구자가 스스로를 부단없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인으로 여기고, 세상 일에 대한 그의 찬란한 깨달음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고 여기는 것은 이 영광스러운 일반 일총교의 덕분이다.”고 카이퍼는 결론짓는다.

5.3 칼빈주의는 학문의 본질적인 자유를 발전시켰다.

학문에 있어 자유는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지만, “학문의 자유는 방종이나 무법에 떨어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카이퍼는 말한다. 모든 학문은 “자신의 주제와 지극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자신의 고유한 방법이 요구하는 바를 엄격하게 지”킬 때에 자유로울 수 있다고 카이퍼는 말한다. 그리고 학문이 가지는 자유는 “학문에 꼭 필요한 원칙에 뿌리를 박지 않은 모든 부자연스러운 속박에서 자유로운데 있다”고 하면서 중세 대학이 교황권에 의해 통제된 것을 역사적 선례로 제시한다. 그에 반하여 칼빈주의는 “대학을 지배할 영적 머리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로마교 국가에서 억압받던 지식인들에게 자유로운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5.4. 칼빈주의는 학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했다.

네 번째로 카이퍼가 주목하여 말하는 것은 “학문의 자유와 해방은 필연적으로 원리의 첨예한 갈등과 충돌에 이르게 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카이퍼가 논급하는 갈등이란 “신앙과 학문의 갈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주가 ‘정상적 상태’라고 하는 확언과 ‘비정상적 상태’라고 하는 확언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에 주목한다. 정상론자들은 “자연적 자료 외에는 의존하지 않으려하며, 모든 현상의 동일한 해석을 기어코 발견하려 하며,” 따라서 모든 초자연적인 기적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진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비정상론자들은 이에 반대하여 하나님에 의한 창조를 믿으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독립적인 종으로 보며, 하나님의 기적을 믿는다. 이렇게 “두 개의 학문적 체계 혹은 학문적 노력”이 각자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카이퍼는 “이 두 학문은 모두 인간 지식의 전체영역을 주장하며 자신의 최고 존재에 관한 제안을 자신의 세계관을 위한 출발점으로 갖는다”고 논평한다. 카이퍼는 자기 당대의 19세기 현대신학도 정상론자의 학문에 속하기를 택했다고 본다. 카이퍼가 판단하기에 양자는 절대적으로 다른 출발점이며, 기원에 공통점이 전혀 없으며, 타협의 여지도 없기 때문에, 오로지 양자 중 선택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칼빈주의는 이와 같은 갈등과 투쟁에 대하여 난공불락의 입장을 취한다. “학자는 자신의 의식으로서 이 인간 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간파한 칼빈주의는 즉시로 ‘인간 의식(menselijke bewustzijn)’으로 되돌아 갔다.” 칼빈주의는 사물의 현재 조건에 관하여 두 종류의 인간 의식, 즉 ‘중생자의 의식’과 ‘비중생자의 의식’을 나눈다. 칼빈주의자의 의식을 구성하는 것은 ‘죄의식’과 ‘신앙의 확실성’과 그리고 ‘성령의 증거’이다. “사람의 의식이 이처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 의식에서 출발하는 학문도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카이퍼는 주장했다. 모든 학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개별 학문 분야에는 “원리의 대립과 다소간 연관되고 따라서 원리의 대립에 틀림없이 개입”하게 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카이퍼가 활동했던 19세기 특히 중엽에 이르러서는 화란 전 대학 전 학부에서 정상론자들이 90%를 차지한다고 말할 정도로 우세하였다. 그와 같은 때에 칼빈주의의 학문 영역에서의 투쟁은 단지 신학교를 세우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칼빈주의 원리의 기초에서 모든 학문의 전반적 계발을 도모하는 대학의 설립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소신의 결과 카이퍼는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를 설립한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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